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1960년대 이후 80년대까지 이어진 성령론 논쟁의 핵심은 성령세례에 대한 이견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교단적으로 볼 때, 오순절 교단이나 감리교나 성결교회에서는 나름대로 각 교단이 지닌 교리적 노선에 입각한 성령론을 비교적 잘 준수해 왔다고 본다. 따라서 교단 내부에서 성령론의 불협화음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장로교, 특히 예수교대한장로회의 경우는 달랐다. 당시 예장 측의 대표적 신학교인 총회신학교와 고려신학교 내부에서는 성령론으로 인한 큰 갈등이 심화되었고, 마침내 각 신학교 내부에서 교수들 간에 논쟁으로 번져가게 된 것이다.
장로교 내부에서 일어난 성령론 논쟁의 과정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해방 이전에는 초기 한국교회 대부흥운동과 중국인 가옥명(賈玉銘)이 저술한 『성령론』으로 이어지는 19세기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전통과 함께, 또 이보다는 좀 늦게 한국에 소개된 카이퍼(Abraham Kuiper), 워필드(B. B. Warfield), 개핀(Richard Gaffin) 등의 영향을 받은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의 전통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직 두 노선간의 신학적 갈등이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까닭은 교회 대중의 신앙이 일반적으로 초기 대부흥운동의 흐름을 따라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전통을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 다른 이유로는 비록 초기 선교사들에 의해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이 소개되기 시작은 했으나 아직은 한국교회에 성령론이 신학적 논제로서 무르익지는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인한의 『신자와 성령』이 1964년에 출간되었다. 이인한의 노선은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의 전통을 따라 근대 개혁주의 성령운동이다. 그러나 박형룡이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에 입각해서 <신학지남>에 1968년에 "성령"이라는 글을 쓰고 그의 저서에서 이를 밝혔다. 박형룡은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의미이며,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성령세례를 받은 자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중생과 회심시에 받는 성령의 최초적 은사인 성령의 세례와는 마땅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하였다(박형룡, 『교의신학: 구원론』). 그러자 마침내 1960년대 이후에는 장로교 내에는 성령론의 양대 축이 조성되었다.
이후의 성령론의 갈등은 이 양 노선 간의 해석상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개혁파 그룹 내에서 뜨거운 성령론 논쟁이 지속된 과정은 박형룡의 노선에 맞서 차영배가 본격적으로 바르트(Karl Barth), 개핀(Richard Gaffin), 스토트(John Stott) 등의 성령론을 비판하는 작업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이에 대한 자료들은 <신학지남>에 기고된 차영배의 "칼 바르트의 성령론 비판" (1977, 봄), "성령의 세례와 충만에 관한 John Stott의 견해 비판 "(1982, 겨울),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에 관한 R. B. Gaffin 교수의 견해 비평" (1986, 봄, 여름) 등의 비판적 논문들을 들 수 있다.
그 후 현재까지 개혁파 신학계에서는 성령론에 있어서 매우 복잡한 갈등 양상을 보여주었다. 마치 이를 대변해 주기라도 하듯이 호태석은 로이드존스(D. M. Lloyd-Jones), 스토트, 토레이, 개핀, 차영배, 서철원, 안영복 등 여러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다양한 성령론의 견해들을 소개하였다(호태석, 『청지기 훈련을 위한 성령론』).
그러나 성령론 논제의 핵심은 결국 성령세례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을 본다. 1960년대 이후의 복잡한 성령세례 이론을 최소한 간략히 분류해 본다면, 전술한 바와 같이 개혁파 성령세례론에는 이인한을 필두로 하는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전통과, 박형룡을 필두로 하는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전통의 두 가지 커다란 역사적 조류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두 조류의 신학적 성격은 19세기로부터 이어온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전통에 충실하고자 하는 노선과, 이와 대치된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 사이의 갈등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