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도 채 안된 나꼼수의 인기가 감옥과 연계되면서 한없이 치솟고 있다. 현 정국과 연관된 비화를 공개하고, 젊은 사람들이 정치에 눈을 뜨게 한다는 사실에서……. 현 정치의 불신감에 기름을 붓는 일에서, 대안을 찾아보려는 면에서, 그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다.

필자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보수 기독교인으로서 엄청난 거부감이 있었다. 가식적이고 교만한 웃음소리와 욕지거리를 겸하는 비웃음, 기독교인 장로 대통령에 대한 공개 비난이 경건한 신앙심을 가진 나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결국 버튼을 눌러버렸다.

스물두 살의 아들 녀석이 나꼼수를 자꾸 다운받아와서 들어보라고 하여, 몇 회를 기분 나쁘게 청취하는 중에 그들의 논리에 점점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는 애청자가 되었다. 이제는 그들의 목소리와 새로운 입담을 기다리게 된 것이다.

나꼼수 이야기가 공감을 일으키는 것은

먼저 자신들을 서로 깔아뭉개고 들어가는 태도이다. 서로서로 약간의 비난과 질책을 곁들이면서 결국에는 자기들의 깔대기로 끝을 맺는다. 낮아지는 자세인 것이다. 즉 가면을 벗어 던져버린 태도인 것이다. 칭찬을 하면서도 듣는 이들의 맘에 있는 불편한 공감대를 파괴하는 고도의 술수이다.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것은 어느 면에서 가면을 두텁게 쓴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교회와 많은 관계 속에서 온통 가면무도회를 열게 되는 것인데, 나꼼수가 인기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가면을 벗기는 데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의 이야기는 사실과 현상을 논한다. 허위사실 유포라는 법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무척이나 많은 신경을 쓴다. 교묘하게 그것을 피해가는 고도의 기술을 부리고 있다. 필자는 그들의 이야기에 거부감을 가지고 들으면서도 어느 순간 동의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하고 편협한 자기 주장을 하기도 한다. 작은 사실을 크게 떠들어 허풍을 치는 일도 한다. 그러나 사실 어디에서도 이렇게 시원한 정치적인 해설과 유머와 풍자, 그리고 사실적인 도전을 불러일으키는 매체를 접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에서 혁신을 일으킨 일대의 사건이 아닌가 생각한다.

셋째, 목사 아들이 나와서 “내곡동 가까이”를 불러댈 때에는 허탈감으로 비난도 할 수 없었다. 보수적인 입장에서 거룩함에 대한 불경건함이라고 할까?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 아닌가 하는 여러 가지 생각에 저주를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다. 기독교가 온통 먹칠당하고 조롱을 당하는 느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불신자나 자유주의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보수 기독교인의 시각으로 보면 망할 짓이라고 여길 것이지만, 세상의 입장에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타락한 기독교 현상에 대한 사실적 비난일 뿐이다. 오히려 우리는 비참함을 가지고 통곡하며, 개인과 교회 공동체가 개혁을 이루어야 할 목표를 찾는 일이 더 시급하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 막대기와 채찍으로 생각하고 가려서 들을 수 있다면, 나꼼수는 여러 가지 방면에서 생각할 일과 도전과 배움을 가져다 준다. 비난할 일이 아니다. 현재 매우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고, 사회의 기존 가치관을 뜯어 바꾸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여야 한다.

우리 시대의 새로운 기류이다. 그들의 비난은 우리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 그것이 비난의 속성이다. 그것은 사탄의 무기일 수도 있고, 그리스도인을 다루는 하나님의 한 방편이기도 하다. 나꼼수를 만들어낸 것은 누구인가? 그들의 말을 뒤따라가면서 결과를 가지고 왈가왈부하기 전에 원인을 먼저 살펴야 한다.

언제나 우리는 원인이냐 결과냐를 가지고 논쟁을 하지만, 오늘의 사회 현상에 대한 대안을 찾고, 이처럼 타락해가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내려놓음이 오히려 겸허한 자세가 아닌가? 모두가 자기 관점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이러한 일에 대하여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대안을 찾는 것이 신앙인의 태도이다.

현대사회의 특징은 급격한 변화이며,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세상으로 고도 평준화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은 이러한 시대정신에 대한 이해와 감각이 필요하다. 시대는 앞을 향하여 몸부림치면서 달음질하고 나아간다.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사회개혁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세상을 거꾸로 가고 있는 모습인데,

첫째, 아직도 그 명예에 집착하여 한국 기독교 공동체를 파괴하여 가고 있다. 자신들의 유익을 공공의 이익이라는 말로 포장하며, 아전인수격으로 법을 고치고 반대하는 이들을 잘라낸다. 크고 작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행하고 있는 일이다. 대형은 대형답게 사고를 치고, 소형은 작은 울타리 안에서 또 아옹다옹하며 깽판을 친다.

둘째, 영적 세계에서 지도자요 장군인 오늘날의 목사들은 장군의식, 세상을 향하여 복음 전략을 세우고 세상을 다루어야 한다는 의식이 없다. 그저 직분을 이용하여 명예와 이익을 얻으려는 천박하고 소인배적인 태도만 가득한 것 같다. 그래서 자생능력을 상실한 기독교라는 말을 타 종교에서 하고 있다. 사회책임을 망각한 기독교, 죄책감을 상실한 기독교, 이러한 모든 이야기의 핵심은 교회 지도자들을 향한 손가락질이다.

우리가 살 길은 성령의 긍휼하심이다. 성도들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고 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기를 위하여 전적으로 의뢰하고 기도하고 있다. 이제 교회의 지도자는 순종함과 내려놓음의 헌신이 필요하다.

정의를 통한 정신적인 세대교체, 진리에 대한 탐구로 영적인 세대교체, 생물학적인 세대교체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이루기 위하여 의식을 가진 이들이 바른 교육을 시행하여야 한다. 시대를 이끌어 갈 지도자들을 육성하여야 한다. 이것이 다음 세대를 향한 오늘의 할 일이다. 집에서부터 교회에서나 그리스도인 공동체 속에서 이러한 일들이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

필자는 오늘 한국교회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양하라는 외침을 보낸다. 하나님의 은혜로 세월만 누린 자들에게, 전통과 습관과 권위만 가진 자들에게, 현상에 안주하고 만족하며 일종의 성공을 즐기는 이들에게, 꼼수를 부리는 목사와 장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혹은 선교지에서 행복(?)함으로 삶을 더부살이하며 선교를 매도하는 이들에게, 주의 이름을 위해 모든 권리를 포기하라는 권면을 드린다.

그래야 한국교회가 살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사회에서 교회를 다시금 신뢰하는 일들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70년대에는 한국 기독교사회에 학원복음화 운동, 민족복음화 운동, 세계복음화 운동을 외치며 젊은이들을 깨우고 도전하였다. 그런데 오늘의 시대에는 이러한 외침이 사라졌다는 것을 염려하는 동료의 이야기를 들으며 퍼뜩 깨어난다.

한국교회 강단에서는 아직도 축복을 외치고, 다원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위로가 격려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성도들을 달래고 눈물을 닦아주고 있다. 이것도 아주 필요한 일이다. 거기에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 주신 복을 가지고 사회와 국가와 민족과 세상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역할이 무엇인지를 설교하고 가르쳐야 한다. 나꼼수의 예리한 정치 분석, 내일을 전망하는 것이 거짓말 충돌질이라고 해도, 오늘 교회의 지도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사실이 아닌가? 기분이 상하고 도전이 되어야 한다!!! 그들의 말에 뒷북을 치지 말고, 우리의 나갈 길을 찾고 고민하여야 한다.

Sergei(모스크바 선교사)
Lee7095@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