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랜타기독일보에서 매주 몇몇 지역교회 목회자들의 최근 설교문을 요약 정리해서 소개하는 <주일강단>을 시작합니다. 척박한 이민사회에서 눈물로 말씀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목회자들을 통해 전달되는 말씀이 갈급한 심령으로 은혜를 사모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은혜와 소망을 전해줄 것을 믿습니다

탬파한인장로교회 담임 김용일 목사
본문 : 욘3:1-5, 눅11:32 “요나와 예수님의 전도와 회개”


선교와 전도는 교회의 해야 할 일입니다. 이 땅이 다시 복음으로 회복 되도록 기도하고 전도하고 노력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신약 본문을 보면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요나하고 예수님을 비교하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한 사람과 예수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을 비교하는 말씀입니다. 심판 때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서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을 정죄할 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요나는 선지자로서 오늘날 목사님과 비슷한 사람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요나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라고 하십니다. 요나는 다시스로 갑니다. 하나님 하라는 것에 정반대로 합니다. 대풍에서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요나는 나중에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있다가 회개하고 니느웨로 갑니다. 하나님께서 두번째 명령을 요나에게 하십니다. 요나서 4장을 보면 요나가 억지로 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 뜻에 불순종하는 선지자, 목사님을 상징합니다. 요나는 아무런 기적이나 표적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요나는 저주로 일관한 사람이었습니다. 불순한 태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불성실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요나는 단 하루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말씀을 듣는 사람을 미워했습니다. 특이한 사람입니다. 요나는 저주만 합니다. 그의 설교를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저주입니다. 회개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돌이키는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저주입니다. 또한 요나는 니느웨 사람이 멸망하기 바랬습니다. 니느웨 사람이 금식을 선포하고 베옷을 입고 회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요나서 4장에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요나는 자기 말씀 듣는 사람이 전부 멸망하기 바랬습니다. 요나는 자기 설교를 듣는 사람이 멸망하기를 진심으로 바랬던 사람이었습니다. 요나는 자기가 전하는 말씀에 선하게 반응하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요나는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면서 화가 많이 납니다. 심히 싫어하고 노했습니다. 목사님이 가장 바라는 것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것도 싫어했습니다. 그런 것에 분노했습니다. 사람이 좋게 변하는 것을 보면서 싫어하고 화내는 목사님이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이런 사람의 저주의 메시지만 듣고도 회개하고 구원 얻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믿을 만한 것은 하나도 없는 사람, 저주로만 일관하는 사람, 마음에 미움, 나오는 말은 저주, 사람의 멸망만을 바라는 그런 선교사입니다. 회개의 권고, 복음 메시지가 없는데 그런 것만 듣고도 회개하고 구원 얻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신약 본문 ‘예수님께서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의 저주의 말만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핑계 될 수 없습니다. 구약을 보면 나훔에 니느웨에 대한 경고가 다시 나옵니다. 100년이 지나 세대가 달라졌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금 경고합니다. 그 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아 멸망했습니다. 요나의 저주로만 일관 된 전도에도 회개하고 구원 받은 이방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약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요나하고 전혀 다른 분입니다. 하나님 앞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기적과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본문 앞에 보면 사람들이 하늘에서 오는 이적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니느웨 사람은 아무 증언이 없는 요나의 말을 믿었는데 예수님 시대 때 많은 이적이 있었음에도 더 큰 것을 보이라 합니다. 매우 악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사랑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순전한 태도로 일관 하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심지어 문둥병자에게도 손을 대어 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을 선포하셨습니다. 마5장 산상수훈을 통해 8가지 복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과 복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구원 받기 원하셨습니다. 자기의 생명까지 희생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분을 판단하지 말고 핑계 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니느웨 사람과 같은 온전한 자리에 서는 우리 모두가 되기 원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와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역사는 ‘수’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구원하기 위해서 단 한사람 요나를 부르셨습니다. 한 사람을 통해 큰 성 니느웨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12명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택한 자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하며 베옷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회개의 증표입니다. 택함 받은 자의 특색은 말씀을 듣습니다. 택한 자들은 말씀을 들을 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나 같이 저주만 선포해도 들을 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들을 귀를 가진 성도의 모범이었습니다. 요나의 단 한가지 저주의 설교로 그 도시가 변화 되었습니다. 들을 귀를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구원의 길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어나 가서 외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와 보라’ 이 말이라도 선포해야 합니다. 작은 말이 큰 역사를 가져옵니다. 부흥의 바람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만이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힘써 충성하여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여러분 안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물과 피를 쏟으며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돌이키고 회개하면 우리는 누구든지 새롭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구원의 역사를 열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가페선교교회 담임 강진구 목사
본문 : 마11:25~27 “임금님과 어린이”


바리새인들은 아주 박식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삶 안에는 만족과 기쁨이 없습니다. 어느 편에 서야 나의 유익이 있는지 재빠르게 계산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안식과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자세로 신앙을 해야 하는가 생각을 해야 합니다. 본문에 예수님께서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타나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똑똑한 사람들 슬기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주님은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26절입니다. 주님이 곧 길과 진리, 생명이시기 때문에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27절입니다. 참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먼저 주님이 찬양을 드리시고 자신의 관해서 선포하십니다. 그러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주님에 대해서 혼란스러웠습니다. 세례요한은 주님의 나라가 임하면 원수들을 물리치고 저들의 세상을 만들 것을 생각했는데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시고 병자를 고치고 하니까 혼란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친족들도 불평이 가득합니다. 주님이 병자를 고치고 능력을 행하는 모습을 보니까 무리들도 주님을 배척합니다. 저들이 미워하고 인간 취급 안하는 세리와 친구가 되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니 불평이 있었습니다. 이 땅에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 지혜롭고 슬기있는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런 무리와 전혀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어린아이들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어리석고 부족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에서 성경공부가 중요합니다. 성경 공부가 바리새인과 같이 단지 지식을 얻으려 한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게 겸손하게 배우는 성경공부가 되어야 합니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은 성경을 믿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일은 숨겨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공부를 합니다. 지식을 얻는 전제 조건이 자신의 무지를 인정할 때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자라서 어른이 되었습니다. 가진 것이 많고 아는 것이 많고 정말 지혜로운 자가 됐다고 할 때 여기서 불행이 시작합니다. 이것이 전부인 줄 아는 사람이 바리새인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께서 숨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생각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이들에게 심령이 가난한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수용하는 자세가 되어 있는 자에게 나타내십니다. 아이들은 무엇이든지 수용하고 배우려고 하는 자세가 있습니다.

역사이래로 사람들의 최고의 관심사는 천국입니다. 천국은 누가 갑니까? 천국은 이 세상에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들이 가는 곳입니다. 누가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까? 잘나고 지식이 많은 사람, 돈 많고 권세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주님의 확고한 철학입니다. 마11장 11절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들어가야겠다’ 공격하는 자가 얻는 것입니다.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지식과 경험을 내려놓고 어린아이같이 단순하고 겸손한 자세로 천국을 침노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같이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교회로 나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옛날 어린 시절의 천진난만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서 이 말씀을 묵상하고 주의 말씀을 들으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분명히 선포하셨습니다. 이 시대 지식인들이 비웃고 용납하지 못하는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를 알 수 없다’고 확고하게 선포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어린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는 아버지가 한 말을 100% 믿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이가 아버지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라고 했으니까. 너무 두려운 일이지만 아버지가 말씀 하셨으니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이 어린아이이니까 바보 같으니까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완전한 어린아이 같은 분이시기 때문에 ‘이 모든 만물을 다 내게 주셨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 아버지를 볼 수 없다.’고 분명히 선포하십니다.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신 것을 감사합니다. 옳습니다.’ 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어린아이 중의 어린아이입니다. 최고로 완전한 어린아이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버지와 아들을 알지 못합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아버지 이것이 완벽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천국 가는 일은 완전한 어린아이인 예수님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천국 가는 길은 주님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마11장 27절입니다. 주님은 누구를 부르십니까? 어린아이와 같은 자를 부르셨습니다. ‘나를 믿으면 하나님 아버지를 보게 될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짐은 쉽고 가볍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믿는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너희도 나와 일체가 되어라 그리하면 만족과 쉼,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너희도 나처럼 어린아이가 되어라” 라고하셨습니다.

주님의 나라 그 왕국에 초청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들어갈 수 있습니까? 마지막 때에 큰 심판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비교할 수 없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쉼을 줄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쉼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주님께 나가야 합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그리고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라 하면 우리가 가야 합니다. 그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하면 만족함을 얻고 쉼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게 주의 품에 거하고 주님 앞에 우리 사정을 고할 때 주님은 우리의 짐을 지시고 가벼운 짐을 맡겨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에게 받은 짐은 아주 가벼운 짐입니다.

주님이 33년간 이 땅에 사시면서 일생의 목표, 열정적 목표는 하나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이것이 그 분의 일생의 목표였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우리 기도가 ‘나를 가르쳐 당신의 뜻을 행하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짐을 질 때 쉼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삶은 만족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꿈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고민이 없습니다. 불안하지 않습니다. 부모님만 계시면 험악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깨닫게 하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에 만족함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꿈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의 심령을 가지고 기도하고 믿음의 생활 하기원합니다.

한뜻사랑교회 담임 김종현 목사
본문 : 롬8:12 “은혜에 빚진자의 신앙생활”


로마서를 읽어보면 사도 바울은 ‘나는 누구이다’ 라고 말합니다. ‘나는 예수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나는 사도로 부름 받은 자입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두 번에 걸쳐서 나는 ‘빚진 자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자기 고백이요. 정체성임을 깨닫게 됩니다. 스스로에게 각인 시키기 위해서 고백을 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정체성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빚을 진 자이다’ 라는 말은 ‘내가 은혜를 받은 자’라는 것의 다른 표현입니다. 내가 갚을 빚이 있다라는 것은 과거의 어느 순간에 내가 어느 누구로부터 은혜를 받았다라는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빚쟁이다 끊임없이 고백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 빚을 갚는 자기의 삶을 감사하기 위함입니다. 은혜 받은 인생임을 깨닫기 위해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의 ‘나는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었는데 예수님의 보혈로 구속하여 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라는 신앙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 고백을 하는 사람이 크리스천입니다.

이 고백이 중요한 것은 이 고백 자체가 신앙의 출발이면서 신앙 생활의 기초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이 고백을 출발점으로 신앙 생활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이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서 살아간다 라고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 생활은 신앙 고백을 기초로 해서 생겨납니다. 신앙 생활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의 빚을 갚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빚을 갚는 과정입니다. 로마서 8장 12절 보면 ‘우리가 다 빚진 자로되’ 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빚진 자입니다. 두 종류의 빚진 자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빚진 자와 죄와 육신의 죄를 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는 죄의 빚, 육신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빚을 져서 하나님께 빚을 갚는 은혜의 종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빚을 갚고 살아가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빚을 갚기 위해서 사십니까? 아니면 육신이 원하는 것, 세상이 원하는 것, 죄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며 시간을 투자하며 살아가십니까?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종과 육신의 종입니다. 누가복음 7장 40~42절에 예수님께서 빚을 진 것과 신앙생활의 관계를 잘 설명해주셨습니다. 빚쟁이들에게 주인이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더 많이 용서 받은 사람이 더 많이 빚을 졌다는 것입니다. 43절입니다. 시몬이라는 유대인에게 예수님께서 누가 더 많이 빚진자이냐?라고 물었습니다. 더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네 판단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시몬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초대해서 대접하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재물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실 때 이가 모든 것을 갖춘 것 같지만 옥합을 깨뜨린 여인에 비해서 한참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판단 하는 것, 아는 것 그것이 아니라 섬기는 삶, 사랑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소중한지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는 걸로 끝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시몬과 같은 사람입니다.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사랑하는 삶을 살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보다 빚을 갚으며 사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수한 신앙인의 모습, 내가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그 은혜의 빚을 갚으며 사는 사람을 보기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빚을 갚기 보다 손해 보기 보다 더 가지려고 하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크리스천의 모습은 아닙니까?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의 눈을 감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모르고 세상 사람 보다 각박하게 살아가는 때가 아닌가 돌아보기 원합니다. 우리가 빚을 갚으려고 살고 있습니까? 더 가지려고 살고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 빚진자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빚을 가진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빚진자들입니다. 은혜의 종으로 살아 하나님께 칭찬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