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랜타기독일보에서 매주 몇몇 지역교회 목회자들의 최근 설교문을 요약 정리해서 소개하는 <주일강단>을 시작합니다. 척박한 이민사회에서 눈물로 말씀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목회자들을 통해 전달되는 말씀이 갈급한 심령으로 은혜를 사모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은혜와 소망을 전해줄 것을 믿습니다

아틀란타새교회 담임 심수영 목사
본문 : 출애굽기 3장 1 – 14절 “스스로 있는 자”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여러가지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사건은 우리들의 삶을 바꿉니다. 오늘 본문 출3장은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닌 모세 한 사람만이 아닌 온 인류를 바꾸는 중대사건이었습니다. 떨기 나무에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의 사건으로 모세에게 사명을 전달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출3장 1~14절 읽겠습니다. 이집트에 왕자였던 모세는 일련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고 평생 양떼를 치게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80세, 여느 때와 다름없이 양떼를 치고 있을 때 호렙에서 이상한 현상을 목격합니다. 떨기 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타지 않는 광경을 봅니다. 가까이가서 보니 하나님께서 모세 이름을 두번이나 부릅니다. 이름을 두번 부르는 것은 히브리사람의 언어와 문화속에서 친근한 가까운 사람을 부를 때 두번 부릅니다. 모세야 모세야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합니다. 신발을 벗으라 합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이 나타나셨고 모세와 만나기로 한 자리이기 때문에 거룩하다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이름을 부른 후 자신을 소개 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모세는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놀라운 사건은 이스라엘 한 민족 역사만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미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 백성의 고통을 보았고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을 아름다운 땅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겠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내 백성을 인도하여 내리라 하십니다. 모세는 중요한 두 가지 질문을 하나님앞에 합니다. 두 가지 질문 살아 숨쉬는 사람이라면 인생의 스스로 질문해봐야 하는 질문입니다.

첫번째 질문은 하나님 내가 누구입니까? 였습니다. 11절 모세는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자기가 누구인지 신분조차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모세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요셉까지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요셉은 하나님의 역사로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의 가족이 애굽에서 정착하고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한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가 애굽의 왕으로 세워지고 히브리 백성은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바로는 산파들을 시켜서 남아를 모두 죽이라고 합니다. 그 때 남자 아이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석달이 지나 갈대 상자를 만들어 나일강에 띄웁니다. 애굽의 공주에게 발견되어 그는 애굽의 왕자가 됩니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혜택을 받고 자라납니다. 어느 날은 자기 백성을 돌아 볼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기 백성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대항합니다. 이 일이 바로 왕에게 탄로나고 그는 도망자의 신세가 됩니다. 그의 나이 40세입니다. 오늘 본문은 40년의 세월이 지나 80의 나이에 하나님께 부름을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누구이기에 가야 합니까? 라고 질문합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내가 너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십니다.

두번째 질문은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입니다. 하나님은 존재 하시는가 인생의 있어서 중요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하나님 없는 삶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믿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실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그 모세의 질문에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 라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있는 하나님 대하여 우리는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은 상관 하시는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두번째는 나타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이제는 너의 하나님이 되겠다 말씀하십니다. 세번째는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내 백성을 인도해 내라고 하십니다. 젊었을 때는 애굽의 왕자로 자기 의지로 자기 힘으로 했습니다. 자신의 동기로 하면 금방 식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동기가 다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또 능력의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의 힘은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사명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는 기대 안에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틀란타연합장로교회 담임 정인수 목사
본문 : 행전12장 1- 5절 “선교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것이 선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교란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때부터 행하신 선하신 일을 선포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복음 전파하시고 치유하신 축사의 사역을 교회가 선교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선교의 대상이 되는 교회가 계속 변화 되고 있습니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선교는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는 성령으로 행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5절 말씀 헤롯 시대에 핍박이 와서 베드로가 옥에 갇혔습니다. 온 예루살렘 성도들이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으로 천사의 도움으로 나오는 기도의 승리에 대해서 나옵니다. 제가 북방 선교 가운데 이 말씀이 생생하게 다가 왔습니다. 중국의 선교 현장에서 사도행전의 마가 다락방의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합심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길을 여십니다. 기도할 때 사도행전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번 선교의 현장에서 사도행전의 핍박 가운데 복음을 전파했던 생생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정 가운데 농촌의 작은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초라한 예배당에서 피곤한 농부들이 모인 자리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초라한 그곳에 하나님의 놀라운 예배의 영광이 찾아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느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임재했습니다. 선교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한국에 소록도가 있습니다. 95%가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질병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모진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찬양 소리를 들으면서 나 자신을 돌아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향해서 불평하십니까. 소록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들을 볼 때 우리는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역사가 오늘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통해서 사도행전에 역사를 써내려가십니다. 우리들은 속 사도행전의 저자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앞으로 역동적인 하나님의 선교의 역사를 써 내려 가기를 축원합니다.

예수소망교회 담임 박대웅 목사
본문 : 갈5장 16 – 26절 “성령으로 행하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120명의 성도가 마가다락방에서 기도할 때 각 사람위에 성령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사랑의 방언을 하게 되고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복음 들고 전진하고 가는 곳 마다 교회 세우는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성령 충만은 제자들의 내적 상태를 변화 시키고 전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행전 20장 22절 사도바울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가고 싶은 대로 가는 사람이 아니였습니다.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갔습니다. 사도바울은 성령의 뜻을 순종해 마케도니아로 가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성령의 인도하심 민감했던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고 올라갑니다. 자기에게 환란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나아갑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삶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긴급하게 사도바울이 전하려는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1차 선교 통해 4개 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없던 사이 예루살렘에 율법주의 자들이 갈라디아교회에 이상한 복음을 전합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도 다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잘못된 이단 가르침으로부터 회복되게 하기 위해서 편지를 씁니다. 갈5장 1절 바울이 외치고 싶었던 말씀입니다. 여기서 종의 멍에를 맨다는 것은 율법의 정죄아래 다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주의 선생들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자유를 오해합니다. 율법주의자는 구원 받은 이후 성도들의 삶을 규제하는 법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주장은 매우 위험성이 있습니다.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달려 돌아가신 이유는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은 이 복음의 본질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가지고 있는 원죄 때문에 스스로 율법을 지키고 의롭게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면 우리는 율법 그 이상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많은 절망을 경험했습니다. 로마서 7장 죄의 법 아래로 끌려 들어가는 자신을 보며 탄식합니다. 구원 이후 우리는 주님이 말씀 하시는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직 성령이 함께 할 때 우리는 주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것은 특권입니다. 성령께서 구원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생명과 평안이 함께 따라 옵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실 때 우리 안에 기쁨이 임하게 됩니다. 본문 16절 사도바울이 교우들에게 율법주의 선생들에게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게 되면 육체의 욕심을 이기게 됩니다. 17절 18절 성령의 역사와 육체의 욕심은 적이 되어서 싸움을 합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실 때 우리는 모든 싸움을 능히 이기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을 내 편으로 하십시오 그러면 승리하게 됩니다. 성령을 따라 살 때 맺는 성령의 열매가 참된 열매입니다. 9가지 열매는 개인적인 성품을 말합니다. 개인적인 성품의 변화가 교회의 공동체 가운데 아름다운 관계로 세워지게 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교회 질서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따라 살게 되면 교회가 화평이 넘치고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