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악이 존재하는가?”의 문제는 신학과 철학의 주된 주제 중 하나다. 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말하는 ‘악(惡)’에는 살인이나 강도·강간 등 악한 행위와 함께, 지진이나 쓰나미 등의 자연재해, 심지어는 질병이나 가족·친지의 죽음 등 자신에게 닥쳐오는 불행(不幸)마저도 포함된다. 성경 속 고난받는 ‘욥’의 절규와, 이를 인과응보라 비난하는 세 친구를 떠올리면 된다.

이 문제는 오늘날 안티-기독교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된 ‘소스’를 제공할 뿐 아니라, 기독교인들에게도 어쩌면 최대의 ‘물음’ 중 하나다. 나아가 ‘죄’를 저지르는 사람까지도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나” 라며 공을 떠넘기게 한다. 결국 이 문제는 “악을 예정하셨는가?” 하는 ‘예정론’과도 맞닿는다.

신정론: 인간 이성에 고소당해 재판정 선 하나님 변호

이렇듯 “하나님은 왜 보고만 계시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학문이 바로 신정론(神正論)이다. 칸트는 이를 “세계 안에 존재하는 악으로 인해 인간의 이성으로부터 고소당해 이성의 재판정에 서게 된 하나님을 변호하는 논리”라고 했다. 목회 현장에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들 중 하나이지만, 한국의 신학 현장에서는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이 주제에 대해 김용성 교수(실천신대)가 칸트의 말을 인용한 <하나님, 이성의 법정에 서다(한들출판사)> 라는 책을 최근 펴냈다.

저자는 먼저 악이 ‘선(善)의 결핍’이자 ‘하나님의 허용’으로 이해한 어거스틴 이후, ‘신정론’이라는 개념을 창안해 낸 라이프니츠부터 ‘도덕주의 신정론’을 주장한 임마누엘 칸트,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정론을 연구한 한스 요나스까지 근대 신정론의 문제들을 살핀다. 이후 ’십자가 신학’을 주장한 마틴 루터와 위르겐 몰트만, 고난과 하나님의 전능성을 논한 칼 바르트 등 신학자들의 신정론 연구를 되짚는 식으로 논지를 전개한다.

라이프니츠는 악의 원인을 피조물의 불완전성 때문으로 분석하고, 세계 안에서 겪는 모순적인 부조화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적극 변호한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인과율적이며 권능있는 행위인 동시에 특별한 의도와 목적에 따른 행위였고, 하나님은 ‘모든 가능한 것 가운데 최상의 세계’를 만드셨다. 그럼에도 존재하는 악에 대해서는 어거스틴과 같이 “인간이 죄 짓는 것을 원하지 않고 억지로 죄 짓지도 하지도 않으시지만, 단지 허용하실 뿐”이라고 봤다. 이처럼 그는 합리적인 해석을 시도했지만, 우리에게 실존적으로 다가오는 ‘악’의 문제를 너무 가벼이 다루며 선을 위해 악이 허용된다거나 더 큰 선을 위한 단순한 수단이라고 하는 등 ‘사변적’ 비약이 되고 말았다.

아우슈비츠 이후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셨다”는 입장의 변화

이에 칸트는 <모든 철학적 신정론 시도의 실패에 대하여>를 쓰며 전통적인 신정론을 비판한다. 칸트는 신정론을 ‘세계 안에 존재하는 반목적성(본래적 악)으로 이성이 제기한 고발에 대해 창조자가 지닌 지고의 지혜를 변호하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전통 신정론의 도구로는 하나님의 정당성이 인정되기는 커녕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필연적으로 세계 안에 존재하는 반목적성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악의 근원을 인간의 자유에서 찾았고, ‘인간이 악하다’는 칸트의 명제는 “도덕률을 인식하면서도 그때마다 어기는 것을 준칙으로 삼은 것”을 뜻한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악을 극복할 수 있다는 논리지만, 신앙 문제를 도덕성 위에서만 바라봤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어 등장한 한스 요나스는 칸트가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다’는 지나치게 낙관적 견해에서 출발했다고 믿는다. 유태인이었던 그는 아우슈비츠 대학살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의 <아우슈비츠 이후의 하나님 개념, 한 유대인의 소리> 연설문에서는 고전적인 ‘고난’의 의미가 아우슈비츠에 직면해서는 더 이상 효력이 없음을 증언한다. “아우슈비츠가 일어날 수 있게 했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질문한 그는 신앙을 고수하기 위해 ‘하나님의 완전한 자기 포기’, 즉 ‘고난당하는 하나님’, ‘되어져 가는 하나님’, ‘염려하는 하나님’을 외친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 아니며, 하나님이 절대 선하고 전능하다면, 세계 안에 존재하는 악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피고석에 ‘무능한’ 하나님 대신 ‘행위자’ 인간을 앉혀버리고 말았다.

루터와 몰트만은 ‘십자가’로 고난의 의미 설명

신학은 이같은 철학자들의 물음에 주로 ‘십자가’를 높이 들었다. 루터는 참된 하나님 인식에 이를 수 없는 사변을 비판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만 우리에게 열리는 하나님 인식을 드러낸다. 그는 사탄 속에서도 일하시는 ‘숨어계신 하나님’을 말하고, 악과 고난 역시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선택과 유기의 근원자이신 하나님의 가면으로 풀이한다. 루터는 하나님은 ‘고유한 사역’을 이루기 위해 ‘낯선 사역’을 통해 일하신다며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행하시는지 묻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고 했지만, 저자는 아우슈비츠를 예로 들며 “책임을 결국 하나님에게 돌리도록 만든다”는 말로 이를 비판한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아우슈비츠에서 주기도문이 고백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 자신이 아우슈비츠에서 순교자들과 함께 고난받지 않았더라면, 신학은 불가능하다”고 되뇌인다. 요나스가 아우슈비츠 때문에 하나님의 전능성을 포기했다면, 몰트만은 하나님 표상을 수정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무감정의 신’이라는 오해에서 건져냈고, 귀납적 추론을 도구 삼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무신론의 전통도 비판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모든 기독교 신학의 중심”이라는 그는 ‘고난 안에 계신 하나님’, ‘하나님 안에 있는 고난’을 역설했지만, 저자는 “고난을 하나님 안에 수용함으로써 악을 하나님이 책임지지 않는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말한다.

요한 밥티스트 메츠는 신정론을 종말론의 지평으로 옮겨놓는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기억으로 해석되고, 이는 종말 시대의 기억으로 전체 역사의 주체와 의미에 대한 특정한 해석을 담고 있다. 그는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요청하는 것은 무죄한 자들이 고난당할 때 갖는 역사적 사실성”이라며 “이러한 요청은 하나님이 직접 역사의 마지막에 답을 주시리라는 희망으로 답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고난을 무조건 소중히 해석하거나 더 높은 연관 속에 포함시키는 신학적 시도들과 대결하지만, 사고를 종말론적으로 미뤄 현재적 구원의 의미는 사라지게 되는 단점이 있다.

칼 바르트, 하나님의 전능성과 선하심 제한 않으면서 고난 설명

마지막으로 바르트는 신정론에서 기독론의 단초를 찾는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하나님이 피조물과 더불어 맺으시는 계약 의지 속에 근거시켰고, 계약이 창조 결과가 아니라 창조가 하나님 계약 의지의 표현이다. 인간은 유한성 때문에 고난 가득한 일들을 경험하고, 피조물적 실존이기에 상처와 위험을 겪는데 이를 죄 때문이 아닌 ‘무(無)’로 구분한다. 이로써 악과 고난을 오로지 인간의 타락 탓으로 돌리거나 인간의 도덕문제로 제한하는 오류를 저지한다. 하지만 인간의 불신앙이야말로 하나님의 전체 화해 사역을 부정하는 근본 죄악이라며 창조의 어두운 면에서 겪는 모든 고난을 인간의 죄와 연관시키기도 한다.

신학자들의 얘기를 듣고 나서 저자는 다시 욥을 등장시킨다. 그는 “고난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밀접하게 만들고,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의 연합을 강화시킨다”며 “이런 의미에서 욥의 탄식과 항의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간주할 수 있고, 하나님은 욥이 토하는 탄식과 항의에 귀 기울여 주시고 만나 주실 정도로 가까이 계신 분”이라고 정리한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가장 가까이 계신 분이었고, 우리가 고난 역사에 직면해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만남과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주며 고난 당하는 이들과 연대하는 길로 나가게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조심스럽게 이들 중 바르트의 손을 들어주는 듯 하다. 그는 “바르트는 기독론적 칭의 사상을 창조신학과 연결시켜 신정론의 문제를 개별 주제로 다루지 않고 교의학 전체 맥락 속에서 통합해 철학적 신정론과 대결했다”며 “바르트의 입장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을 제한하거나 포기하지 않으면서 신앙인과 하나님 백성으로서 교회 공동체를 위해 고난의 의미를 풍성하게 설명해 준다”고 분석했다.

저자는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시는 분이라 고백할 수밖에 없고, 악에 대해서도 타협하지 않으신다”며 “그러므로 철학적 신정론 문제는 여전히 하나의 어두운 수수께끼로 남고, 철학과 신학 양자 모두에게 공통되는 주제이지만 내놓은 답변들은 서로를 받아들이기 힘들만큼 제각기 다르다”고 여운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