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부터 거의 45년 전에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신약성서의 배경사를 가르치시던 챨스 구두인 박사가 나에게 사해사본의 사진판을 주시면서 읽고 해석하라는 숙제를 주셨을 때, 히브리어는 고사하고 영어까지 사전을 찾아가며 겨우 문법을 익히던 한국학생으로 그 충격과 신선함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그 뒤로 사해사본의 중요성을 깨닫고 관심을 갖게 되고,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프리취(C.T.Fritsch)교수의 사해사본 강의를 듣고 성지순례를 할 때마다 쿰란 수도원에 가서 그들의 생활과 사상을 그려보곤 하였다.
사해사본(The Dead Sea Scrolls)은 1947년 봄이나 초여름에 아랍 베두인 타아메레 종족으로 양을 치던 목동 무하메드 에드 딥(Muhammed ed-Dib)이 염소 한 마리가 도망쳐 그 염소가 들어간 동굴에 돌을 던졌는데 그릇이 깨어지는 소리를 듣고 호기심으로 그 동굴 속에 들어갔다가 두루마리들이 들어있는 것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때 당시는 이스라엘이 독립하기 직전 이스라엘과 아랍권의 첨예한 대립으로 초긴장 상태여서 세상에 바로 알려지지도 않았고 또 그 곳을 쉽게 답사하거나 발굴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이 목동은 베들레헴에 있는 수리아 정교회 교인으로 고물상을 하는 칸도(Kando)에게 넘기고, 그는 자기 교단의 최고 어른이신 예루살렘의 성 마가 수리아 정교회 수도원 원장인 사무엘 주교(Mar Athanasius Yeshue Samuel)에게 팔았다. 사무엘 주교는 두루마리의 진정성과 가치를 알기 위하여 예루살렘의 미국 성서고고학 연구소(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로 가지고 가서 1년 뒤인 1948년 4월에야 비로소 학계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 사해사본이 일반 대중이나 학자들에게 크게 센세이숀을 일으킨 것은 메소포타미아에는 수천년 전의 점토판들이 발견되고, 비가 없는 애굽에는 파피루스나, 피라밑의 벽에 삭인 글들이 발견되었는데, 이제까지 팔레스타인 성지에서는 글이 기록된 두루무리가 발견된 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성지에서 일어난 가장 놀라운 고고학 발견"이며,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고고학 발견"이며, "현대 최고의 사본 발견"이라고 흥분하였다. 기독교 기원 연구에 가히 혁명적 발견이다.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교의 고고학 교수인 수케닉(Eleazar L. Sukenik)교수가 사해 근방에서 발견된 두루마리들 중에는 주후 70년 이후에 쓰여진 글이 하나도 없다고 발표하였을 때에 학계는 믿지 않거나 그저 호기심 정도 나타냈을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카이로에 있는 중세기의 사본이 주후 895년에 쓰여져, 적어도 사해사본은 1000년 이전에 쓰여졌기 때문이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구약성서의 전승과 정경화 과정, 성경의 제본이나 필경체 연구 등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사해사본의 중요성은 구약성서 연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구약성서가 마치고 신약성서가 쓰여질 때까지, 주전 450년부터(말라기서는 주전 460년),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서를 쓴 주후 50년까지 500년간의 역사는 성서적으로는 공백기간이다. 신약성서와 유대인 역사가를 통하여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센파, 열심당 등 여러 종파가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유대교의 사상이나 역사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유대인의 전쟁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것은 반대파들의 의견만 우리가 듣게 된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바리새파와 대결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예수 당시의 바리새파의 주장은 잘 모른다. 왜냐하면 바리새파의 주장은 주후 200년에 정리된 미쉬나(The Mishnah)에 수집되었는데, 랍비들은 유대교의 정통 바리새 신학에 맞지 아니하면 문서 자체를 없애버리거나 전부 다 제거했기 때문이다.
사해사본에 대한 근본적 관심은 신약성서와 초대교회의 탄생과 관계 때문이다. 사해의 동북 편에 있는 쿰란 수도원은 세례 요한이 세례를 준 요단강에서 빤히 바라다보이며, 예수께서 시험받으신 유다 광야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이 빈들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다고 할 때에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쿰란 수도원의 엣센파와 같은 때 같은 곳에서 사역하였기 때문이다. 사해사본과 신약성서가 얼마만큼 관계가 있는지는 학자의 연구와 평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적어도 예수님이나 세례 요한이 그들의 존재나 그들의 생활이나 가르침을 몰랐다는 어거지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같이 사해사본의 발견은 구약성서연구, 유대교연구, 신약성서연구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사해사본을 깊이 연구한 어느 불란서 학자는 이를 두고 '성서연구에 있어 사해사본의 발견은 어느 혁명 중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혁명의 연속이다'라고까지 말했다.
성경은 아브라함과 롯, 이삭과 아스마엘, 야곱과 에서, 사울과 다윗 등을 서로 병렬함으로 그들 각각의 신앙과 그들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를 밝히고 있는데, 사해사본의 발견으로 우리는 이들의 주장과 사상을 비교검토하여 기독교의 진리와 복음의 진수를 더욱 더 밝힐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사해사본과 그 속에 쓰여진 인물들의 역사와 삶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그들의 사상이 신약성서와 초대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떠한 빛을 주었는가. 함께 들어가보자.
권오현 박사 (1938년 9월 30일생)
한신대, 연세대 대학원 졸업.
뉴욕 대학에서 Ph.D.학위 받음
부르클린 영생장로교회 목사, 기독교복음선교협의회 회장.
'바울의 생애 상하권', '목회서신 주석', '이민신학 정립을 위한 가나안 정복의 세 양태', '성지 순례' 등 다수 출판
연락처: 718-209-2209
사해사본(The Dead Sea Scrolls)은 1947년 봄이나 초여름에 아랍 베두인 타아메레 종족으로 양을 치던 목동 무하메드 에드 딥(Muhammed ed-Dib)이 염소 한 마리가 도망쳐 그 염소가 들어간 동굴에 돌을 던졌는데 그릇이 깨어지는 소리를 듣고 호기심으로 그 동굴 속에 들어갔다가 두루마리들이 들어있는 것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때 당시는 이스라엘이 독립하기 직전 이스라엘과 아랍권의 첨예한 대립으로 초긴장 상태여서 세상에 바로 알려지지도 않았고 또 그 곳을 쉽게 답사하거나 발굴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이 목동은 베들레헴에 있는 수리아 정교회 교인으로 고물상을 하는 칸도(Kando)에게 넘기고, 그는 자기 교단의 최고 어른이신 예루살렘의 성 마가 수리아 정교회 수도원 원장인 사무엘 주교(Mar Athanasius Yeshue Samuel)에게 팔았다. 사무엘 주교는 두루마리의 진정성과 가치를 알기 위하여 예루살렘의 미국 성서고고학 연구소(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로 가지고 가서 1년 뒤인 1948년 4월에야 비로소 학계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 사해사본이 일반 대중이나 학자들에게 크게 센세이숀을 일으킨 것은 메소포타미아에는 수천년 전의 점토판들이 발견되고, 비가 없는 애굽에는 파피루스나, 피라밑의 벽에 삭인 글들이 발견되었는데, 이제까지 팔레스타인 성지에서는 글이 기록된 두루무리가 발견된 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성지에서 일어난 가장 놀라운 고고학 발견"이며,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고고학 발견"이며, "현대 최고의 사본 발견"이라고 흥분하였다. 기독교 기원 연구에 가히 혁명적 발견이다.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교의 고고학 교수인 수케닉(Eleazar L. Sukenik)교수가 사해 근방에서 발견된 두루마리들 중에는 주후 70년 이후에 쓰여진 글이 하나도 없다고 발표하였을 때에 학계는 믿지 않거나 그저 호기심 정도 나타냈을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카이로에 있는 중세기의 사본이 주후 895년에 쓰여져, 적어도 사해사본은 1000년 이전에 쓰여졌기 때문이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구약성서의 전승과 정경화 과정, 성경의 제본이나 필경체 연구 등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사해사본의 중요성은 구약성서 연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구약성서가 마치고 신약성서가 쓰여질 때까지, 주전 450년부터(말라기서는 주전 460년),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서를 쓴 주후 50년까지 500년간의 역사는 성서적으로는 공백기간이다. 신약성서와 유대인 역사가를 통하여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센파, 열심당 등 여러 종파가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유대교의 사상이나 역사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유대인의 전쟁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것은 반대파들의 의견만 우리가 듣게 된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바리새파와 대결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예수 당시의 바리새파의 주장은 잘 모른다. 왜냐하면 바리새파의 주장은 주후 200년에 정리된 미쉬나(The Mishnah)에 수집되었는데, 랍비들은 유대교의 정통 바리새 신학에 맞지 아니하면 문서 자체를 없애버리거나 전부 다 제거했기 때문이다.
사해사본에 대한 근본적 관심은 신약성서와 초대교회의 탄생과 관계 때문이다. 사해의 동북 편에 있는 쿰란 수도원은 세례 요한이 세례를 준 요단강에서 빤히 바라다보이며, 예수께서 시험받으신 유다 광야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이 빈들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다고 할 때에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쿰란 수도원의 엣센파와 같은 때 같은 곳에서 사역하였기 때문이다. 사해사본과 신약성서가 얼마만큼 관계가 있는지는 학자의 연구와 평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적어도 예수님이나 세례 요한이 그들의 존재나 그들의 생활이나 가르침을 몰랐다는 어거지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같이 사해사본의 발견은 구약성서연구, 유대교연구, 신약성서연구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사해사본을 깊이 연구한 어느 불란서 학자는 이를 두고 '성서연구에 있어 사해사본의 발견은 어느 혁명 중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혁명의 연속이다'라고까지 말했다.
성경은 아브라함과 롯, 이삭과 아스마엘, 야곱과 에서, 사울과 다윗 등을 서로 병렬함으로 그들 각각의 신앙과 그들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를 밝히고 있는데, 사해사본의 발견으로 우리는 이들의 주장과 사상을 비교검토하여 기독교의 진리와 복음의 진수를 더욱 더 밝힐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사해사본과 그 속에 쓰여진 인물들의 역사와 삶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그들의 사상이 신약성서와 초대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떠한 빛을 주었는가. 함께 들어가보자.
권오현 박사 (1938년 9월 30일생)
한신대, 연세대 대학원 졸업.
뉴욕 대학에서 Ph.D.학위 받음
부르클린 영생장로교회 목사, 기독교복음선교협의회 회장.
'바울의 생애 상하권', '목회서신 주석', '이민신학 정립을 위한 가나안 정복의 세 양태', '성지 순례' 등 다수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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