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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는 비극이었지만 꼭 기억해야 할 이유는…”

기독일보 김진영 기자

입력 Jun 25, 2019 09:56 AM P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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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참전용사 정용섭 장로, 그 69년 전의 기억

올해 89세인 정용섭 장로. 그는 “생존해 있는 참전용사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김진영 기자

올해 89세인 정용섭 장로. 그는 “생존해 있는 참전용사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김진영 기자 (포토 : )

올해 나이 89세인 정용섭 장로(대은교회). 그러니까 69년 전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의 나이는 꼭 20세였다. 당시 경상북도 의성에 있는 삼분교회에 다녔다는 그는 피난 길에서 친구 두 명과 함께 자원 입대했다. "피난가다 죽느니 싸우다 죽는 게 낫겠다" 싶었다.

육군 6사단 수색대에 배치됐다. 치열했던 전장. 초반부터 밀리던 전세는 이후 역전돼 우리 국군은 북한 압록강변 초산에까지 이르렀다. 여기에 정 장로도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중공군의 참전으로 퇴각해야만 했다. 정 장로에 따르면 중공군은 당시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망을 좁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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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두두두두. 갑작스런 '따발총'(기관단총) 소리에 정 장로를 포함한 국군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날은 어두웠고, 퇴로는 막혔다. 여기가 어딘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마침 나침반에 그의 손에 있었다. 정 장로는 불현듯 발길을 북쪽으로 돌렸다. 그곳 민가에 숨어들면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얼마 못가 중공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중공군은 다행히 그를 죽이진 않았다. 그 말고도 포로가 한 100여 명은 되어 보였다고 한다. 그렇게 3일을 끌려다녔다. 이대로 가다간 북송될 것 같았다. 어둠이 깔리자 그는 기지를 발휘했다. 용변을 핑계로 무리에서 떨어져 그대로 도망쳤다. 강변에 몸을 숨기고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탈출에 성공했다.

정 장로는 다시 나침반에 몸을 맡겼다. 이번엔 남쪽으로 향했다. 마침내 미국 헌병과 마추졌다. 그는 원래 있던 부대로 복귀했다가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총알이 머리 뒤를 스치고 지나갔다.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그는 병원으로 후송됐고, 이후 행정요원으로 근무하다 결국 '상이군인'으로 전역했다.

"생존해 있는 참전용사들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정 장로가 떠올린 '그 때'의 기억이다.

"6.25요? 사상과 이념의 대결장이었죠. 제 기억에 전쟁이 나기 전에 남한에도 공산주의자들이 많았어요. 대학에 갔거나 일본에서 유학했던 이들은 거의 다가 그랬죠. 아마 러시아 볼셰비키 공산혁명에 영향을 받았을 거예요. 내가 자라던 마을에도 일본 유학생이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 모아놓고 공산주의 사상을 가르쳤어요. 나도 그 자리에 있었고. 나중엔 남한 여기 저기에서 폭동도 일어났죠. 그래서 국군이 동네마다 다니면서 소위 '적색분자'를 색출했어요.

그런데 그 때 농사만 짓던 사람들이 공산주의가 뭔지, 자유민주주의가 뭔지 어떻게 알겠어요? 영문도 모르고 당원 명부에 서명한 사람도 꽤 됐을 거예요. 그래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많아요. 어찌보면 그들은 사상 대결의 희생자들이죠. 6.25는 그런 이념의 전쟁이었지, 민족의 대결은 아니었다고 봐요. 참 가슴 아픈 역사이고, 다신 일어나선 안 될 전쟁이죠."

-그럼 오늘날 우리는 왜 6.25를 기억해야 하나요?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냈기 때문이죠.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그런 비극을 딛고 끝내 대한민국을 지켜냈잖아요."

-당시 우리나라 대통령이었던 故 이승만 박사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국부라고 생각해요.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이죠. 그 때 공산주의 세력이 정말 대단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과연 누가 그 세력을 막아냈을까 싶어요. 대한민국 정부도 수립되지 않았을지 모르고. 그는 우리나라 자유민주주의의 상징이자 기둥과 같은 인물입니다.

이 대통령은 영어도 잘 했고, 미국과 가까웠죠. 특히 맥아더 장군과 친해서 인천상륙작전에도 그런 영향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미국에서 그 작전에 대한 반대도 있었지만,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를 살려보겠다는 맥아더의 의지가 작용했다고요."

-포화의 전장에서, 기독교인으로서 무엇을 느끼셨나요?

"죽고 사는 게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달렸다는 걸 많이 느꼈습니다. 살고 싶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말이죠. 날아드는 총탄 속에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극한의 공포..., 그 속에서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기도했던 게 기억나요."

-끝으로 기독교인들에게 6.25는 어떤 의미일까요?

"기독교인들에게 자유민주주의는 하나의 뿌리와도 같습니다. 그것 없이는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죠.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정영섭 장로는 전역 이후 종로, 도봉, 성북, 광진 등 서울 구청장을 여러 번 지낸 공직자로 살다 퇴임했다. 특히 종로구청장이었을 땐, 당시 그곳에 살던 故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도 만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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