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회자되는 선교적 교회는 교회의 자성적인 무브먼트라고 설명한다.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교회내외에서 인정하는 바이다. 손봉호 교수는 한국 기독교 역사상 지금이 가장 타락했다고 보았다. 한 사람의 의견이라고 외면하기에는 피로감이 크다.
분석과 지적도 달게 받아야 하지만, 대안이 없는 비판은 게으른 비난놀이에 불과하다. 대안이 더 중요하다. 목회자들이 널리 보고 있는 목회와 신학지의 2013년 3월호에"선교적 교회에서 한국 교회의 길을 보다"의 특집과 함께 대안적인 기사를 지속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국일 교수(장신대)는 선교의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본다."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다. 삼위 공동체는 보내시고 보냄 받는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다. 바울은 보냄 받은 성도의 모습을 에베소 교회와 고린도 교회에게 하늘을 기쁜소식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 택함 받은"사신"혹은 그리스도의 외교관인"대사"로 성도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악이 창궐하다.
그러나 창궐하는 세상의 악에서 도피하여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의 신비를 누리는 것이 성도가 아니다. 옛날의 체험과 신비를 그리워하며 변화산을 배회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내려 보냈다. 성도는 죄 많은 세상에 보냄 받은 사신, 즉 왕의 명을 받아 보냄 받은 신하이고 사명인이다.
하나님은 죄많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같은 사명을 주어 성도를 세상에 보내신다. 세상은 선교지이다. 아프리카만 선교지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지역사회가 선교지이다. 예수님은 팔레스타인을 벗어난 적이 없는 지역 선교사였다. 바울 해외 선교사였다. 그러나 공통점은 세상은 아주 넓은 예비 새신자 반이다. 그런데 시간성이 큰 관건이다. 지금만이 은혜시대이고 구원받는 은혜는 확실한 유효기간이 찍혀있다. 유효기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폐기된다.
은혜시대가 끝나고 신랑이 오시면 문이 닫힌다. 닫힌 문은 기름을 구하러 갔던 처녀에게도 예외가 없다. 주님은 분명히 다시 오시고 조만간에 오신다. 이것이 일세기 성도들의 긴장감이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와 성도는 마치 유람선에 탄 승객처럼 방만하지 않는가에 대한 자성이다. 또 하나는 십자가의 악세사리이다. 처음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를 생각나게 하는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장식물로 존재하는 것이다. 성도와 교회는 고난을 싫어한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거나 믿었던 일세기 성도는 하나의 로망이 있었다."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영광"이라는 관용구가 신약에 흩어져 있다. 고통은 회피하고 쾌락을 따라가는 심리학의 쾌락원리(Pleasure Principle) 앞에 굴복하는 성도와 교회가 아닌지 자성한다. 십자가의 고난과 함께 오는 영광의(Cross and Crown) 원리를 외면하는지 자성해야 한다. 로마는 무력과 권력의 원리로 세계평화 (Pax Romana)시대를 구가했다. 동시대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Kingdom of God) 원리로 이루어진 대안사회 (Alternative Communitas)를 제시했다.
우리는 고뇌에 찬 질문을 한다. 팍스 아메리카나 혹은 자본주의 원리에 의해, 성도나 교회가 지배당하지 않는가? 과연 하나님의 원리가 통치하는 교회와 성도인가?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통치하는 맛보기가 되는가? 맞다. 교회는 항상 불완전하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썩음을 합리화하고 면죄부를 씌우기보다는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이 있다 해도 현재에 안주하려는 관성의 법칙을 넘어가야 하는 내면의 벽이 있다. 아마도 보이지 않는 벽이지만 더 큰 벽일 수 있다. 다행한 것은 한국교회 대다수의 목사님들은 희생적이며 성도들도 성실한 편이다.
내년은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사실은 종교개혁이 외형적으로 폭팔하기 전 100여년 전부터 내부적으로 들끓었고, 탄압받았고, 그러나 꾸준히 진행 중이었다. 그 시작은 성경읽기였다. 성경읽기가 너무 멀어지고 있다. 원래 신약 성경은 신학교나 고등 전문인을 위한 전문서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일세기 당시의 원독자는 교육수준이 낮았고 경제적 하층민이며 여자나 노예들이 대다수이었다. 당시에 로마는 체제유지를 위해서 다신론 정책이 필요했다. 예수교는 로마법을 위반한 유대교의 아류인 불법종교인 취급을 받았다. 이런 핍박이 일상이 되고 도피가 라이프 스타일이던 예수교인은 떠도는 선교사였다.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증언의 주제였고 희망이었다.
교회연구소에서는 교회개혁 500주년 기념하는 사역의 일환으로 다음주 6월 6,7,8일 (월-수)까지 9시부터 5시까지 마태복음 연구를 합니다. 한국에서 오신 유석영 목사님이 인도합니다. 유튜브에서 유석영 목사님의 맛보기 강의를 볼 수 있습니다.
에드몬드에 위치한 예원교회 7812 224th St., SW Edmonds, WA 98026 하며, 시애틀 목사회(회장 이헌목사)에서 후원합니다. 자세한 문의는 최락준 교수에게 773-275-0101 연락바랍니다.
최락준 교수는 남침례교 목사이며 미국에서 심리학과 신학으로 학사,석사,박사학위 취득 후 미드웨스턴 침례신학교에서 상담학 조교수와 한국어 박사원장, 센트럴 침례신학교에서 목회학 부교수와 한인선교적교회연구원장을 역임하고, 지금은 교회연구소에서 상임연구위원으로 사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