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직원의 목표는 세상에 없는 꿈의 제품을 만드는 것이라 하고, 구글 직원은 세상의 모든 정보를 끌어 모으는 것이라는데, 삼성 직원의 꿈은 무엇일까? 요즘은 국내 최초니 최고니 하는 것도 별 것이 아니다. 산업시대의 모토였던 열심히 일하는 시대도 지나간다. 그래서 그들은 말한다. ‘신뢰와 소통’이라고!
신뢰받는 회사, 믿을 수 있는 제품, 가족관계라고 한 것이다. 신뢰로 승부를 걸겠다는 것이다. 기술이나 혁신이나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아니고, 신뢰를 목표로 삼았다는 것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현대사회를 정확하게 들여다보는 고도의 전략이 아닌가? 하이테크가 아니라 하이터치를 넘어서 휴먼터치를 강조한 것이다. 본질을 꿰뚫고 있는 핵심사안이라고 본다.
요즘 한국교회와 목사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말이 아닌가? 교회의 신뢰, 목사의 신뢰, 선교사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다. 잘 살아보세 산업시대를 지나면서 교회도 덩달아 춤추어 기도하며 축복을 외치고 성공적이고 축복된 삶을 위한 믿음을 외치더니, 이제 30년이 지난 오늘의 시대에 그 결과와 열매를 맛보고 있지 않는가 생각이 든다.
목사들은 잘 살아 보세가 아니고, 바르게 살아 보세라고 외치고, 축복과 성공된 삶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인정과 신뢰받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르쳐야 했는데, 세상 풍조에 휩쓸려 정신없이 춤을 추었던 것이 오늘의 쓴 열매를 거두고 있는 것이라 보는 것이다.
천박한 자본주의 정신에 홀린 교회가 본질을 상실하고 달려가더니 급기야는 삼풍호텔이 무너지듯이, 연평도 포격으로 폐허가 되어가듯이, 여기저기에서 한국 교회가 무너지고 있는 현상을 보게 된다.
일부 교회 목사들의 윤리 도덕적 타락으로 인하여 교회의 권위는 날개 없이 추락하고 있다. 여기저기에서 터지는 대형 사건들, 여의도 왕자들의 난으로 인하여 교회가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는 일이나, 유명세를 타는 이들의 성적 타락으로 모든 교회가 수치를 당하는 일, 교회 재정 유용으로 인하여 매스컴을 타는 일, 대형교회 목사의 연봉이 1억이란 보도가 무슨 말인가? 일련의 사건들은 오늘의 한국교회의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 아니겠나 생각하면 전율이 일어난다.
목사들의 생각이 너무나 세속화 되어버렸지 않나 생각이 든다. 교회의 크기로 신분의 크기를 말하고 능력으로 나타내 보이는 현상은 회사의 재력이 얼마나 큰가로 대치되고 있다. 큰 교회의 부목사들은 하루살이 인생이라고 하는 말은 무슨 내용인고?
조금 잘한다 싶으면 당장 모가지 잘려나간다고 하고, 그래서 적당하게 아르바이트로 한 개 부서 맡아서 조용히 살아야 하는 일들이 생겨난다고 한다. “꼭 살아야 한다. 후일을 기약하여야 한다.” 뭐 이런 드라마의 복수를 위한 다짐 같은 한 장면이 한국교회에 펼쳐지고 있다는 말이다.
일부 교회 목사들이 강단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설교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소녀시대의 화려한 무대가 생각이 난다. 얼굴이 기름이 번지르하게 흐르는 윤기나는 모습은 서민이나 일반인들이 다가가기에 너무나 고급화되고 세련되어 품격화되어 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치장들이 목사라는 신분에 걸리는 것이다. 교인들이 그렇게 해주어서 어쩔 수 없고, 세련된 부자 교회에서 목회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한다. 정말 그런가? 아니면 세련되지 못한 선교사의 시각인가?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놀랄 일이 못 된다. 모두가 과거에 심어놓은 물질 만능의 축복 설교와 가르침의 결과를 이제 맛보며 오늘날 한국교회가 농락을 당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를 돌아보고 탄식하며 깨어져야 하는 것이 해답이다. 모두가 자기는 제외하고 허공에 탄식하며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정작 탓할 사람은 내가 아닌가?
교회 개혁도 목사가 먼저이고, 정화운동도 목사의 책임이고, 회개운동도 목사가 가장 먼저 베옷을 입어야 하고, 개독교 책임도 교회 지도자가 져야 할 일이다. 오늘날처럼 교회가 구겨지고 신뢰가 땅이 떨어진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안타깝다. 믿음의 거장들이 나타나야 하는데…….
신뢰가 회복되는 목사의 삶, 선교사의 삶이 일어나야 한다. 나의 신뢰 구축이 먼저이다. 믿음을 줄 수 있는 목사, 신앙인, 동료, 친구로 거듭나야 한다. 신뢰회복운동이 일어나야 한국교회가 살고 대한민국이 살 것이다. 일반 회사도 신뢰를 말하고 있고, 사훈으로 걸고 있다. 하물며 교회의 기반이 되어야 하는 신뢰는 오늘의 화급한 문제이다.
필자는 기도하는 가운데 해답을 찾아보려고 노력한다. 탄식만 하고 있을 것인가? 비난의 생각만 가지고 있을 것인가? 그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1. 한국교회는 금식일을 선포하고 무릎을 꿇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금식일을 선포하고 미스바 회개 운동이 교단별로 교회별로 목회자들이 모여서 일어나기를 소원한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금이나 은을 받을 때냐 책망하던 엘리사 예언자의 소리를 뼈아프게 새겨야 한다.
지금은 교회 부흥이나 성장을 말할 때가 아니다. 무슨 대회가 아니다. 먼저 엎드려 자복하고 탄식하는 일들이 한국교회에 부흥의 불길처럼 일어나야 한다. 필자도 이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한다.
2. 욕심을 버리고 검소한 삶을 생활화하여야 한다.
한국교회는 사고방식이 너무 세속적인 것 같다. 경제적인 부요함이 가져다 준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교회도 너무 화려하고 고급화 되어가고, 할 수만 있으면 최고로 꾸미고 단장한다.
거룩한 교회이고 부자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시시한 것을 가지고 성전을 치장할 수 있느냐는 궤변으로, 건물에 헌금을 바르고, 건축하는 일에 온 힘과 열정, 기도를 쏟아 붓는다. 정말 이래서 되는 것인가? 예배당은 성전이 아니다. 그저 함께 모여서 찬양하고 기도하는 일에 불편이 없으면 될 것인데, 시대조류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도 거기에 춤을 추니, 오늘의 교회가 세속화, 고급화, 부자화되어가고 있지 않는가? 중세 교회 타락의 길을 그대로 걷고 있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막대기로 책망하고 수치스럽게 하고 있지만, 그런데도 겸허한 마음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희망을 둘 수 없을 것이다. 검소한 생활을 위하여 대가를 지불하여야 한다.
3. 목사들의 정신개조가 일어나야 한다.
재정에 대한 책임 의식, 교회 재정의 운용에 대한 사회학적인 개념, 재정의 공금의식을 가져야 한다. 교회를 회사처럼 경영하려는 시대정신, 사람들의 심리를 적절하게 이용하여 부흥을 획책하는 운동들은 마귀의 책략이다. 이러한 술수를 부리는 사악한 자들의 농락을 막아야 한다.
주로 여성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에 목사의 유혹은 아주 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때에 정신개조가 일어나지 않으면 형제 자매라는 미명하에 자연스럽게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한계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기본적인 성, 돈, 명예 문제에 대한 새로운 교육이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세속화된 교회와 시대 정신으로 물든 머리를 우슬초로 씻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은 부요함이 가져다 주는 각종 질병이 중증을 더해가는 모습이다. 싸구려 신학으로 수많은 종들을 무더기로 배출해 내더니 이제는 감당이 안 되는 시점에 와 있다. 교회의 고혈압, 당뇨병, 위암, 정신적인 사치의 고질병인 것이다.
천민들이 갑자기 부자가 되니 어쩔 줄 몰라 이것저것 다 사고 누리고 즐기는 격이다. 이 과정을 속히 지나가지 않으면 심판의 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밖에서 한국 교회를 바라보며 필자도 아픔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바른 교회 되기를 염려하는 것이니 나의 글에 과히 탓하지는 말기를 바란다.
Sergei(모스크바 선교사)
신뢰받는 회사, 믿을 수 있는 제품, 가족관계라고 한 것이다. 신뢰로 승부를 걸겠다는 것이다. 기술이나 혁신이나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아니고, 신뢰를 목표로 삼았다는 것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현대사회를 정확하게 들여다보는 고도의 전략이 아닌가? 하이테크가 아니라 하이터치를 넘어서 휴먼터치를 강조한 것이다. 본질을 꿰뚫고 있는 핵심사안이라고 본다.
요즘 한국교회와 목사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말이 아닌가? 교회의 신뢰, 목사의 신뢰, 선교사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다. 잘 살아보세 산업시대를 지나면서 교회도 덩달아 춤추어 기도하며 축복을 외치고 성공적이고 축복된 삶을 위한 믿음을 외치더니, 이제 30년이 지난 오늘의 시대에 그 결과와 열매를 맛보고 있지 않는가 생각이 든다.
목사들은 잘 살아 보세가 아니고, 바르게 살아 보세라고 외치고, 축복과 성공된 삶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인정과 신뢰받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르쳐야 했는데, 세상 풍조에 휩쓸려 정신없이 춤을 추었던 것이 오늘의 쓴 열매를 거두고 있는 것이라 보는 것이다.
천박한 자본주의 정신에 홀린 교회가 본질을 상실하고 달려가더니 급기야는 삼풍호텔이 무너지듯이, 연평도 포격으로 폐허가 되어가듯이, 여기저기에서 한국 교회가 무너지고 있는 현상을 보게 된다.
일부 교회 목사들의 윤리 도덕적 타락으로 인하여 교회의 권위는 날개 없이 추락하고 있다. 여기저기에서 터지는 대형 사건들, 여의도 왕자들의 난으로 인하여 교회가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는 일이나, 유명세를 타는 이들의 성적 타락으로 모든 교회가 수치를 당하는 일, 교회 재정 유용으로 인하여 매스컴을 타는 일, 대형교회 목사의 연봉이 1억이란 보도가 무슨 말인가? 일련의 사건들은 오늘의 한국교회의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 아니겠나 생각하면 전율이 일어난다.
목사들의 생각이 너무나 세속화 되어버렸지 않나 생각이 든다. 교회의 크기로 신분의 크기를 말하고 능력으로 나타내 보이는 현상은 회사의 재력이 얼마나 큰가로 대치되고 있다. 큰 교회의 부목사들은 하루살이 인생이라고 하는 말은 무슨 내용인고?
조금 잘한다 싶으면 당장 모가지 잘려나간다고 하고, 그래서 적당하게 아르바이트로 한 개 부서 맡아서 조용히 살아야 하는 일들이 생겨난다고 한다. “꼭 살아야 한다. 후일을 기약하여야 한다.” 뭐 이런 드라마의 복수를 위한 다짐 같은 한 장면이 한국교회에 펼쳐지고 있다는 말이다.
일부 교회 목사들이 강단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설교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소녀시대의 화려한 무대가 생각이 난다. 얼굴이 기름이 번지르하게 흐르는 윤기나는 모습은 서민이나 일반인들이 다가가기에 너무나 고급화되고 세련되어 품격화되어 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치장들이 목사라는 신분에 걸리는 것이다. 교인들이 그렇게 해주어서 어쩔 수 없고, 세련된 부자 교회에서 목회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한다. 정말 그런가? 아니면 세련되지 못한 선교사의 시각인가?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놀랄 일이 못 된다. 모두가 과거에 심어놓은 물질 만능의 축복 설교와 가르침의 결과를 이제 맛보며 오늘날 한국교회가 농락을 당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를 돌아보고 탄식하며 깨어져야 하는 것이 해답이다. 모두가 자기는 제외하고 허공에 탄식하며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정작 탓할 사람은 내가 아닌가?
교회 개혁도 목사가 먼저이고, 정화운동도 목사의 책임이고, 회개운동도 목사가 가장 먼저 베옷을 입어야 하고, 개독교 책임도 교회 지도자가 져야 할 일이다. 오늘날처럼 교회가 구겨지고 신뢰가 땅이 떨어진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안타깝다. 믿음의 거장들이 나타나야 하는데…….
신뢰가 회복되는 목사의 삶, 선교사의 삶이 일어나야 한다. 나의 신뢰 구축이 먼저이다. 믿음을 줄 수 있는 목사, 신앙인, 동료, 친구로 거듭나야 한다. 신뢰회복운동이 일어나야 한국교회가 살고 대한민국이 살 것이다. 일반 회사도 신뢰를 말하고 있고, 사훈으로 걸고 있다. 하물며 교회의 기반이 되어야 하는 신뢰는 오늘의 화급한 문제이다.
필자는 기도하는 가운데 해답을 찾아보려고 노력한다. 탄식만 하고 있을 것인가? 비난의 생각만 가지고 있을 것인가? 그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1. 한국교회는 금식일을 선포하고 무릎을 꿇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금식일을 선포하고 미스바 회개 운동이 교단별로 교회별로 목회자들이 모여서 일어나기를 소원한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금이나 은을 받을 때냐 책망하던 엘리사 예언자의 소리를 뼈아프게 새겨야 한다.
지금은 교회 부흥이나 성장을 말할 때가 아니다. 무슨 대회가 아니다. 먼저 엎드려 자복하고 탄식하는 일들이 한국교회에 부흥의 불길처럼 일어나야 한다. 필자도 이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한다.
2. 욕심을 버리고 검소한 삶을 생활화하여야 한다.
한국교회는 사고방식이 너무 세속적인 것 같다. 경제적인 부요함이 가져다 준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교회도 너무 화려하고 고급화 되어가고, 할 수만 있으면 최고로 꾸미고 단장한다.
거룩한 교회이고 부자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시시한 것을 가지고 성전을 치장할 수 있느냐는 궤변으로, 건물에 헌금을 바르고, 건축하는 일에 온 힘과 열정, 기도를 쏟아 붓는다. 정말 이래서 되는 것인가? 예배당은 성전이 아니다. 그저 함께 모여서 찬양하고 기도하는 일에 불편이 없으면 될 것인데, 시대조류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도 거기에 춤을 추니, 오늘의 교회가 세속화, 고급화, 부자화되어가고 있지 않는가? 중세 교회 타락의 길을 그대로 걷고 있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막대기로 책망하고 수치스럽게 하고 있지만, 그런데도 겸허한 마음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희망을 둘 수 없을 것이다. 검소한 생활을 위하여 대가를 지불하여야 한다.
3. 목사들의 정신개조가 일어나야 한다.
재정에 대한 책임 의식, 교회 재정의 운용에 대한 사회학적인 개념, 재정의 공금의식을 가져야 한다. 교회를 회사처럼 경영하려는 시대정신, 사람들의 심리를 적절하게 이용하여 부흥을 획책하는 운동들은 마귀의 책략이다. 이러한 술수를 부리는 사악한 자들의 농락을 막아야 한다.
주로 여성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에 목사의 유혹은 아주 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때에 정신개조가 일어나지 않으면 형제 자매라는 미명하에 자연스럽게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한계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기본적인 성, 돈, 명예 문제에 대한 새로운 교육이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세속화된 교회와 시대 정신으로 물든 머리를 우슬초로 씻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은 부요함이 가져다 주는 각종 질병이 중증을 더해가는 모습이다. 싸구려 신학으로 수많은 종들을 무더기로 배출해 내더니 이제는 감당이 안 되는 시점에 와 있다. 교회의 고혈압, 당뇨병, 위암, 정신적인 사치의 고질병인 것이다.
천민들이 갑자기 부자가 되니 어쩔 줄 몰라 이것저것 다 사고 누리고 즐기는 격이다. 이 과정을 속히 지나가지 않으면 심판의 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밖에서 한국 교회를 바라보며 필자도 아픔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바른 교회 되기를 염려하는 것이니 나의 글에 과히 탓하지는 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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