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우리 조상들 모두 지옥에 가게 될까?

복음을 들어보지도 못한 때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 모두 다 지옥에 갔을까? 또는 유아로 죽게 된 아이들 모두 다 지옥 가게 될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해본다. 교파에 따라 조금씩 다른 견해가 있으며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므로 정확한 대답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구원론에 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에 중점을 두어 생각해 보도록 하자.

천국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이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고 천국 가게 된다.

세상에 여러 종교들이 있으며 저들 나름대로 구원에 이르며 천국에 가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은 저들의 주장을 거부하며 오직 구원에 이르는 길은 하나 밖에 없음을 선포하고 성경에서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예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말씀하셨고, 베드로 사도는 그의 설교에서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름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고 말했다. 이는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 즉 의롭다 함을 얻게 되며, 그 심령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자들은 모두 천국에 들어가게 되며 영생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기독인이라 하면서도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며 심지어 이를 가르치는 자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난 자들이며, 거짓 선지자들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어느 누가 구원을 얻었다 혹은 못 얻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사람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중을 보시고 아신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됨은 외모의 문제가 아니요 심중의 문제이며, 외형의 문제가 아니며 심령의 문제다. 마음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된다.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자들을 성도(Saints)라고 부른다.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자들은 모두 성도라고 부른다. 이는 거룩한(Holy) 백성이라는 뜻인데,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되게 세웠다는 것이다. 이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들이며, 또한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입어 구별되게 세우심을 받은 자들이다. 성경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 또한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고 말하고 있다. 또 바울 서신서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시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을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고 기록돼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어 구원에 이르게 된다. 이를 ‘이신득의’ 혹은 ‘이신칭의’라고 한다. 이 성도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이며, 이러한 삶을 통해 믿음의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애쓰며 살아가는 성화(Sanctification)되어져 가는 자들이다. 이러한 성도들이 마지막 날에 영화(Glorification)을 얻게 되여 영생을 누리게 된다.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우리 조상들 중에서 천국 가게 되는 자가 있을까?

여기에 대하여 대답에 Yes 혹은 No를 단호하게 말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불교, 유교, 힌두교, 이슬람교 이러한 종교를 통해서는 구원의 길은 전혀 없으며 또한 천주교에서 말하는 성모 마리아(인간)를 통해서도 구원받을 수 없다. 인간적으로 볼 때 나라와 민족 혹은 이웃을 위해 헌신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그러한 삶을 살았기에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 할 수도 없다. “사람의 보기에는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16:25)”고 성경은 말해 준다. 그러므로 종교(Religion)들 그 자체가 구원의 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사람이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참석하고, 성경을 수 없이 많이 읽었고, 헌금도 분에 넘치도록 하고, 구제나 봉사활동을 아주 많이 한다하더라고 그 사람이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교제의 삶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는 자라고 보장할 수 없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아가페=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가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고 성경은 말씀해 준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혀 들어볼 기회가 없었던 때에 그 지역에 살았던 자들은 모두 다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하여 필자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저들 전부 다 지옥에 간 것은 아니라 그들 중 얼마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창조주 하나님을 믿어 알게 되었고, 의롭다 함을 얻어,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고 정직하게 살아갔던 사람들 즉 구원함을 얻었던 자들이 분명히 있었다고 본다. 이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구약성경에서 많은 곳에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여 말하고 있다.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시1:6)”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었고 당세에 완전한 자이며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다(창6:8)고 말씀해 주며,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6:7)고 말씀해 준다. 그 후세에 하나님은 갈데아 우르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구별하여 가나안에 이주케 하시고 그와 그의 후손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셨고, 그 씨(Seed)인 구세주를 이 땅에 보내 주사 그 구세주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믿었으며 그 믿음으로 그는 오실 메시야를 대망하며 그를 기뻐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과 같은 시기에 살았다고 보는 동방의 의인 욥이 있다. 성경은 욥에 대해 “우스 땅에 욥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1:1)” 말해주며, 그는 동방에 살았으며 큰 부자였다(욥1:3). 분명 욥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였으며 천국을 소유하게 된 자이다. 욥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족보로 그 후손이 아니었다. 그러한 욥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셨고,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삶을 살았던 자였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욥을 칭찬하였고 그로 인하여 기뻐하셨던 것이다. (참고: 습3:17).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저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사30:18)”고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은 저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저들로 의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역사하시며 저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음으로 살았던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저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는데, 여기 열거 되지 않은 성도들도 수 없이 많이 있을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서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고 말씀해 주며, 구약시대의 살았던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었던 구원의 길도 믿음이었다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삼위일체 하나님)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를 믿어야 할지니라(히11:6)”고 말씀해 준다. 그리하여 히브리스 11장에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 믿음의 선조들을 열거해 준다. 여기에 가나안 족속이었던 기생 라합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방인으로 구원을 얻은 자들이 우스 땅에 욥이나, 가나안 족속의 라합 뿐이었겠는가? 그 외에도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 시기와 그 지역에 따라 하나님은 자기의 사람들을 세우시고 은혜를 베푸셨을 것이다.

필자는 분명 우리의 선조들 중에서도 욥과 같은 믿음의 사람도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 후손인 우리들이 지금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지 않는가? 인구나 땅 면적의 비율로 비교해서 계산해 본다면 어느 나라가 우리와 같은 선교의 나라와 민족이 있단 말인가? 과연 우리가 잘나서 혹은 운이 좋아서, 아니면 열심히 일해서 그런 결과를 나왔을까? 아니다. 우리 자신을 보면 얼마나 욕심과 경쟁, 투기가 많고 협동심이 없는 자들인가?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세우시는 것은 신앙의 선조들 중 순교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있었으며 복음을 위해 피흘린 분들이 많았다는 방증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결코 교만하거나 자만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회개하며, 겸손과 진실과 성실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면 복음을 들어보지 못했음에도 어떻게 창조주를 알고 믿게 되었을까?

하나님은 전지(Omniscience), 전능(Omnipotence), 무소부제(Omnipresence)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욥, 모세와 대화하시듯 은혜를 베풀 자에게 레마(Spoken Word)로 말씀하여 자기를 알게 하셨고 자기의 뜻을 계시하셨다. 이 계시를 받은 자들을 선지자라 말하며 이 선지자들의 증언을 하게 하셨고 그 증언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셨으며, 또한 하나님은 자기가 창조한 피조물들(우주, 자연, 식물, 동물, 무생물)을 통해서 자기를 나타내셨다.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피조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1:20)”라고 성경은 말해준다.

천국에 유아들도 들어가게 되는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은 유아들도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가 라는 질문도 해본다. 언약신학에 기초한 장로교회에서는 유아 세례를 베풀기도 하지만 침례교회에서는 유아 세례를 행치 않는다. 필자의 견해로는 유아로 죽었다고 자동으로 다 지옥에 가게 되거나 혹은 저들이 자동으로 다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천국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자들이 가는 곳이기에, 유아들 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누구나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럼에도 그 중에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 자를 두셨고, 저들 역시 유아나 혹은 모태 속에서 그 모습이 형성되어가는 태아라고 하더라도 그 중에는 구원을 받을 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쌍태를 가졌고, 에서와 야곱 쌍둥이를 낳았다.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말1:2, 롬9:13)고 성경은 말해준다. 그리고 다윗은 시편에 고백하길 자기가 모태에서부터 여호와를 의지하였고, 여호와께 맡긴바 되었다(시22:9-10)고 한다. 세례요한은 태아로 어머니의 복중에 있을 때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가 가까이 옴을 알고 뛰놀기도 했다(눅1:41).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심지어 모태에서부터 그 은혜 베풀 자를 택하셨다는 것이다.

필자는 예수님 탄생 때 같은 시기에 유다지역에 유대인의 자녀로 태어났던 유아들 중에 아기 예수 때문에 죽임을 당한 많은 유아들도 천국에 들어갔을 것이라 생각된다. 왜냐면 헤롯왕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당시에 수많은 어린 아이들을 살해했고, 이들은 그 희생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저주할 자에게 저주하셨다고 하나님을 불의하다 말할 수 있는가? 절대 그럴 수 없다.

필자는 예화를 들어 설명해 보고자 한다. 한국 고아들이 많이 미국에 입양되었다. 입양한 미국 부모들은 입양기관을 통해 소개 받고 입양을 해서 미국에서 좋은 학교도 보내며, 좋은 가정환경에서 잘 자라도록 키우고 있다. 그런데 그 입양된 아이가 양부모 슬하에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라가면서, “아버지, 한국엔 아직도 고아원에 나보다 더 잘 생기고 착한 아이들도 많은데 왜 나를 입양했습니까?” 라고 질문을 했다고 생각해 보자. 어떤 아이는 자기의 양부모가 더 많은 고아들을 양자 삼지 않았다고 불평하는 질문을 할 수 도 있고, 혹 어떤 아이는 자기는 부족하지만 양부모가 자신을 양자 삼아 준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질문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말의 내용은 같을 수 있으나 그 심중에는 완전히 상반되는 자세 일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저주받은 자의 모습이요, 후자는 축복 받은 자의 모습일 것이다.

과연 나는 어떤 심령으로 질문을 하고 있는가를 우리 자신 스스로 점검해 보자. 후자의 축복 자는 분명히 선택을 통해 축복을 누리는 자라는 생각에 자신도 성장하여 가정을 이루면 자신과 같은 고아들을 입양하는 부모가 될 것이다. 이것이 자기를 입양해준 양부모에 대한 사랑의 보답이 아닌가? 이와 같이 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았느냐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과연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그러한 은혜를 받은 자라고 한다면 나도 이웃에게 은혜/사랑(아가페)을 베푸는 자가 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이러한 자는 분명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며 더 나아가 천국에서도 상급을 얻는 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