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케네스 E. 베일리 | 새물결플러스 | 688쪽 

저는 학부 4학년 때 이란의 문학 작품을 읽고 분석하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수업의 목표는 단 하나였는데, 이란의 작가 한 명을 선택해 그의 작품들을 읽고 작품 세계와 사상을 분석하여 소논문을 제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즉시 이란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가인 자럴 얼레 아흐마드(جلال آل احمد , 1969-1923)를 선택해 그의 대표작들부터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지도교수님은 동아시아 최고의 이란 문학 전문가였고, 저는 학부생으로서는 유달리 가혹한(!) 수준의 공부를 요구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쳐질 정도로 고통스럽게 공부했는데, 교수님은 우리에게 작가의 주요 작품을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당대 이란의 사회·문화·정치적인 상황도 엄밀하게 이해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게다가 문학적 스타일을 분석하는 일은 엄청 고된 작업이었는데, 평행법이나 비유 등이 엄청나게 포함된 작품들의 면면을 정확하게 근거를 제시해서 설명하지 않으면 페이퍼는 언제나 퇴짜를 맞기 일쑤였습니다.

어쨌든 그 페이퍼를 방학이 한참 지나고 성적 입력 기간 직전까지 밤을 새서 어렵게 제출했고, 저는 타국의 작가가 쓴 글을 읽는다는 것이 엄청나게 방대한 배경지식을 필요로 하는 중노동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치·사회·문화적 배경을 이해한 후 글을 읽는 작업은 평면적인 글을 입체적으로 보게 해 주었고, 저자의 의도와 등장인물의 감정을 더욱 절절하게 느끼게 해 주었지요. 특히 중동의 문화와 사회는 3년 동안 공부한 제게도 생소한 분야였기 때문에, 매 단어나 장소, 표현들을 살필 때마다 철저한 배경 조사를 해야 저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도 배경 연구가 없으면 의도를 파악할 수 없다

여기서 잠깐 질문. 성경 해석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저자의 저술 의도를 파악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저술 의도를 파악하는 것일까요?

답은? 네, 질문이 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저자의 의도와 하나님의 의도는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이 질문은 유용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며 성급하게 하나님의 뜻을 찾기 때문에, 오히려 본문이 기록된 당대의 배경과 문맥과 언어를 오해하고 읽는 우를 범하기 때문이지요.

우선 "저자는 무엇을 의도하고 본문을 기록했지?"라는 질문을 먼저 하고 본문을 살펴본다면, 본문의 단어와 구조와 배경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좀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원어를 보고, 배경을 살피며, 문학적인 구조 등을 탐구하다 보면 더 오류 없이 정확하게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배경 및 문학적 요소에 대한 연구는 필수적입니다. 결국 성경도 인간이 쓴 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령님께서 그 집필 과정 가운데 어떠한 오류도 생기지 않도록 인도하시고 내용을 불어 넣으셨지만, 결국 성경 본문에는 저자의 글쓰기 스타일과 생각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그것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신약성경을 읽을 때마다 1세기의 팔레스타인으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단어의 의미와 분위기와 문화를 버리고, 1세기 팔레스타인의 언어와 문화와 분위기를 떠올리며 신약성경을 읽어야 하지요. 그리고 케네스 베일리는 이 작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주해를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에서 해냅니다.

◈이 책의 장점과 특징들

총 6부로 구성된 이 책은 32개의 복음서 본문을 독특한 시선으로 해석해낸 복음서 연구서입니다. 저자는 이 책이 주석이 아니라고 말하긴 하지만(36쪽), 사실상 읽기 쉽게 풀어 쓴 주석입니다. 모든 본문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그 교훈과 적용에까지 이를 수 있도록 인도해 주지요.

많은 추천사들이 입증하듯, 이 책은 복음서 연구에 있어 다른 책에서 보기 힘든 신선하고 유용한 통찰을 제공해 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통찰을 가능하게 한 베일리의 저작은 아래와 같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베일리는 라틴어와 헬라어로 된 교부들의 저작만을 바탕으로 성경을 연구해 왔던 전통에서 벗어나, 시리아어와 아랍어로 기록된 동방 그리스도인들의 성경 해석을 적극적으로 도입합니다.

사실 이 자료들의 도입이 서구 기독교 세계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언어적 한계뿐 아니라 동방 기독교에 대한 무지와 무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대다수 서구 그리스도인 학자들은 시리아어와 아랍어로 기록된 기독교 문헌은커녕, 페쉬타(시리아어 성경)와 같은 성경 번역본조차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일리는 (아주 자주 등장하는) 이븐 알 타이이브(Ibn al-Tayyib)와 같은 중세의 아랍 학자들을 적극적으로 인용하고 소개합니다. 그들은 복음서를 주해하고, 성경을 번역했습니다(번역은 해석을 반영합니다). 또 20세기 중동의 현대 학자들도 인용하며 복음서 이해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합니다.

둘째, 베일리는 모든 본문을 설명할 때 소위 '히브리 평행법(parallelism)'이라 불리는 문학적 요소들을 발견하여 본문을 설명합니다. 즉 모든 본문을 볼 때 문학적 구조에 따라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려 한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몇몇 본문에서는 이러한 분석이 상당히 유용한데, 왜냐하면 구조만 보고도 단박에 저자의 중심 의도를 파악하게 해주기 때문이지요(예를 들면 233쪽이나 375쪽을 보십시오).

셋째, 베일리는 모든 본문을 최종 단계의 정경에 초점을 맞추고 주해를 해냅니다. 혹은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복음서 본문이 펼쳐 보이는 신학-역사 드라마를 창조적 통일체로" 살펴봅니다(36쪽).

이는 대체로 (심지어 복음주의자라 하더라도) 복음서 연구를 하는 학자들이 본문의 편집역사나 저자(또는 저자를 배경으로 한 가상 공동체)의 신학적 '삽입'이 얼마큼인지 분석하며 본문을 해체하는 데 비해, 베일리는 오히려 본문을 통일된 한 작품으로 보고 주해하기 때문에 성경 영감에 대해 무오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이용하기에도 적합하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저는 책을 읽는 내내 본문을 다루는 베일리의 시각에 전혀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넷째, 제가 정말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베일리가 경건함과 존중심을 가지고 본문을 대한다는 점입니다. 성경 본문을 과학적이고도 분석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객관적인 고급학자라는 증거라기보다, 기독교 신앙과 자신이 대한 텍스트의 성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얼치기 학자라는 증거일 뿐입니다.

그는 32개의 본문을 다루는 내내 "두려움과 떨림"에 사로잡혀 본문을 대합니다(37쪽). 그는 본문을 다루고 나서 본문의 교훈을 말미에 요약하며, 그 요약은 언제나 설교 적용의 좋은 재료가 됩니다. 요약은 단순한 신학적 고찰을 넘어, 일정 부분 경건함과 진실함, 그리고 자아를 살피는 면이 있습니다. 사실상 저자의 신학적 견해는 비평학계에 가깝지만, 제가 저자에게서 느낀 저술 방식은 청교도의 그것과 흡사한 면이 많았지요.

이상의 특징들 중, 이 책을 여러 복음서 연구서 중 가장 빛나게 해주는 장점은 역시 첫 번째일 것입니다.

모름지기 성경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여럿이 모여서 같이 읽는 것입니다. 혼자 읽을 때는 보이지 않던 단어와 구, 표현 등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일 때가 있고, 자기 신학과 선입견에 갇혀 있던 지점을 다른 사람은 새로운 시각을 통해 교정해 줄 수 있지요. 사실상 그것이 바로 주석을 여러 권 소장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주석을 통해 우리는 고대에서 현대까지 수많은 학자들과 '함께' 성경을 읽을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제 우리는 베일리를 통하여, 아랍어와 시리아어로 성경을 연구하던 중동의 학자들까지 옆에 두고 성경을 연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 책을 읽는 사람들 대부분은 첫 챕터인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부터 충격을 받을 텐데, 당대의 배경에 더 가까운 시각을 유지한 사람의 새로운 배경 이해를 바탕으로 한 성경 읽기가 얼마나 재미있는지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점들

다만 이 책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몇 가지 점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이렇게 주의해야 하는 이유는 이 책의 단점에 기인한다기보다는, 이러한 종류의 책을 잘못 사용할 때 나타나는 혼란스러운 결과가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어떤 책이든 만능이 아니고 (성경을 제외하면) 비판적으로 읽어야 마땅하긴 하지만, 이 책이 주는 신선하고 새로운 통찰 때문에 아래의 몇 가지 지점을 간과해버리기 쉽습니다.

첫째로, 베일리의 주해는 철저히 '중동신학자들의 성경 주해'라는 전제를 깔고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를 들면 저 같은 경우 성경을 해석할 때 다양한 신학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저서들을 참고하지만, 대체로 종교개혁의 유산을 소중히 여기는 학자들의 주해를 좀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편입니다. 그것은 제가 가진 신학적 입장이 종교개혁의 유산을 소중히 여기는 입장이기 때문이지요.

사실상 이렇게 전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주경학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한 전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조차 자신도 모르는 전제(또는 선입견)를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일류 성경학자는 자신의 신학적 전제가 어떤 것인지 명료하게 밝히고, 그 전제 아래 주해를 시도하지만 때로는 과감히 자신의 전제를 비판할 줄도 아는 사람이지요.

이러한 의미에서, 베일리는 이븐 알 타이이브(Ibn al-Tayyib)나 마타 알 미스킨(Matta al-Miskin)과 같은 학자들에게 크게 의존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작품들이야말로 성경 저자들의 원래 의도를 밝히는 데 유용하다고 믿는 것이지요.

그래서 심지어 베일리는 "나는 마타 알 미스킨이 쓴 여섯 권짜리 방대한 복음서 주석이 영어로 번역 출간되어 세계 교회에 유익을 줄 날이 오길 간절히 바란다. 이 박식한 수도사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근대 사막 교부의 영성을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둘째로, 저자의 새로운 시도와 해석이 그동안 이루어졌던 성경 해석을 전면적으로 갈아엎어야 할 정도로 새로운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SNS에서 논란이 되었던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사실 박대당하신 것이 아니라 환대를 받았다는 저자의 주장과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베일리가 핵심적인 증거로 제시한 헬라어 '카탈뤼마'가 여관이 아니라 객실이라는 사실은 심지어 1988년도에 쓰인 레온 모리스(Leon Morris)의 간결한 주석에도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즉 베일리가 지구상 최초로 공개한 계시 같은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환대받은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분이 낮고 비천한 자리로 오셨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하는 누가의 의도는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전에는 "낮고 비천한 자리로 오셔서 마굿간에 계셨다" 정도라면, 베일리의 책을 읽고 나서는 "낮고 비천한 자리로 오셨고, 낮고 비천한 자들만 환영했다" 정도의 해석이 되는 것이지요. 큰 틀에서의 의도는 변하지 않았고, 호들갑을 떨 정도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같은 것은 없습니다.

셋째로, 그가 모든 본문마다 적용하여 보여주는 히브리 평행법적 분석이나, 몇몇 문법사항에 관한 것들은 가끔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보일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히브리 평행법을 시(詩)뿐 아니라 내러티브에도 적용하여 연구하는 예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종종 실제로 저자가 평행법을 의도했다기보다는, 해석자가 평행법을 썼을 거라고 가정하고 억지로 찾아내는 위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경우에 그렇지는 않지만, 베일리의 분석도 종종 그러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위와 같은 이유로 인해 이 책을 지나치게 맹신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케네스 베일리의 의도도 아니구요. 이 책은 그가 직접 말하듯, 그저 우리가 접해 보지 못했던 신앙 선배들이 물려 준 "유산에서 배움을 얻으면서 이를 통해 나사렛 예수의 삶과 메시지를 더 분명히 생각해 보려는 부족한 시도"(p.19)일 뿐입니다.

◈결론: 본문을 입체적이고 풍성하게

그럼에도 이 책은 아주 잘 쓰인 복음서 연구서이며, 가까이 두고 참고할 가치가 충분한 책입니다. 설교자들에게 성경 시대 당시의 배경과 문화를 풍부하게 제공하여 본문을 입체적으로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들의 고민은 언제나 청중 대부분이 아주 잘 알고 이미 익숙해 있는 복음서를 어떻게 더 특별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 책은 신선한 해석과 풍성한 배경 연구를 통해 지적 충격의 쾌감을 안겨 줍니다.

특히 제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5부는 복음서에서 줄기차게 등장하는 여성의 역할을 재고해 보게 함으로 공동체적 교훈을 주기도 합니다. 저는 옛적 이란 문학을 연구하던 학부시절 이란의 사회 문화와 배경을 알고 나서 글을 읽고 느꼈던 지적 쾌감을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를 보고 성경을 연구하면서 느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을 선별적으로 다른 복음서 연구들과 더불어 읽는다면 설교에 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서 서구 문화의 렌즈로만 이해하던 성경을 새로운 렌즈를 통해 보게 됨으로, 1세기를 살았던 저자의 눈으로 다시 한 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학도들에게 이러한 연구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지요.

/이정규 목사(시광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