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회내 분열과 갈등, 특히 사회 '양극화 현상'이 가져온 이념·계층·노소·지역 갈등은 선교 120주년을 맞이한 한국교회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난해 한국교회는 진보·보수와의 갈등, 그리고 대교단과 군소교단의 갈등, 교회내 목회자와 장로 및 교인들과의 갈등 이외에 안티그룹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몸살을 앓아 왔으며 올해에도 그 갈등은 해소되기 어려운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이와관련, KNCC 부회장 김상근 목사를 만나 사회 '양극화 현상'을 해소하고, 국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기독인의 역할과 바람직한 사회참여에 대한 의견을 들어봤다.
-촛불시위 이후에 일었던 반미감정과 진-보수간의 갈등들이 피부로 와닿을 정도로 심각해졌다는 진단들이 여기저기서 제기되는데 현재 느끼고 있는 사회 갈등은 어느정도 수위인가.
사회 갈등이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걱정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는 사회적 갈등이 용인되지 않는 사회에서 살아왔었다. 해방이후 그랬다. 이념갈등, 소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갈등이란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또 가장 첨예하게 드러났던 노사갈등, 이런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 노사갈등이 일어나게 된 것이 70년대의 일인데 이 문제도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었다. 동구가 무너지고 이데올로기의 공포라는 것에서도 벗어난 이후에 또 우리 사회도 지난 87년 6월 민주항쟁을 기점으로 다기화 된 상황 가운데서 뻗어나간 가지에서 여러 가지 분출이 현상이 일어났다. 이것이 사실 서서히 기간을 두고 이뤄졌어야 될 일인데 우리사회는 단기간에 체험하고 있다. 그러니까 여태까지 우리가 느끼지 못했던 한기. 추위를 느끼는 것이다. 서서히 느꼈다면 적응했을 텐데 갑자기 다가와서 우리가 두려워하고 놀라기도 했다. 우리가 걱정하는 사회의 여러가지 갈등이 있지만 그 전부터 이런 사회적인 갈등은 노출돼 있었다. 그 때에 비하면 우리사회가 상당히 안정돼 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자정의 능력, 조정의 능력이 있다고 본다. 때문에 지금의 사회 갈등이 크게 걱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원론적인 질문들을 몇 차례 드리겠다. 진보와 보수의 이념적 대립의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생각하고 있다면 제시해 달라.
진보, 보수 이렇게만 나눌 때 갈등이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보든 보수든 극단을 걱정한다. 사회라고 하는 것이 보면 역시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 ‘보수가 완전한 선이’ ‘진보가 완전한 선이다’ 이런 형태가 아니었다. 진보도 강점과 약점을 갖고 있고 보수도 강점 약점을 갖고 있다. 그런 것이 서로 부딪히면서 역사가 발전하고 사회가 발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론적으로 진보와 보수가 건전하게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대화하고 토론하는 그런 문화를 우리가 만들어 간다면 갈등은 오히려 사회에 있어야 할 요소라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대화하지 않고 말하자면 지난 70년대 80년대 대화없는 투쟁을 했듯이 진보적인 판단과 보수적인 판단. 이 판단이 대립하고 그래서 상대를 절대 용납하지 않고 흑백의 논리로 간다. 그럴 경우 이것이 위험한 상황이 된다는 것이다. 본인은 우리 사회에 진보와 보수가 있는데 이 진보와 보수가 상대를 완전히 부인하지 않는다면 우리 진보, 보수는 오히려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동력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교회가 사회통합 모델로 제시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교회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이것이 하나의 고백 그 조건만을 가지고 모인 곳이다. 말하자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하나의 신앙, 하나의 공통분모로 모인 것이다. 따라서 이 교회 안에는 진보와 보수가 함께 있다. 이 진보와 보수가 같이 있는 교회를 하나의 공동체로 운영해 간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모델이다. 내가 기장 목회자이지만 기장은 모두 진보인가? 그렇지 않다. 거기에 보수적인 사람이 있다. 또 어떤 특정한 교단을 일컬어 ‘보수교단이다’ 이렇게 말했을 때 거기에 구성하고 있는 교회는 다 보수냐 그런 것은 아니다. 진보와 보수가 어우러져 있다. 진보 출신의 사람들이 대게 진보적이지만 그렇다고 보수적인 교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의 교회로 아울러 가고 있다.
이러한 모델을 우리 사회로 가져가서 공통분모라는 것을 만들어 가면 우리 사회도 진보와 보수를 아울러갈 수 있다. 그런데 이 공통분모를 만들어가지 못했다. 예를 들면 지난해 경우만해도 소위 남북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이냐 하는데서 공통분모를 못찾는다. 진보쪽에서는 지금의 현실을 당분간 인정하고 그 토대위에서 민족이 나갈 길을 찾아야된다. 다른 한쪽에서는 지금의 현실 인정할 수없다. 이러 이러한 점은 극복되고 척결돼야 하고 그 토대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공통분모를 찾지 못하고 사회가 혼란스럽고 갈등이 심화된다. 그러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다는 큰 공통분모 위에 여러 다양한 사상과 판단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처럼 우리 이 사회가 다 동의할 수 있는 그런 공통분모를 만들어내고 거기에 동의를 얻을 수 있다면 우리 교회는 사회통합에 있어 중요한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상 교회 자체도 그렇게 되지 못하고 분열되는 것이 아쉽다. 교회는 본래적으로 사회통합적 형태, 그런 양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일단 교회내에서부터 통합모델이 제시돼야 하겠는데 사실 KNCC와 한기총과의 대화가 이뤄지지 않는 것도 교회를 통합모델로 제시하기 어려운 면 중에 하나가 아닌가. 한기총과 KNCC의 대화는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
본인은 사실 기구통합, 그 아젠다 자체에 대해서 썩 호감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하나의 연합기구가 한국교회의 큰 요구이기 때문에 내가 갖고 있는 판단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 막막하다. 또 당장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니까 참여를 해왔다. 그런데 지금의 시대는 지방화 시대, 분권화 시대다. 사회가 단색화 단일화 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현재를 보더라도 과거 이승만, 박정희 정권 때와 비교할 때 사회가 얼마나 바뀌었나. 권력이 분산되고 있다. 그리고 삶의 욕구가 아주 다양하다. 또 욕구가 전국 방방곡곡에 걸쳐져 있다. 이런 현실 속에 교회가 있다. 그러면 교회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세상 속에 있는 교회로서 무엇을 해냐하면 지역사회 속에 교회가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지금 양기구 통합하자는 것은 통틀어 중앙에 집중화 하자는 것인데 이것으로는 교회가 사회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다. 욕구는 전국 곳곳에 있고 지역마다 또 다르다. 여기에 한 욕구가 있다면 저기에는 또 다른 전혀 욕구가 있다 .전북의 새만금 문제는 서울, 경상도와는 상관이 없는 문제다. 지역교회가 이 문제를 어떻게 안고 갈 것이냐 이것이 과제다. 지율 스님 단식이 단식했지만 그 문제도 경기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런 문제가 나오지도 않았다. 새만금 문제가 나오지도 못했다. 그런 다기화된 욕구가 여기저기 있는데 여기에 맞춰 교회는 분권해야 한다. 그리고 중앙집중이라는 것은 아주 절제돼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중앙집중을 아주 강화하자는 주장인데 이것은 시대 흐름을 역행하는 것으로 교회가 제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버스는 떠나는데 손 든 것 같은 격이어서 말을 못꺼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한기총과 KNCC가 통합모델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KNCC에 참여했던 많은 분들의 가슴속에 정화를 해야할 상당한 요인들이 남아 있다. 뭐냐면 한기총이라고하는 단체에 대한 감정의 골이 가슴속에 담겨져 있다. 그런 것을 극복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우리가 지금 남북의 화해 협력을 이야기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려서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한기총과 KNCC의 통합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수년내로 통합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인 같은 경우도 북쪽에 대한 개인적인 아픔이 있다. 그것을 극복하고 화해 협력의 장으로 나간다는 것이 참 어려운 문제였고 오랫동안 신앙적 갈등을 해 온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마음이 변한 것이 아니다. 상당한 기간 동안 고민하다가 ‘아 우리가 이제 함께 일을 할 수 있고 해야겠구나‘ 이렇게 되도록 조심스럽게 접근을 해야하는데 너무 급히 진행될 경우 거부감이 들 수 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과연 하나의 기구를 만든다고 할 경우 그 이후에 무엇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냐 거기에 대한 확신이 없다. 지금 KNCC 실행위원회를 봐도 8개 교단들의 입장을 하나의 의견으로 집약한다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한국교회 전체를 포괄하는 한기총과 KNCC, 색깔이 다른 두 단체를 통합했을 때 과연 무엇을 할 것이냐 이것이 매우 큰 고민거리다.
-지역교회 연합을 강조했는데 박종화 목사님과 같은 다른 진보측 인사들도 지역교회 연합을 교회의 통합모델로 제시하면서 현재의 기구적 통합 논의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지금 말씀이 기구통합의 한계성이 있다고 본다는 것인가. 또 지역교회 연합모델이 어떠한 형태를 갖고 이뤄져야 하는가.
한 때 KNCC가 지역교회 연합을 구상했다. 총회를 교단 대표로만 구성해 왔는데 교단대표와 지역대표로 구성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KNCC 총회에서 지역대표는 행정단위별로 선별하자는 구상이었다. KNCC가 8개 교단이 중심이 돼야하겠지만 지역 중에서 8개교단에 국한시킬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지역은 이를 유동적으로 적용한다. 그리고 KNCC로 모일 때는 교단대표와 지역대표가 함께 참여한다. 이렇게 하면 선교적 요소들도 더불어 감으로 자칫 정치 중심의 협의회가 될 수 있는 위험성을 해결할 수 있다. 교회 정치와 교회 선교 이 두가지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다.
-지역교회 연합모델을 제시했는데 일단 KNCC 중심으로 말씀을 하셨다. 새문안교회 이수영 목사님이 한기총 정책협의회에서 기구통합을 말하는 과정에서 한기총이 지나치게 기구통합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강조하면서 KNCC에 대한 비판도 가했는데 우선은 KNCC가 8개 교단이 가입돼 있으므로 모든 교단을 아우르지 못하고 있고 또 KNCC가 폐쇄적이다는 지적도 했다. KNCC 총대로 파송됐을 때 큰 벽을 느꼈었고 KNCC의 에큐메니즘이 그들만의 에큐메니즘이라고 지적했는데 이같은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선 KNCC가 폐쇄적이라고 하는 것은 본인도 인정한다. 그런데 그것은 KNCC가 오랫동안 지켜왔던 정체성, 이것을 강하게 지키려다 보니까 그 정체성에 다가오지 못하고 벽을 느끼는 사람은 도저히 다가 올 수 없는 폐쇄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KNCC는 자기 정체성 분명히 하면서도 다른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들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KNCC 실행위원회에서도 그런 충돌이 있었는데 KNCC가 유지해오던 입장을 아주 완강하게 거부하는 그런 현상이 있었다. 내가 얼마 후에 <기독교사상>을 보게 됐는데 거기에 어떤 분이 ‘KNCC 정체성’의 흔들림을 이야기했더라. 나보다 젊은 사람이 썼던데 그런 목소리도 필요하다. 그리고 그 분이 내 발언에 대해서 비애를 느끼는 그런 면도 필요하다. 아마 그 분이 그런 이야기를 안했으면 본인도 이야기를 안 하는데 그런 목소리들이 KNCC가 조화를 이뤄가는 여유를 가질 필요성이 있다는 점들을 강조해 준다.
‘내 것이 옳다. 그렇지만 당신의 의견도 존중한다’ 끝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도 둘 다 이렇다고 결론을 내는 그런 여유와 포용이 KNCC에게 요청되고 있다. 한기총과 KNCC의 통합문제가 논의되고 있는데 문제는 한기총의 폭도 넓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KNCC는 오랜 역사와 전통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기준이 엄격하다. 그런데 한기총은 그렇지 못하다. 그런 점에서 KNCC가 다양하지 못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KNCC는 기하성과 같은 보수교단이 가입한다고 했을때 받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다. 또 기성도 복귀한다고 하면 우리는 환영할 것이고 루터회, 기침 등에서도 함께 일하기 원할 때 적극 응할 것이다. 그런데 그쪽에서 머뭇거리는 것이다. KNCC가 폭을 좁게 갖고 잦대가 엄격해서 폐쇄적인 것은 아니다. 기하성이 KNCC에 가입했듯이 기성도 복귀하고 그런 흐름들이 계속된다면 KNCC도 폭을 넓힐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 그렇지 못한다. 안타깝다. 교단들이 좀 더 들어왔으면 좋겠다.
-KNCC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높다. 강원용 목사님을 비롯한 원로들도 KNCC가 새로운 이슈를 찾아야한다고 지적하는데 이수영 목사님 지적을 또 하나 말하자면 KNCC가 특정 정치세력과 코드가 맞아서 지금 그들이 여당이 된 시점에서 KNCC는 말을 못하고 있고 때문에 지금 무기력하고 할일이 없다고 지적했다. 강원용 목사님의 지적과 다른 차원일 수있지만 KNCC가 이슈를 찾아야 한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했는데 KNCC가 앞으로 어떤 일들을 해 나가야 하는가.
KNCC는 그동안 거대 담론에 집중해 왔다. 인권, 민족의 화해 협력, 민주화 그런 부분들에 집중해 왔다. 그런데 KNCC가 특정 정당과 밀착해 온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국민의 정부 이후 민중의 문제, 인권의 문제, 통일 문제가 KNCC의 거대 담론과 같은 지향점을 갖고 있었고 또 거대 담론에 대한 주변적 상황이 개선됐는데도 계속해서 비판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고 정권과의 밀착 때문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KNCC가 다양한 토론을 갖지 못했는데 이제는 이러한 토론을 가져야 한다. 예를들어 인권문제만해도 KNCC의 인권운동이 굉장한 지지를 얻은 때가 있다. 그러데 이것을 다양한 토론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있어서 이슈가 없어 보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분권화 시키지 못해서 그렇다. 민주화 문제도 그렇고 이것이 다양한 의견수렴을 통해서 분권으로 가야한다. 그런데 중앙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KNCC는 그렇게 가야한다.
예를 들어 지금 큰 교회들이 복지에 관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기장 같은 경우에는 재력 있는 교회가 많지 않다. 기장 교회들은 대게 지방 정계와 복지를 함께 추진했다. 기장 교회들이 재력이 없어 정부의 예산을 얻어서 복지에 참여하는 것인데 KNCC도 분권화되고 지방의 교회들이 이런 복지적 혹은 인권적 요구에 부응하는 그런 연합을 하게 해야 한다. 아젠다를 던지고 그 아젠다를 중심으로 의견을 모아서 거기에 인력과 재력들을 집중시키고 그것을 지방에 투여하는 이러한 모델들을 KNCC가 계속 만들어 가야한다. 지금 KNCC가 그런 일을 해나가야 한다. 지금은 원론을 통해서 이야기할 것이 없다. ‘민주화 하라’ ‘인권개선하라’ 이런 말들을 지금 필요하지 않다. KNCC가 무력화 되는 현상이 있지만 이것이 정권과의 밀착때문이라는데서 결정적인 요인이 찾기는 어렵다.
-KNCC 방향성의 또 하나의 우려로 지적되는 것이 과거 KNCC를 이끌었던 핵심 인사들이 정계로도 많이 진출했다는 점이다.
그 정계 진출이라는 것을 따져 보면 많지 않다. 다섯 손가락 이내다. 그런데 그 인사들의 대표성 때문에 부인하지는 않겠다. 본인도 정계진출의 구체적인 예니까. 본인의 고민을 말하자면 초기 민주화 운동을 해오는 과정에서 정계는 정치적인 차원에서 민주화 운동을 추진했고 KNCC는 선교적인 차원에서 민주화 운동을 전개해 왔다. 그 두개가 결합한 것이다. 집권을 하게 됐다. 집권을 하게 되니까 그 연장선상에서 같이 일하자는 요구가 왜 없겠나. 그런데 나의 경우를 생각하면 그 요구에 대해서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할까요’ 이런 생각도 없었다. 목사가 교회의 성직으로 안수를 받은 것이라는 경계가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교회에 있겠다고 말했고 ‘교회 일 그만큼 했으면 됐지’ 하는 의견에도 동요가 없었다.
그런데 국민의 정부가 출범되고 1년이 지나 제2건국운동을 추진할 때 가장 어려웠다. 이것이 김대중 대통령의 비전이었는데 이 운동이 십자 포화를 맞았다. 상당한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을 때였고 막 출범한 정권이 일을 못하는 그런 지경이었다. 그 때의 제2건국운동이 표방하는 운동이 교회가 표방하는 운동과 다를 바가 없었다. 부정부패 척결, 민족화해, 정보화, 지방분권화 등 우리 교회가 주장해오던 것들이었다. 이것을 정치 세력화 하겠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또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정권이 모처럼 교체된 것인데 정권이 실패를 해서는 안되겠다. 어떻게든 도와야된다고 생각하고 참여하게 됐다. 민주화 운동을 해 오던 철학에 입각해서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책무라고 생각하고 맡았던 것이다.
그 때 ‘교회일도 하고 이것도 할 수 있으니까 맡아보라‘ 이렇게 된 것이다. 생각이 다른 분도 있겠지만 본인의 경우를 보면 정치에 참여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실제로 내가 그 일을 하는 동안도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예를 들어 KNCC 실행위원회도 모두 참석했다. 물론 예전같지는 못했지만 교회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중에 교회 일만 두고 볼 때 서먹함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만큼 소홀해져 있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이후에 새로운 참여정부가 들어 섰고 또 이런 저런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단호한 선언인데 정계의 활동은 일종의 구원투수로서의 활동이지 내 본좌는 교회다. 그리고 이제 곧 은퇴인데 일이 작거나 크거나 교회일을 하고 내가 은퇴하지 이런 마음이었고 그것을 표명도 했다. 그러니까 정계와 교계를 넘나든다는 경우는 누구도 성직의 연장선 또는 성직의 자리를 딛고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것은 아니고 누구나 그런 수준을 유지하려 한 것이 아닐까 한다.
-KNCC가 지난 실행위원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성명을 채택하지 못했다. 당시 기하성과 통합측 실행위원들이 반대입장을 표명했고 결국은 국보법 폐지성명은 채택되지 못했다. 이러한 모습들이 과거 KNCC가 교단에 관여받지 않고 KNCC 대로의 정체성을 갖고 활동해 왔던 것과는 비교되는 것으로 보여진다. 실질적으로 부채문제도 안고 있는데 이러한 요인들이 KNCC가 점차 교단의 영향을 받아 정체성을 잃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교단의 목소리를 투영한다는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교단 따로 KNCC 따로 가는 것은 아니고 교단간의 연합운동의 산물로 KNCC가 있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말이 나왔는데 국가보안법에 대해서 폐지 반대 입장을 전달한 교단이 있다면 그 교단의 입장이 반드시 나와야 한다. KNCC의 지난번 성명은 폐지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우리는 지속적으로 그렇게 해 왔다는 과거를 확인하는 정도로 그쳤다. 그것을 이제 국보법 폐지를 반대했던 쪽에서 오히려 높이 사고 ‘역시 KNCC구나’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두 교단 보다는 더 많은 교단이 폐지를 지지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런 정도로 완하시켰다. 물론 그것을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KNCC가 그렇게 의견을 정리하는 곳이구나 그것을 수용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교단이 ‘우리가 힘 있고 재정력도 있으니 KNCC는 우리에게 끌려온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이것은 큰 잘못이다. 만일 그런 오만함이 있다면 KNCC로서는 그 오만함을 극복할 수 있는 아주 심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서로 자기 목소리를 다 내지 못했다면 아쉽지만 상대를 존중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쌍방이 보여야 한다.
-이번에는 기장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도 하겠다. 한국교회 진보를 이끌었던 기장인데 KNCC가 겪고 있는 이슈의 부족과 함께 기장의 지향해야할 방향성도 꽤 모호해진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는데 기장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한국교회내 자리매김해야 하는가.
사실 본인은 기장의 일선에서 떠난 사람이다. 그러나 기장의 직책을 거친 사람으로 말하자면 지장은 민주화 투쟁 이후에 많은 분들이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데 기장이 지난시기에 한국교회 역사에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그 바탕과 힘은 여러 첨예한 사회문제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타협 없이 밀고 나간 것이다. 지나놓고 보면 역시 그것이 길이었더라는 것이다. 다 그렇게 가지 않는가.
물적 토대가 아주 필요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룩해서 우리가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하겠다. 이것은 옳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기장의 목회자, 지도력이 된 이상 상대적으로 가난은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초라해지고 그것 때문에 왜소감을 느끼면 안된다. 지난시기 우리도 작았다. 물적토대도 없었다. 그러나 당당했다. 그러한 신앙고백적 기개 그런 것이 있어야 한다.
기장의 교회들도 다른 교회에 비해서 이러한 전통과 긍지를 갖고 살아야 한다. 물적 토대를 비교한다든지 그래서 방향을 잃어버리면 안된다. 기장이 당당하게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지도자들이 당당하게 이렇게 말하지 못하고 우리도 키워야합니다. 키웁시다 이러한 논리에 들어가면 성장도 되지 않고 정체성도 잃는 그런 결과를 맞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고 기장이 아주 목숨을 부지할 수 없게 된다고 까지 생각하지는 않고 그러한 우려스러운 면들이 있는 것이다.
-촛불시위 이후에 일었던 반미감정과 진-보수간의 갈등들이 피부로 와닿을 정도로 심각해졌다는 진단들이 여기저기서 제기되는데 현재 느끼고 있는 사회 갈등은 어느정도 수위인가.
사회 갈등이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걱정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는 사회적 갈등이 용인되지 않는 사회에서 살아왔었다. 해방이후 그랬다. 이념갈등, 소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갈등이란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또 가장 첨예하게 드러났던 노사갈등, 이런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 노사갈등이 일어나게 된 것이 70년대의 일인데 이 문제도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었다. 동구가 무너지고 이데올로기의 공포라는 것에서도 벗어난 이후에 또 우리 사회도 지난 87년 6월 민주항쟁을 기점으로 다기화 된 상황 가운데서 뻗어나간 가지에서 여러 가지 분출이 현상이 일어났다. 이것이 사실 서서히 기간을 두고 이뤄졌어야 될 일인데 우리사회는 단기간에 체험하고 있다. 그러니까 여태까지 우리가 느끼지 못했던 한기. 추위를 느끼는 것이다. 서서히 느꼈다면 적응했을 텐데 갑자기 다가와서 우리가 두려워하고 놀라기도 했다. 우리가 걱정하는 사회의 여러가지 갈등이 있지만 그 전부터 이런 사회적인 갈등은 노출돼 있었다. 그 때에 비하면 우리사회가 상당히 안정돼 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자정의 능력, 조정의 능력이 있다고 본다. 때문에 지금의 사회 갈등이 크게 걱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원론적인 질문들을 몇 차례 드리겠다. 진보와 보수의 이념적 대립의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생각하고 있다면 제시해 달라.
진보, 보수 이렇게만 나눌 때 갈등이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보든 보수든 극단을 걱정한다. 사회라고 하는 것이 보면 역시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 ‘보수가 완전한 선이’ ‘진보가 완전한 선이다’ 이런 형태가 아니었다. 진보도 강점과 약점을 갖고 있고 보수도 강점 약점을 갖고 있다. 그런 것이 서로 부딪히면서 역사가 발전하고 사회가 발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론적으로 진보와 보수가 건전하게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대화하고 토론하는 그런 문화를 우리가 만들어 간다면 갈등은 오히려 사회에 있어야 할 요소라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대화하지 않고 말하자면 지난 70년대 80년대 대화없는 투쟁을 했듯이 진보적인 판단과 보수적인 판단. 이 판단이 대립하고 그래서 상대를 절대 용납하지 않고 흑백의 논리로 간다. 그럴 경우 이것이 위험한 상황이 된다는 것이다. 본인은 우리 사회에 진보와 보수가 있는데 이 진보와 보수가 상대를 완전히 부인하지 않는다면 우리 진보, 보수는 오히려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동력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교회가 사회통합 모델로 제시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교회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이것이 하나의 고백 그 조건만을 가지고 모인 곳이다. 말하자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하나의 신앙, 하나의 공통분모로 모인 것이다. 따라서 이 교회 안에는 진보와 보수가 함께 있다. 이 진보와 보수가 같이 있는 교회를 하나의 공동체로 운영해 간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모델이다. 내가 기장 목회자이지만 기장은 모두 진보인가? 그렇지 않다. 거기에 보수적인 사람이 있다. 또 어떤 특정한 교단을 일컬어 ‘보수교단이다’ 이렇게 말했을 때 거기에 구성하고 있는 교회는 다 보수냐 그런 것은 아니다. 진보와 보수가 어우러져 있다. 진보 출신의 사람들이 대게 진보적이지만 그렇다고 보수적인 교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의 교회로 아울러 가고 있다.
이러한 모델을 우리 사회로 가져가서 공통분모라는 것을 만들어 가면 우리 사회도 진보와 보수를 아울러갈 수 있다. 그런데 이 공통분모를 만들어가지 못했다. 예를 들면 지난해 경우만해도 소위 남북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이냐 하는데서 공통분모를 못찾는다. 진보쪽에서는 지금의 현실을 당분간 인정하고 그 토대위에서 민족이 나갈 길을 찾아야된다. 다른 한쪽에서는 지금의 현실 인정할 수없다. 이러 이러한 점은 극복되고 척결돼야 하고 그 토대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공통분모를 찾지 못하고 사회가 혼란스럽고 갈등이 심화된다. 그러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다는 큰 공통분모 위에 여러 다양한 사상과 판단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처럼 우리 이 사회가 다 동의할 수 있는 그런 공통분모를 만들어내고 거기에 동의를 얻을 수 있다면 우리 교회는 사회통합에 있어 중요한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상 교회 자체도 그렇게 되지 못하고 분열되는 것이 아쉽다. 교회는 본래적으로 사회통합적 형태, 그런 양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일단 교회내에서부터 통합모델이 제시돼야 하겠는데 사실 KNCC와 한기총과의 대화가 이뤄지지 않는 것도 교회를 통합모델로 제시하기 어려운 면 중에 하나가 아닌가. 한기총과 KNCC의 대화는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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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상근 목사는 양대기구 통합과 관련, "한기총, KNCC가 통합한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가 담보되지 않았다"고 불안요인을 밝혔다.ⓒ 김대원 기자 | |
지금 양기구 통합하자는 것은 통틀어 중앙에 집중화 하자는 것인데 이것으로는 교회가 사회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다. 욕구는 전국 곳곳에 있고 지역마다 또 다르다. 여기에 한 욕구가 있다면 저기에는 또 다른 전혀 욕구가 있다 .전북의 새만금 문제는 서울, 경상도와는 상관이 없는 문제다. 지역교회가 이 문제를 어떻게 안고 갈 것이냐 이것이 과제다. 지율 스님 단식이 단식했지만 그 문제도 경기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런 문제가 나오지도 않았다. 새만금 문제가 나오지도 못했다. 그런 다기화된 욕구가 여기저기 있는데 여기에 맞춰 교회는 분권해야 한다. 그리고 중앙집중이라는 것은 아주 절제돼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중앙집중을 아주 강화하자는 주장인데 이것은 시대 흐름을 역행하는 것으로 교회가 제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버스는 떠나는데 손 든 것 같은 격이어서 말을 못꺼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한기총과 KNCC가 통합모델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KNCC에 참여했던 많은 분들의 가슴속에 정화를 해야할 상당한 요인들이 남아 있다. 뭐냐면 한기총이라고하는 단체에 대한 감정의 골이 가슴속에 담겨져 있다. 그런 것을 극복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우리가 지금 남북의 화해 협력을 이야기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려서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한기총과 KNCC의 통합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수년내로 통합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인 같은 경우도 북쪽에 대한 개인적인 아픔이 있다. 그것을 극복하고 화해 협력의 장으로 나간다는 것이 참 어려운 문제였고 오랫동안 신앙적 갈등을 해 온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마음이 변한 것이 아니다. 상당한 기간 동안 고민하다가 ‘아 우리가 이제 함께 일을 할 수 있고 해야겠구나‘ 이렇게 되도록 조심스럽게 접근을 해야하는데 너무 급히 진행될 경우 거부감이 들 수 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과연 하나의 기구를 만든다고 할 경우 그 이후에 무엇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냐 거기에 대한 확신이 없다. 지금 KNCC 실행위원회를 봐도 8개 교단들의 입장을 하나의 의견으로 집약한다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한국교회 전체를 포괄하는 한기총과 KNCC, 색깔이 다른 두 단체를 통합했을 때 과연 무엇을 할 것이냐 이것이 매우 큰 고민거리다.
-지역교회 연합을 강조했는데 박종화 목사님과 같은 다른 진보측 인사들도 지역교회 연합을 교회의 통합모델로 제시하면서 현재의 기구적 통합 논의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지금 말씀이 기구통합의 한계성이 있다고 본다는 것인가. 또 지역교회 연합모델이 어떠한 형태를 갖고 이뤄져야 하는가.
한 때 KNCC가 지역교회 연합을 구상했다. 총회를 교단 대표로만 구성해 왔는데 교단대표와 지역대표로 구성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KNCC 총회에서 지역대표는 행정단위별로 선별하자는 구상이었다. KNCC가 8개 교단이 중심이 돼야하겠지만 지역 중에서 8개교단에 국한시킬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지역은 이를 유동적으로 적용한다. 그리고 KNCC로 모일 때는 교단대표와 지역대표가 함께 참여한다. 이렇게 하면 선교적 요소들도 더불어 감으로 자칫 정치 중심의 협의회가 될 수 있는 위험성을 해결할 수 있다. 교회 정치와 교회 선교 이 두가지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다.
-지역교회 연합모델을 제시했는데 일단 KNCC 중심으로 말씀을 하셨다. 새문안교회 이수영 목사님이 한기총 정책협의회에서 기구통합을 말하는 과정에서 한기총이 지나치게 기구통합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강조하면서 KNCC에 대한 비판도 가했는데 우선은 KNCC가 8개 교단이 가입돼 있으므로 모든 교단을 아우르지 못하고 있고 또 KNCC가 폐쇄적이다는 지적도 했다. KNCC 총대로 파송됐을 때 큰 벽을 느꼈었고 KNCC의 에큐메니즘이 그들만의 에큐메니즘이라고 지적했는데 이같은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선 KNCC가 폐쇄적이라고 하는 것은 본인도 인정한다. 그런데 그것은 KNCC가 오랫동안 지켜왔던 정체성, 이것을 강하게 지키려다 보니까 그 정체성에 다가오지 못하고 벽을 느끼는 사람은 도저히 다가 올 수 없는 폐쇄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KNCC는 자기 정체성 분명히 하면서도 다른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들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KNCC 실행위원회에서도 그런 충돌이 있었는데 KNCC가 유지해오던 입장을 아주 완강하게 거부하는 그런 현상이 있었다. 내가 얼마 후에 <기독교사상>을 보게 됐는데 거기에 어떤 분이 ‘KNCC 정체성’의 흔들림을 이야기했더라. 나보다 젊은 사람이 썼던데 그런 목소리도 필요하다. 그리고 그 분이 내 발언에 대해서 비애를 느끼는 그런 면도 필요하다. 아마 그 분이 그런 이야기를 안했으면 본인도 이야기를 안 하는데 그런 목소리들이 KNCC가 조화를 이뤄가는 여유를 가질 필요성이 있다는 점들을 강조해 준다.
‘내 것이 옳다. 그렇지만 당신의 의견도 존중한다’ 끝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도 둘 다 이렇다고 결론을 내는 그런 여유와 포용이 KNCC에게 요청되고 있다. 한기총과 KNCC의 통합문제가 논의되고 있는데 문제는 한기총의 폭도 넓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KNCC는 오랜 역사와 전통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기준이 엄격하다. 그런데 한기총은 그렇지 못하다. 그런 점에서 KNCC가 다양하지 못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KNCC는 기하성과 같은 보수교단이 가입한다고 했을때 받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다. 또 기성도 복귀한다고 하면 우리는 환영할 것이고 루터회, 기침 등에서도 함께 일하기 원할 때 적극 응할 것이다. 그런데 그쪽에서 머뭇거리는 것이다. KNCC가 폭을 좁게 갖고 잦대가 엄격해서 폐쇄적인 것은 아니다. 기하성이 KNCC에 가입했듯이 기성도 복귀하고 그런 흐름들이 계속된다면 KNCC도 폭을 넓힐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 그렇지 못한다. 안타깝다. 교단들이 좀 더 들어왔으면 좋겠다.
-KNCC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높다. 강원용 목사님을 비롯한 원로들도 KNCC가 새로운 이슈를 찾아야한다고 지적하는데 이수영 목사님 지적을 또 하나 말하자면 KNCC가 특정 정치세력과 코드가 맞아서 지금 그들이 여당이 된 시점에서 KNCC는 말을 못하고 있고 때문에 지금 무기력하고 할일이 없다고 지적했다. 강원용 목사님의 지적과 다른 차원일 수있지만 KNCC가 이슈를 찾아야 한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했는데 KNCC가 앞으로 어떤 일들을 해 나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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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상근 목사는 KNCC 핵심 지도층에서 정계로 진출한데 대해 "교회를 발판으로 정치인으로 변신한 것은 아니었다. 성직의 연장선상"이라고 강조했다.ⓒ 김대원 기자 | |
예를 들어 지금 큰 교회들이 복지에 관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기장 같은 경우에는 재력 있는 교회가 많지 않다. 기장 교회들은 대게 지방 정계와 복지를 함께 추진했다. 기장 교회들이 재력이 없어 정부의 예산을 얻어서 복지에 참여하는 것인데 KNCC도 분권화되고 지방의 교회들이 이런 복지적 혹은 인권적 요구에 부응하는 그런 연합을 하게 해야 한다. 아젠다를 던지고 그 아젠다를 중심으로 의견을 모아서 거기에 인력과 재력들을 집중시키고 그것을 지방에 투여하는 이러한 모델들을 KNCC가 계속 만들어 가야한다. 지금 KNCC가 그런 일을 해나가야 한다. 지금은 원론을 통해서 이야기할 것이 없다. ‘민주화 하라’ ‘인권개선하라’ 이런 말들을 지금 필요하지 않다. KNCC가 무력화 되는 현상이 있지만 이것이 정권과의 밀착때문이라는데서 결정적인 요인이 찾기는 어렵다.
-KNCC 방향성의 또 하나의 우려로 지적되는 것이 과거 KNCC를 이끌었던 핵심 인사들이 정계로도 많이 진출했다는 점이다.
그 정계 진출이라는 것을 따져 보면 많지 않다. 다섯 손가락 이내다. 그런데 그 인사들의 대표성 때문에 부인하지는 않겠다. 본인도 정계진출의 구체적인 예니까. 본인의 고민을 말하자면 초기 민주화 운동을 해오는 과정에서 정계는 정치적인 차원에서 민주화 운동을 추진했고 KNCC는 선교적인 차원에서 민주화 운동을 전개해 왔다. 그 두개가 결합한 것이다. 집권을 하게 됐다. 집권을 하게 되니까 그 연장선상에서 같이 일하자는 요구가 왜 없겠나. 그런데 나의 경우를 생각하면 그 요구에 대해서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할까요’ 이런 생각도 없었다. 목사가 교회의 성직으로 안수를 받은 것이라는 경계가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교회에 있겠다고 말했고 ‘교회 일 그만큼 했으면 됐지’ 하는 의견에도 동요가 없었다.
그런데 국민의 정부가 출범되고 1년이 지나 제2건국운동을 추진할 때 가장 어려웠다. 이것이 김대중 대통령의 비전이었는데 이 운동이 십자 포화를 맞았다. 상당한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을 때였고 막 출범한 정권이 일을 못하는 그런 지경이었다. 그 때의 제2건국운동이 표방하는 운동이 교회가 표방하는 운동과 다를 바가 없었다. 부정부패 척결, 민족화해, 정보화, 지방분권화 등 우리 교회가 주장해오던 것들이었다. 이것을 정치 세력화 하겠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또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정권이 모처럼 교체된 것인데 정권이 실패를 해서는 안되겠다. 어떻게든 도와야된다고 생각하고 참여하게 됐다. 민주화 운동을 해 오던 철학에 입각해서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책무라고 생각하고 맡았던 것이다.
그 때 ‘교회일도 하고 이것도 할 수 있으니까 맡아보라‘ 이렇게 된 것이다. 생각이 다른 분도 있겠지만 본인의 경우를 보면 정치에 참여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실제로 내가 그 일을 하는 동안도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예를 들어 KNCC 실행위원회도 모두 참석했다. 물론 예전같지는 못했지만 교회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중에 교회 일만 두고 볼 때 서먹함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만큼 소홀해져 있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이후에 새로운 참여정부가 들어 섰고 또 이런 저런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단호한 선언인데 정계의 활동은 일종의 구원투수로서의 활동이지 내 본좌는 교회다. 그리고 이제 곧 은퇴인데 일이 작거나 크거나 교회일을 하고 내가 은퇴하지 이런 마음이었고 그것을 표명도 했다. 그러니까 정계와 교계를 넘나든다는 경우는 누구도 성직의 연장선 또는 성직의 자리를 딛고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것은 아니고 누구나 그런 수준을 유지하려 한 것이 아닐까 한다.
-KNCC가 지난 실행위원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성명을 채택하지 못했다. 당시 기하성과 통합측 실행위원들이 반대입장을 표명했고 결국은 국보법 폐지성명은 채택되지 못했다. 이러한 모습들이 과거 KNCC가 교단에 관여받지 않고 KNCC 대로의 정체성을 갖고 활동해 왔던 것과는 비교되는 것으로 보여진다. 실질적으로 부채문제도 안고 있는데 이러한 요인들이 KNCC가 점차 교단의 영향을 받아 정체성을 잃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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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근 목사는 기장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첨예한 사회문제에 대한 성서적 해석 능력을 찾아야 한다"고 밝혔다. ⓒ 김대원 기자 | |
-이번에는 기장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도 하겠다. 한국교회 진보를 이끌었던 기장인데 KNCC가 겪고 있는 이슈의 부족과 함께 기장의 지향해야할 방향성도 꽤 모호해진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는데 기장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한국교회내 자리매김해야 하는가.
사실 본인은 기장의 일선에서 떠난 사람이다. 그러나 기장의 직책을 거친 사람으로 말하자면 지장은 민주화 투쟁 이후에 많은 분들이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데 기장이 지난시기에 한국교회 역사에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그 바탕과 힘은 여러 첨예한 사회문제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타협 없이 밀고 나간 것이다. 지나놓고 보면 역시 그것이 길이었더라는 것이다. 다 그렇게 가지 않는가.
물적 토대가 아주 필요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룩해서 우리가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하겠다. 이것은 옳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기장의 목회자, 지도력이 된 이상 상대적으로 가난은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초라해지고 그것 때문에 왜소감을 느끼면 안된다. 지난시기 우리도 작았다. 물적토대도 없었다. 그러나 당당했다. 그러한 신앙고백적 기개 그런 것이 있어야 한다.
기장의 교회들도 다른 교회에 비해서 이러한 전통과 긍지를 갖고 살아야 한다. 물적 토대를 비교한다든지 그래서 방향을 잃어버리면 안된다. 기장이 당당하게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지도자들이 당당하게 이렇게 말하지 못하고 우리도 키워야합니다. 키웁시다 이러한 논리에 들어가면 성장도 되지 않고 정체성도 잃는 그런 결과를 맞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고 기장이 아주 목숨을 부지할 수 없게 된다고 까지 생각하지는 않고 그러한 우려스러운 면들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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