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우리는 은혜의 의미는 무엇이며 또 은혜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를 구원 하셨습니다. 은혜 안에서 성령을 주시고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며, 사역에서, 성령의 은사를 주시어 섬기게 하시고 우리가 고난 받을 때 도우심도 다 그의 은혜 안에서 되는 것임을 우리는 지난 시간에 배웠습니다.
오늘은 은혜라는 개념 안에 남용되어지고 오해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바로 이 잘못된 은혜의 개념으로 신앙에 혼돈이 온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은혜로 구원 받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계속적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해야만 된다고 생각 하였습니다. QT를 해야 하고, 열심히 돌아다니면 가가호호 전도를 해야 하며, 일주일에도 몇 번씩 교회를 가야하고, 십일조, 감사 헌금 등 물질을 드려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은혜로 크리스천이 되고나서 계속적으로 일을 선한 일을 해야만 구원을 받는 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 하세요?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비슷한 생각을 갖고 계시는 분도 있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시간에 세 가지 가장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 은혜에 대한 잘못된 개념에 대해서 함께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1. 선한 행실을 하면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하실 것이다.
우리가 하루에 성경을 3시간 4시간 읽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철야를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할 것이라고 생각 한다는 것이 바로 첫 번째 오해인 것입니다. 선한 행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끌어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 적이기 때문입니다. Agape 사랑입니다. 우리가 QT를 하는 것 매우 좋은 영적 훈련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 된 개념을 가지고 하다보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문제가 됩니다. 의무감으로 하게 될 때 그렇습니다.
무엇이든지 우리가 의무감으로 할 때에는 거기에 생명이 상실 됩니다. 기쁨이 없어집니다. 즐겁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핑계가 막 발견이 됩니다. 이건 오히려 사단에게 틈을 주는 것이 됩니다. 저도 오래전에 QT를 시작 했습니다. 1985년 지금부터 20년 전입니다. 그런데 그때 생각으로는 제가 QT를 하면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해 주실 것으로 생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더 영적인 사람으로 기억 해주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새벽 기도도 하고 어떤 때에는 교회도 두 군데 다니면서 개척교회를 도운 적도 있습니다. 한 시간 반 이상 드라이브를 하면서 주일날 하루 쉬는 것을 그야말로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 까지 몇 년을 그렇게 생활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때 제 생각에는 그래야 하나님께서 나를 더 사랑해 주실 것이라 생각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을 해보십시오.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이미 받은 사랑에 감격한 응답의 표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랑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이 독생자를 내 대신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나를 구속한 사랑입니다. 아마도 온 세상에 나 혼자만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리 하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더 무슨 사랑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더 사랑을 받으려고 발버둥 친다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모습인가를 깨 닿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것은 그분의 이런 사랑에 응답하는 것임을 발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 하는 것 더 사랑 받기 위함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 하나님의 견해를 바꾸기 위함이 아니고 우리가 그분을 알아가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뜻에 순종키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르게 예배드리고 올바르게 그분의 뜻에 순종하면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바울은 이마 그곳에 교회를 세울 때에 은혜로 사는 믿음생활에 대한 것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가 그곳을 떠나자 다른 사람들이 와서 다른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유대주의 크리스천입니다. 그들은 은혜로 구원 받지만 + 받고난 다음에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래야 참된 크리스천이 된다. 이렇게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통렬하게 지적을 합니다.
(갈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의 논문형식이 아닙니다. 이 서신을 쓸 때는 바울은 감정적으로 매우 격양되어 있었습니다. (갈 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갈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롬 1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은혜와 행위는 양립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은혜든지 행위든지 둘 중에 하나다 하는 것입니다. 은혜와 행위는 섞일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리 하다면 은혜는 더 이상 은혜가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잘못된 개념은 은혜는 우리가 뭐든지 원하 는 것은 해도 되는 라이센스라고 생각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개념을 바로 잡기 위해서 로마서 (롬 6:15)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리곤 이것을 알지 못하느냐?
(롬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있는데 그것은 주님을 섬길 것이냐 아니면 마귀를 섬길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요 8:34)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그러므로 은혜를 다른 말로 표현 한다면 바로 선택의 자유라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모를 땐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무조건 죄의 종이라 죄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한 이후엔 달라졌습니다. 바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가 365일 동안 이 선택을 올바로 사용 한다면 우리는 의의 종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엔 아직도 우리의 옛 주인이 서성이고 있습니다. 유혹 합니다, 협박도 받습니다. 그래서 매일 싸웁니다. 그러다 넘어지고 속임을 당하고 놀림을 당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의로움의 능력이 힘을 못 쓰게 됩니다.(롬 6: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부끄러움에 주저앉고 맙니다. 그러나 그때가 우리는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선택의 자유를 사용해야 할 때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종 됨을 선택 할 때에 우리는 다시 일어 설수가 있는 것입니다.
(롬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롬 6: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은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는 라이센스가 아니라 오히려 올바른 것을 선택할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롬6장 19절은 우리에게 올바른 선택을 하라는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은혜로 죄의 종에서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곤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주님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3. 세 번째 잘못된 은혜에 대한 개념은 바로 우리가 그릇 행한 것에 대한 자연적인 결과가 은혜로 용납되고 그 열매가 없어진다고 생각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은혜로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만 하면 우리가 행한 죄의 결과를 제거해 주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물론 죄로 인해서 오는 궁극적인 값은 용서를 받지만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그 죄로 인해서 오는 결과는 하나님께서 면하게 하시지는 않는 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였으면- 사형을 받게 하는 것이고, 물건을 훔쳤으면 4배로 보상케 하시는 것입니다.
잘못된 은혜의 개념을 갖게 되면 은혜로운 하나님께서 내가 이런 것을 범해도 용서를 하시겠지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심던지 그 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경고를 우리에게 이미 하셨습니다. 22-23에 의하면 죄를 지으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깨져 버리게 되고 하나님의 축복에서 끊겨지고 죄의식에 고통을 당하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상실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회개 하면 죄의 값은 치루지 않게 되지만, 죄로 인한 상처는 치료를 받지만, 죄로 인해서 생긴 흉터는 평생을 우리가 지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악의 못은 뽑아 주시지만 그 못 자국은 우리가 지고 가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인디아나에서 공부할 때 한 교수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가 하이스쿨 다닐 때 그는 학교에서 소위 말하는 아이돌-우상이었다고 합니다. 운동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고, 스포츠도 즐겨 했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서겠죠.
한번은 밤에 보트를 몰고 60미일로 바다를 질주를 하는데 그만 순식간에 큰 파도에 부딪쳐서 보트가 전복되고 만 것입니다. 다행히 수영을 잘해서 근처 조그만 바위를 발견해서 그리고 가서 겨우 지탱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따개비 같은 게 붙어서 살을 파먹기 시작 하는 겁니다. 배가 뒤집히면서 이마와 팔을 다쳤는데 피가 흐르니까 상어도 몰려오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태어나서 첨으로 공포를 느꼈다고 합니다. 이런 와중에 그가 생전에 해보지 않던 어떤 것으로 인도 하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면목은 없지만 저를 살려 주십시오. 자신도 모르게 그만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던 것입니다. 그는 기도하기를 여기서 구해 주시면 예수를 믿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이 되겠습니다라는 서원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얼마 후 해안 경비대가 그를 발견하게 되어서 병원으로 옮기게 되었고 그는 온몸에 따개비로 인한 상처로 마치 면도칼로 온몸을 난자당한 모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병원에서 회복하는 동안 그는 많은 생각을 했고 자신을 예수님께 드리는 결단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에 난 상처를 보면서 이 죽음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을 생각 하곤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서서히 그는 다시 세상 속으로 빠져 들게 되었고, 술과 여자와 욕과 난잡한 생활에서 서서히 하나님을 잊어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한 채 스포츠카를 몰고 달리다가 그만 콘크리트 불록을 들이 받으면서 앞 유리를 깨고 몸이 튕겨져 나오면서 그만 얼굴이 엉망으로 망가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흉측한 상처가 얼굴에 난 것입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그제야 그는 하나님께 서원 한 것을 생각 하고는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되고 복음을 증거 하면서 자신의 불순종을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인생의 지혜요,
행복인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만일 그가 일찍 하나님께 순종 하였다면 아미도 얼굴에 그런 끔직한 상처는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라 할지라도 우리가 세상에 심은 죄악의 결과 까지 하나님께서는 없애 주시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바른 은혜에 대한 개념은 우리로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끕니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게 됩니다. 영적인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이러한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
음성설교 http://ncfw.org
오늘은 은혜라는 개념 안에 남용되어지고 오해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바로 이 잘못된 은혜의 개념으로 신앙에 혼돈이 온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은혜로 구원 받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계속적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해야만 된다고 생각 하였습니다. QT를 해야 하고, 열심히 돌아다니면 가가호호 전도를 해야 하며, 일주일에도 몇 번씩 교회를 가야하고, 십일조, 감사 헌금 등 물질을 드려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은혜로 크리스천이 되고나서 계속적으로 일을 선한 일을 해야만 구원을 받는 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 하세요?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비슷한 생각을 갖고 계시는 분도 있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시간에 세 가지 가장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 은혜에 대한 잘못된 개념에 대해서 함께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1. 선한 행실을 하면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하실 것이다.
우리가 하루에 성경을 3시간 4시간 읽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철야를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할 것이라고 생각 한다는 것이 바로 첫 번째 오해인 것입니다. 선한 행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끌어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 적이기 때문입니다. Agape 사랑입니다. 우리가 QT를 하는 것 매우 좋은 영적 훈련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 된 개념을 가지고 하다보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문제가 됩니다. 의무감으로 하게 될 때 그렇습니다.
무엇이든지 우리가 의무감으로 할 때에는 거기에 생명이 상실 됩니다. 기쁨이 없어집니다. 즐겁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핑계가 막 발견이 됩니다. 이건 오히려 사단에게 틈을 주는 것이 됩니다. 저도 오래전에 QT를 시작 했습니다. 1985년 지금부터 20년 전입니다. 그런데 그때 생각으로는 제가 QT를 하면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해 주실 것으로 생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더 영적인 사람으로 기억 해주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새벽 기도도 하고 어떤 때에는 교회도 두 군데 다니면서 개척교회를 도운 적도 있습니다. 한 시간 반 이상 드라이브를 하면서 주일날 하루 쉬는 것을 그야말로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 까지 몇 년을 그렇게 생활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때 제 생각에는 그래야 하나님께서 나를 더 사랑해 주실 것이라 생각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을 해보십시오.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이미 받은 사랑에 감격한 응답의 표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랑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이 독생자를 내 대신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나를 구속한 사랑입니다. 아마도 온 세상에 나 혼자만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리 하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더 무슨 사랑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더 사랑을 받으려고 발버둥 친다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모습인가를 깨 닿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것은 그분의 이런 사랑에 응답하는 것임을 발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 하는 것 더 사랑 받기 위함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 하나님의 견해를 바꾸기 위함이 아니고 우리가 그분을 알아가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뜻에 순종키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르게 예배드리고 올바르게 그분의 뜻에 순종하면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바울은 이마 그곳에 교회를 세울 때에 은혜로 사는 믿음생활에 대한 것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가 그곳을 떠나자 다른 사람들이 와서 다른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유대주의 크리스천입니다. 그들은 은혜로 구원 받지만 + 받고난 다음에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래야 참된 크리스천이 된다. 이렇게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통렬하게 지적을 합니다.
(갈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의 논문형식이 아닙니다. 이 서신을 쓸 때는 바울은 감정적으로 매우 격양되어 있었습니다. (갈 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갈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롬 1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은혜와 행위는 양립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은혜든지 행위든지 둘 중에 하나다 하는 것입니다. 은혜와 행위는 섞일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리 하다면 은혜는 더 이상 은혜가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잘못된 개념은 은혜는 우리가 뭐든지 원하 는 것은 해도 되는 라이센스라고 생각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개념을 바로 잡기 위해서 로마서 (롬 6:15)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리곤 이것을 알지 못하느냐?
(롬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있는데 그것은 주님을 섬길 것이냐 아니면 마귀를 섬길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요 8:34)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그러므로 은혜를 다른 말로 표현 한다면 바로 선택의 자유라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모를 땐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무조건 죄의 종이라 죄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한 이후엔 달라졌습니다. 바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가 365일 동안 이 선택을 올바로 사용 한다면 우리는 의의 종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엔 아직도 우리의 옛 주인이 서성이고 있습니다. 유혹 합니다, 협박도 받습니다. 그래서 매일 싸웁니다. 그러다 넘어지고 속임을 당하고 놀림을 당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의로움의 능력이 힘을 못 쓰게 됩니다.(롬 6: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부끄러움에 주저앉고 맙니다. 그러나 그때가 우리는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선택의 자유를 사용해야 할 때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종 됨을 선택 할 때에 우리는 다시 일어 설수가 있는 것입니다.
(롬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롬 6: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은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는 라이센스가 아니라 오히려 올바른 것을 선택할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롬6장 19절은 우리에게 올바른 선택을 하라는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은혜로 죄의 종에서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곤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주님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3. 세 번째 잘못된 은혜에 대한 개념은 바로 우리가 그릇 행한 것에 대한 자연적인 결과가 은혜로 용납되고 그 열매가 없어진다고 생각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은혜로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만 하면 우리가 행한 죄의 결과를 제거해 주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물론 죄로 인해서 오는 궁극적인 값은 용서를 받지만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그 죄로 인해서 오는 결과는 하나님께서 면하게 하시지는 않는 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였으면- 사형을 받게 하는 것이고, 물건을 훔쳤으면 4배로 보상케 하시는 것입니다.
잘못된 은혜의 개념을 갖게 되면 은혜로운 하나님께서 내가 이런 것을 범해도 용서를 하시겠지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심던지 그 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경고를 우리에게 이미 하셨습니다. 22-23에 의하면 죄를 지으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깨져 버리게 되고 하나님의 축복에서 끊겨지고 죄의식에 고통을 당하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상실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회개 하면 죄의 값은 치루지 않게 되지만, 죄로 인한 상처는 치료를 받지만, 죄로 인해서 생긴 흉터는 평생을 우리가 지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악의 못은 뽑아 주시지만 그 못 자국은 우리가 지고 가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인디아나에서 공부할 때 한 교수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가 하이스쿨 다닐 때 그는 학교에서 소위 말하는 아이돌-우상이었다고 합니다. 운동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고, 스포츠도 즐겨 했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서겠죠.
한번은 밤에 보트를 몰고 60미일로 바다를 질주를 하는데 그만 순식간에 큰 파도에 부딪쳐서 보트가 전복되고 만 것입니다. 다행히 수영을 잘해서 근처 조그만 바위를 발견해서 그리고 가서 겨우 지탱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따개비 같은 게 붙어서 살을 파먹기 시작 하는 겁니다. 배가 뒤집히면서 이마와 팔을 다쳤는데 피가 흐르니까 상어도 몰려오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태어나서 첨으로 공포를 느꼈다고 합니다. 이런 와중에 그가 생전에 해보지 않던 어떤 것으로 인도 하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면목은 없지만 저를 살려 주십시오. 자신도 모르게 그만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던 것입니다. 그는 기도하기를 여기서 구해 주시면 예수를 믿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이 되겠습니다라는 서원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얼마 후 해안 경비대가 그를 발견하게 되어서 병원으로 옮기게 되었고 그는 온몸에 따개비로 인한 상처로 마치 면도칼로 온몸을 난자당한 모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병원에서 회복하는 동안 그는 많은 생각을 했고 자신을 예수님께 드리는 결단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에 난 상처를 보면서 이 죽음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을 생각 하곤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서서히 그는 다시 세상 속으로 빠져 들게 되었고, 술과 여자와 욕과 난잡한 생활에서 서서히 하나님을 잊어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한 채 스포츠카를 몰고 달리다가 그만 콘크리트 불록을 들이 받으면서 앞 유리를 깨고 몸이 튕겨져 나오면서 그만 얼굴이 엉망으로 망가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흉측한 상처가 얼굴에 난 것입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그제야 그는 하나님께 서원 한 것을 생각 하고는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되고 복음을 증거 하면서 자신의 불순종을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인생의 지혜요,
행복인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만일 그가 일찍 하나님께 순종 하였다면 아미도 얼굴에 그런 끔직한 상처는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라 할지라도 우리가 세상에 심은 죄악의 결과 까지 하나님께서는 없애 주시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바른 은혜에 대한 개념은 우리로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끕니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게 됩니다. 영적인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이러한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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