거리를 다니다 보면 ‘십자가’가 눈에 많이 띈다. 또한 교회의 첨탑 위에 있는 십자가뿐 아니라 젊은이들의 귀와 목에 찰랑거리는 십자가를 많이 보게 된다.

십자가는 주님의 고난을 상징하는 것이며 우리 죄의 대속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아픔의 십자가가 사람들의 목화 귀에서 자신을 꾸미기 위한 장식품으로 화려하게 포장되어 빛나고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우리를 구속한 상징의 증표로만 머물러 있기를 거부한다. 즉 우리가 몸소 지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가볍게 몸에 걸칠 뿐 십자가의 참뜻을, 십자가의 희생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지려하지는 않는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지신 고통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 십자가는 볼품없는 투박한 나무를 무겁게 얽어 놓은 것이다. 화려하고 멋있게 장식된 가벼운 십자가만 영리하게 지려고 하지 말고,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나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뒤를 따라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십자가를 영광과 화려함으로 바라보지 말고 스스로 져야 할 십자가로 알고 함께 지고 나간다면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의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이요, 다가오는 21세기의 교회 갱신은 물론 이 땅의 참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축복받기를 원한다. 물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투박한 나무 십자가가 등에 메여져 있을 때에 참 구원의 빛이 더욱 빛날 수 있다. 십자가는 겉치레가 아니다. 팔고 사는 상품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오로지 주님의 분부대로 십자가 지는 운동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투박한 이 나무 십자가를 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그냥 버려두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친히 큰 사람으로 보듬어 주시고 힘들고 어려운 그 길을 함께 걸어가 주신다.

지금은 십자가의 행진이 필요한 때이다. 내가 진 십자가가 날 위해 주님이 지신 무거운 십자가인가? 빛나는 금 십자가만이 좋은 것이 아니라 조용히 말없이, 묵묵히, 그리고 겸손히 투박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더욱 필요한 때이다.

만약 예수님이 지금 오신다면 누구를 찾아 가실까 생각해 본다. 진정 투박한 나무 십자가를 떠난 친교, 선교, 교육, 봉사, 행사 등은 참 생명을 잉태할 수 없다. 우리 역사 속에 개입하여 오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우리의 응답에서 오며, 하나님의 역사의 물음에 무반응하거나, 회피하거나, 보류하거나, 연기하면 십자가의 구원은 우리 곁을 떠날 것이다.

십자가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십자가가 더 강한 언어로 우리에게 지금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 한국교회는 이 투박한 나무 십자가를 등에 지고 묵묵히 따라가는 제자되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장 눈앞의 이익을 위해 십자가를 핑계삼아 거짓된 제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지금 당장 아름다운 빛을 발하지는 않지만 우리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고 믿어주시리라 여기며 끝까지, 묵묵히 그 분만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한다.

세상이 점점 더 혼탁해지고 있다. 이제 썩어질대로 다 썩어져 제 빛을 모두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의 생명의 십자가이다. 다소 힘들고 어렵더라도 우리 그분의 십자가를 즐거운 마음으로 짊어지고 가자. 지금 당장 화려한 멋은 없지만 우리 그분의 진리의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짊어지자.

그분의 십자가를 짊어질 때 미래가 있고, 하늘나라가 있다. 우리 한국교회는 이 미래와 소망 속에 우리의 젊은이들을 키우고, 우리의 삶을 살찌우고, 우리의 인생의 꽃을 피워야 할 것이다.

엄문용 총무(대한기독교교육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