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영민 목사
(Photo : ) 엄영민 목사

신학교에서 성경해석학을 배울 때 가장 중요한 원리 중의 하나는 어떤 말씀을 해석하든지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신 본래의 의미대로 바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 말 자체의 뜻은 물론 그 말이 사용된 문맥과 역사적 배경 그리고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의 조화를 철저히 따져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원칙이다. 모든 말은 대화 상대방과의 상황을 전제로 주고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똑같은 말도 전혀 다른 의미와 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너 잘났다”라는 표현은 문맥에 따라 진짜로 잘났다는 말일 수도 있고, 잘난 체 하지 말라는 말일 수도 있고, 때로는 잘난 것 하나도 없다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런 까닭에 상황과 배경 즉 문맥을 무시한 해석은 무책임한 해석이고 결코 바르지 못한 해석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교 초년생이 아닌 설교가들이 가끔씩 이렇게 무리하고 자의적인 성경해석을 하는 경우를 본다. 특별히 이단들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성경해석이 이렇게 문맥과 성경 전체의 균형을 무시한 자의적인 해석들이 많다.

그러기에 이단들은 똑같은 성경말씀을 가지고도 기상천외한 해석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잘못된 성경해석의 피해는 고스란히 그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는 순진한 성도들에게 돌아간다. 그런 까닭에 성도들도 덮어놓고 자신들의 귀에 듣기 좋은 설교라고 덥석 받아들이기보다는 성경에 나타나는 에베소 성도들처럼 그 말씀이 과연 성경에 맞는 진리인가를 분별할 책임이 있다.

이런 성경해석의 진리는 다만 성경해석만이 아니라 모든 의사소통에 있어서 지켜져야 할 기본적인 원리이다. 누군가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문맥 즉 그 말을 하는 여러 정황과 대상을 충분히 고려해서 그 말을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이 기본적인 의사소통의 원리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너무 일반화 돼 버린 듯 하다.

개인 간에 이렇게 문맥을 무시한 채 전달되는 말들을 통해 오해와 갈등이 생기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들은 아니지만 요즘은 가장 공명정대해야 할 언론기관에서조차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듯 하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학교에서 교육 받으면서 가장 많이 지적받은 것 중의 하나가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거나 전할 때는 그 말이 인용된 것이라는 사실과 그 인용의 출처가 어디인지 정확히 밝히는 것이다. 때로는 이런 절차들이 많이 불편하고 꼭 필요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최근 한국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이 모두가 남의 일이 아니다 싶다. 우리도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땐 진지하게 경청하고 혹 그것을 전할 때는 문맥을 빠뜨리지 말고 왜곡됨이 없이 진실하게 전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