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의 유리 현상은 한인교회 전반에 걸쳐 과거부터 깊게 제기되어 온 문제다. 한 극단에서는 신학적 지성이 목회 현장의 영성을 제한하는 방해 요소로 취급되기도 하고 또 다른 극단에서는 목회적 열성이 신학없이 표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에 본지는 현재 신학교에서 학업 중이면서 동시에 한인교회에서 목회를 함께 하고 있는 목회자들을 만나 신학의 학문성과 목회의 현장성 간에 일치점을 찾아 본다. 시카고 지역에는 게렛신학교, 노스팍신학교, 루터란신학교, 맥코믹신학교, 무디신학교, 북침례신학교, 시베리웨스턴신학교, 시카고신학교, 시카고대 신학대학원, 휘튼대학교, 트리니티신학교 등 다양한 신학교가 밀집돼 있으며 최근 한 통계에서 미국 전역에서 신학생 배출율 1위 도시인만큼 이 문제를 논하기에 좋은 토양을 갖고 있다.
마지막 인터뷰는 휘튼대학교에서 조직신학으로 Ph.D. 과정에 있는 신동수 목사다. 신 목사는 중학생 때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대학생 때 병마의 고통을 겪으며 주님 앞에 헌신을 결심했다. 국민대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10년간 대학생 선교회를 통하여 훈련을 받은 후, 평신도 선교사로 영국 런던에 나가 그곳에서 1997년부터 1998년까지 캠퍼스 선교 활동을 했다. 선교 중 신학적 소양의 부족함을 느낀 그는 귀국하여 기독신학대학원대학교(현 백석대 신학대학원)로 진학해 M.Div.를 마치고 그랜드래피즈의 칼빈신학교로 유학해 조직신학으로 Th.M. 학위를 마쳤으며 현재 휘튼대학교에서 같은 전공으로 Ph.D. 과정에 있다. 시카고에서는 네이퍼빌장로교회와 한인서부교회에서 고등부 유스 부서를 맡아 목회한 경험이 있다. “신학의 직접적이자 궁극적인 목적은 목회”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그이지만 티칭에 대한 열심도 적지 않아 휘튼대학교에서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성경과 교회”에 관해 가르쳤으며 현재는 중부개혁장로회신학교(버팔로그로브 소재)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하고 있다. 그리고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주일 오후 2시에 골프와 알링톤하이츠가 만나는 곳에 있는 새소망선교회에서 평신도들과 함께 성경을 공부하는 “시카고성경아카데미”를 무료로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목사님이 생각하는 조직신학의 정의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가 신학(theology)이라고 부르는 것은 말 그대로 하나님에 관한 학문(theo+logy)이며, 근본적으로는 성경해석을 통해 집약된 가르침(dogma)을 종합하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과 신학은 분리될 수 없으며, 신학의 원천과 주 자료는 성경이라 할 것입니다. 물론 현대 조직신학의 경향이 성경 이외의 것, 소위 철학적 사조나 시대적 담론과 씨름하며 진행되기도 있지만 원칙적으로 그러한 신학 조차도 성경을 떠나서 이야기 될 수 없습니다.
많은 신학 분야 가운데 조직신학은 말 그대로 신학을 조직하는 신학 분야입니다. 성경에 있는 가르침을 분류하고 체계화해서 그것으로 하여금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게 하고 바른 가르침 위에 교회를 세워 가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라 할 것입니다. 개혁파 조직신학의 원조로 꼽히는 칼빈의 기독교강요 1559년판 서론에 보면, 기독교강요를 쓴 목적은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가르칠 교역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칼빈의 대표적 조직신학(기독교강요)의 목적이 “성경을 바로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었다는 것이 의미심장 합니다. 칼빈은 이런 관점에서 조직신학을 철저히 성경 주석을 기초로 행했습니다. 그에게 성경을 읽고 주석하는 것과 조직신학을 하는 것은 구분되는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개혁파 칼빈주의의 목사로서, 제가 이해하는 조직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직신학이란 성경을 바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성경의 가르침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그것을 배우고 익힌 후에는 바른 가르침을 분별하게 되고, 바른 신앙을 함양하게 되는 학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바른 가르침이 무엇인지 예를 들어 주신다면?
예를 들면, 성경에는 엘로힘, 야훼, 아도나이 등 하나님을 가리키는 여러 가지 이름들이 나옵니다. 그 이름에 따라 하나님이 어떤 때에는 창조주, 권능의 주, 심판의 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구원주, 언약의 주, 용서하시는 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성경을 부분적으로만 보게 되면 하나님의 한쪽 면만을 보고, 신의 속성의 일면만을 강조하게 되는 오류가 발생합니다. 균형을 잃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조직신학을 통해 성경 전체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과 속성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균형잡힌 신앙과 삶에 이를 수 있게 됩니다.
신론으로 대화를 시작했으니 신론의 한 이슈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전지전능의 하나님입니다. 그분의 지혜와 능력을 우리 인간이 다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롬11:33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작정, 예정, 섭리) 앞에 사람이 감히 할 말이 없습니다. 롬9:20에서는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전문적 용어로 하나님의 초월성(God’s Transcendence)이라고 합니다. 16세기 루터는 이러한 초월적 하나님의 속성을 “숨겨진 하나님”(Deus Absconditus)이라고 표현 했습니다. 칼빈주의 개혁파에서는 이런 하나님의 속성을 “하나님의 불가해성” 혹은 “비공유적 속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본질을 알 수 없고 그 성품도 다 알 길이 없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의 속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로마서의 서두에서 바울은 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1:20). 우리가 하나님을 능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양심으로도 알고 자연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기에 아무도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구약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야훼”라고 가르쳐 주시고 그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함께 거하시며 동행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자기 백성이 물으면 답하시고, 회개하면 마음을 돌이키시고, 약속하심으로 자신을 인간에게 매어 두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신학적 용어로 이것을 하나님의 내재성(God’s Immanence)이라고 합니다.
조직신학은 이 상충되어 보이는 하나님의 속성이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 줍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초월의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내재의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신의 성품이 초월성에만 머문다면, 저 높은 하늘에만 머무는 알 수 없는 신이 되어, 나와는 아무 상관없이 무자비한 공포만을 유발하는 신이 될 것입니다.(절대적 초월신). 또한, 만약 신의 성품이 내재성에만 천착한다면, 인간처럼 일희일비하며 이랬다 저랬다 하는 못 미더운 신이 될 것입니다.(올림푸스의 신들, 혹은 무당의 만신). 다시 말씀 드리지만, 조직신학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균형잡힌 속성을 밝히고, 우리의 신앙을 균형있게– 초월하신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경외심과 내재하신 하나님의 친근함에 대한 감사와 기쁨으로 – 함양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설교와 가르침에서 이런 성경적, 신학적 균형을 잃을 때, 분명, 성도의 삶과 교회는 문제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장로교의 전통적 강조점은 하나님의 초월성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것을 지키게 하시는 엄위하신 하나님에 초점을 맞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경도되어 단지 경외해야 할 하나님만 강조하게 되면 우리의 신앙이 율법적이 되기 쉽고,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놓치기가 쉽습니다. 장로교회가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초월성에 대한 편견은 그런 결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움을 갖고 섬겨야 할 분이시지만 우리와 언약을 맺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동행하시며, 무한히 선대하는 분이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오순절교회의 전통적 강조점은 하나님의 내재성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성령 하나님이 강조되어, 늘 나와 함께 하시면서 나에게 말씀하시고, 방언과 능력을 주시고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잘 되게 하는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내재의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만 강조하다 보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약해지면서 ‘내가 뭘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위험한 생각에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잘못하면, 개인적 독선과 비도덕적 신앙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 역시 오순절과 은사파가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내재성만을 강조하면, 그런 결과로 이어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균형 잡힌 기초를 갖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나는 교의, 교리들을 체계적이며 바르게 정리하는 작업이 조직신학이라고 한다면 조직신학이 목회자의 설교 외에 다른 방면에서도 끼칠 수 있는 현실적 영향력이 있을까요?
교회의 현실 속에서 조직신학적 관점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던, 초월적 하나님과 내재적 하나님 개념을 법과 사랑이라는 현실의 문제 속에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초월적 하나님은 영원한 법을 세우시고 심판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신이시라면, 내재적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용서하시고, 한없이 품으시는 신입니다. 이것을 “은혜와 진리”의 문제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은혜를 시행하려 하면 진리가 서지 않고 진리를 시행하려 하면 은혜가 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조직신학의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한 부류는, 은혜로 덮고 가자고 하면서, 사랑을 외칩니다. 그런데, 또 다른 부류는, 교회에는 엄연한 법이 있고 진리가 있으니, 법대로 하자고 하면서 정의를 외칩니다. 누가 틀리고, 누가 맞습니까? 은혜로 용서하고 덮자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고, 법과 정의를 세워 진리를 수호하자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균형있는 신학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판단해 보면 둘 다 뭔가 크게 잘못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선, 은혜와 사랑을 이야기 하면서 법과 진리를 세우지 않는 경우를 살펴 볼 때 그렇습니다. 성경의 예를 들면, 사무엘하 13장에서, 다윗은 자신의 장자 암논이 이복동생 다말을 강간했다는 불미스럽고 수치스러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일을 듣고 심히 불쾌히 여기기는 했으나(삼하 13:21), 암논을 불러다 율법대로 경책, 징계하지 않았습니다. 일견, 은혜를 베풀고 사랑을 베푼 것입니다. 죄가 큼에도 불구하고 은혜롭게 덮어 준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은 진리와 공정함이 함께 해야 진정한 사랑입니다(고전 13:6). 결국, 진리를 세우지 못한, 다윗의 왜곡된 사랑은, 다말의 친오라비 압살롬의 계획된 살해를 불렀을 뿐만 아니라, 후에는, 그의 왕국이 전무후무한 부자상잔의 비극을 겪는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 안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 법과 진리를 세우지 않고, “좋은 게 좋은 거다” 하고 은혜롭게 덮고자만 하면 치명적 결과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치명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초막절이 지난, 다음 날 아침에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데리고 예수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의 질문에는, 일견, 진리가 가득 차 있습니다.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간음과 같은 죄를 멸하여 거룩한 공동체가 되도록 하시는 의로운 뜻이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분명 진리 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진리를 담지하고 있었지만, 그 진리를 사랑으로 펴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이 가진 진리는 사람을 살리는 진리가 아니라,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는 진리가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 분쟁이 생길 때, 진리의 깃발을 높이 들며, 법과 정의를 외치는 분들에게서, 사람을 살리는 정의가 아니라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기 위한 치명적 정의가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진리는 갖추었지만 은혜는 상실한 바리새인의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진리가 없는 은혜는 사람을 못쓰게 만들고, 은혜가 없는 진리는 사람을 죽일 뿐입니다. 자,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은혜와 진리를 균형있게 시행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대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의 결국은 그 여자의 죄는 돌로 쳐서 도말해야 하는 악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의와 진리를 분명하게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우신 의와 진리는 사랑 가운데 시행되는 진리였습니다. 죄인된 우리가 함부로 남을 정죄하지 못하도록 깨우쳐 주시면서, 죄 없으신 당신조차도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시는 진리였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여자를 죽이려고 정의와 진리를 세웠지만, 예수님은 죄인된 여인을 살리기 위해 진리를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 상황에서, 예수님처럼 진리를 드러내야 합니다. 이것은 잘못이다, 저것은 하나님 앞에서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정도로 악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법과 진리를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사랑으로 드러내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 범한 당사자가 듣는 자리에서, “돌로 쳐라”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종국에는 모든 사람의 죄인됨을 기억케 하시고, 그녀에게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라”고 하시며 은혜로 그녀를 살려 주십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은혜가 충만한 진리였고, 은혜는 진리가 충만한 은혜였던 것입니다. 조직신학적으로 환언하자면, 은혜가 없는 진리는 참된 진리가 아니고, 진리가 없는 은혜는 참된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최근 시카고의 교계 분쟁을 살펴보면서, 간혹 당혹스러운 부분은, “은혜롭게 하자”는 말로 무작정 덮고 가려다가 나중에 더 큰 문제가 야기되거나, 혹은 “법과 진리대로 하자”며 외치다가 결국 사람을 살리는 법이 아니라 죽이고 정죄하기 위한 법이 되는 경우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의와 진리는 감춰진 채, 은혜를 빙자하여, 쉬쉬하면서 곪은 곳이 터지기까지 썩어가는 교회가 생기고, 은혜와 사랑은 식을 대로 식은 채, 스스로 세운 정의와 법으로, 정죄하고 면직과 출교를 시키고, 결국은 갈라지는 교회가 생겨나는 문제가 바로 우리의 상황입니다. 바로 이러한 현실적 상황에서, 조직신학적으로 균형 잡힌 관점은, 우리 자신의 편협한 은혜관과 진리관을 반성하게 하고, 교회를 다시 바른 가르침과 바른 실천 가운데 세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보면, 조직신학이 결코 강단의 선포에만 갇힌 학문은 아닙니다.
-네. 올바른 지적입니다. 그런데 조직신학에서 말하는 균형적 시각이 교단마다 큰 편차를 보이고 있는데,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균형잡혔다는 기준이 모호한 것 아닙니까?
물론 각 교단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위의 은혜와 진리의 문제를 놓고 볼 때, 어떤 교단은 은혜를 더 많이 강조하여 법보다는 법을 초월한 사랑의 실천을 참 기독교적이라고 가르칩니다. 최근의 예로서,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판단보다는 동성애자들을 향한 무한한 사랑의 강조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다른 교단은 진리를 우선시 하여 하나님의 법을 바로 세우는 것이 참 기독교적인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라고 가르칩니다. 같은 예로서, 동성애는 분명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죄이므로, 회개가 선행해야 하며,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거나 동성애 신부나 교역자를 세우는 것을 단호히 반대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교단은 초월성과 법을 강조하고 어떤 교단은 내재성과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정통 신학을 유지하는 교단이라면, 그 어떤 교단이라도, 그 교단의 신학을 꼼꼼히 살펴 보면, 한 면이 강조될 수는 있지만, 다른 한 면이 가진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습니다. 동성애에 대한 성경적인 판단은 변할 수 없고, 동성애자들을 향한 사랑의 태도도 유지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신학의 대가로 바르트를 꼽는데, 바르트는 절대 타자(Wholly Other)의 하나님, 초월적 하나님을 매우 강조하여 하나님의 절대 자유를 주장하였지만, 이 자유는 “사랑 안에서의 자유”라고 거듭 확인하였습니다. 교단 신학적 색채에 따라 차이점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런 균형감이 각 교단의 조직신학과 그들의 조직신학자들 안에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들이 현장에서 조직신학적 균형감을 갖기 위해서 목사님은 현장의 목회자들에게 어떤 제안을 하시겠습니까?
저는 성경적, 신학적 혜안을 가진 분들과의 교제나 멘토링을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것이 어렵다면 그런 혜안을 가진 분들이 저술한 책을 읽으면서 균형 잡힌 시각을 배워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각종 주제들에 대해 조직신학적으로 고민하는 독서도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균형 잡힌 신학적 안목에 있어서 많이 배우고 도움을 받았던 개혁파 사상가들로는,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도예벨트, G. C. 벌카우어, 리차드 마우, 코닐니우스 플란팅가, 존 스토트 등등이 있습니다. 또한, 기독교적 저자가 아니더라도, 리차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과 같은 책을 읽으면서 우리의 신관과 비교하며 고민하며 읽는 것도 조직신학적 통찰에 도움을 주는 독서의 일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조직신학적 성찰은 학문이나 책에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현실적 문제들 속에서 고민하며 그것에 대한 답을 성경과 신학에서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발전돼 왔다는 것입니다. 신학의 태두인 바르트도 그런 맥락 속에서 목회자들은 “한 손엔 성경이, 한 손엔 신문”이 들려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조직신학을 하는 원동력과 풍부한 자원은 모두 목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조직신학적 사고를 하는 데에 조직신학 서적보다 목회가 더 큰 통찰을 줄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물론이죠. 신학의 현장은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들을 살펴보면 예외없이, 앞부분에서는 교리를 설파하고 뒷부분에서는 실천을 이야기합니다. 교리는 교회의 현장에서 실천되고 성취되어야 한다는 성격적 예라고 생각합니다. 바르트는 이 때문에 자신의 대표적 조직신학서의 제목을 [교회 교의학](Kirchliche Dogmatik)라고 붙였는데, 이는 그 자신이 자펜벨에서 목회하는 동안 저 유명한 [로마서 주석](1919)을 내놓았을 뿐 아니라, 신학의 현장과 목표가 교회임을 절감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회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로 어거스틴을 꼽습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신학자이지만 무엇보다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된 후, 북아프리카의 히포에서 평생을 목회했습니다. 그의 수많은 조직신학적 저술들은 모두 그의 목회 현장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는 목회를 하면서 겪는 많은 이단들과 문제들에 직면하여, 목회의 연장선에서 신학적인 도전들에 응전으로서 저술활동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신학적인 글들이 대부분 전문적인 논문이라기보다, 설교처럼 쓰여지고 읽혀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6세기 칼빈도 수많은 책을 썼지만, 그 역시 목회 현장 속에서 부딪히는 경험과 문제들에 응답하기 위해 책을 썼습니다. 때문에 그의 [기독교 강요]에는 그가 목회 현장에서 직면했던 신학적 문제들에 대한 답변서의 측면이 강하게 존재합니다. 현대의 존 파이퍼 목사도 신실한 강해설교와 목회 활동 가운데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괄목할 만한 책들을 써서, 자신의 목회의 신학적, 실천적 토대를 삼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조직신학적 작업입니다. 이분들의 공통점은 모두 훌륭한 목회자이면서 동시에 조직신학자였다는 것입니다.
이 분들의 목회가 어떤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양적, 건물적으로), 성공한 교회는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분들에게 맡겨주신 목회 현장에 최선을 다하며 신학적으로 늘 진지하고 성실하게 목회를 감당했다는 점에는 이론이 없을 것입니다.
-현대신학은 목회현장을 떠나 너무 사변화되었고 심지어 목회와는 무관한 학문이 되어 버렸다는 비판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프린스톤신학교의 엘렌 채리(Ellen Charry) 교수는 유대인 출신의 여성 신학자입니다. 그녀는 [By the Renewing of Your Minds(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라는 책에서, 현대신학의 딸이지만, 현대신학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갖고, 참된 신학이 무엇인지 제시합니다. 그녀는 사변적이고 상아탑에 갖힌 현대의 신학 경향을 비판하며, 현대 이전의 신학은 궁극적으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조각하고 덕을 함양하는 목회적 신학이 아니었냐고 질문합니다. 신학의 진정한 목적은 목회 현장에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함양시킬 뿐 아니라 영성을 높여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학이란 결국 성경 말씀을 통찰력있게 해석하고 그 통찰력으로 성도들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시켜 덕을 함양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기에 목회와 신학함은 구분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채리 교수의 목회적 신학에 대한 주장에 상당히 공감하면서 이 시대 우리 목회자들이 갖추어야 할 것이 바로 이 목회적 신학, 신학적 목회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해석하여 바로 가르치고(Orthodox – 정통), 하나님이 원하시는 형상과 모양으로 이 땅을 덕스럽게(Orthopraxis – 바른 삶으로) 살아가도록 성도들을 세우는 것이 우리 목회자들의 신학적 과제인 것입니다.
특별히, 신학자요 목회자로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자세는, 바로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 바른 자세로 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거스틴은 신학도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를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신학은 신을 알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인데 하면 할수록 더 모른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는 학문입니다. 그래서 진짜 제대로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더 많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참된 공부는 우리의 무지를 깨닫게 해 주는 것이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 지도록 합니다. 그래서 개혁파적 신학의 전통에서는, 신학함은 단지 이성적 작용에 의한 지적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전과 진리 앞에 서는 작업이라 여겼기에 반드시 기도로서 시작하도록 가르쳐왔습니다. 또한, 우리가 신학을 통해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자신의 죄인됨과 부족함을 발견할 수 밖에 없기에 교만은 불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현대 목회자들이 이런 자세로 신학하고, 이런 자세로 목회한다면, 목회 현장의 갈등은 상당히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목회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겸손히 듣는 신학적 태도로부터 시작하고, 이러한 신 앞의 겸손은, 성도들을 향한 겸손과 인내의 자세로 이어져 목회의 고난을 감당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칼빈과 리차드 백스터, 조나단 에드워즈의 목회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겸손의 태도를 또한 진정한 신학적 목회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결론적으로, 조직신학이 추구하는 신학과 목회는, 오쏘독스(바른 가르침)과 함께 가는 오쏘프락시스(참된 실천)이라고 할 것인데, 참된 신학은 결국, 겸손의 신학이며, 참된 목회도 결국, 겸손의 목회일 것입니다.
-네 목사님. 오늘 인터뷰에 감사드립니다.
마지막 인터뷰는 휘튼대학교에서 조직신학으로 Ph.D. 과정에 있는 신동수 목사다. 신 목사는 중학생 때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대학생 때 병마의 고통을 겪으며 주님 앞에 헌신을 결심했다. 국민대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10년간 대학생 선교회를 통하여 훈련을 받은 후, 평신도 선교사로 영국 런던에 나가 그곳에서 1997년부터 1998년까지 캠퍼스 선교 활동을 했다. 선교 중 신학적 소양의 부족함을 느낀 그는 귀국하여 기독신학대학원대학교(현 백석대 신학대학원)로 진학해 M.Div.를 마치고 그랜드래피즈의 칼빈신학교로 유학해 조직신학으로 Th.M. 학위를 마쳤으며 현재 휘튼대학교에서 같은 전공으로 Ph.D. 과정에 있다. 시카고에서는 네이퍼빌장로교회와 한인서부교회에서 고등부 유스 부서를 맡아 목회한 경험이 있다. “신학의 직접적이자 궁극적인 목적은 목회”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그이지만 티칭에 대한 열심도 적지 않아 휘튼대학교에서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성경과 교회”에 관해 가르쳤으며 현재는 중부개혁장로회신학교(버팔로그로브 소재)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하고 있다. 그리고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주일 오후 2시에 골프와 알링톤하이츠가 만나는 곳에 있는 새소망선교회에서 평신도들과 함께 성경을 공부하는 “시카고성경아카데미”를 무료로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목사님이 생각하는 조직신학의 정의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가 신학(theology)이라고 부르는 것은 말 그대로 하나님에 관한 학문(theo+logy)이며, 근본적으로는 성경해석을 통해 집약된 가르침(dogma)을 종합하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과 신학은 분리될 수 없으며, 신학의 원천과 주 자료는 성경이라 할 것입니다. 물론 현대 조직신학의 경향이 성경 이외의 것, 소위 철학적 사조나 시대적 담론과 씨름하며 진행되기도 있지만 원칙적으로 그러한 신학 조차도 성경을 떠나서 이야기 될 수 없습니다.
많은 신학 분야 가운데 조직신학은 말 그대로 신학을 조직하는 신학 분야입니다. 성경에 있는 가르침을 분류하고 체계화해서 그것으로 하여금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게 하고 바른 가르침 위에 교회를 세워 가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라 할 것입니다. 개혁파 조직신학의 원조로 꼽히는 칼빈의 기독교강요 1559년판 서론에 보면, 기독교강요를 쓴 목적은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가르칠 교역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칼빈의 대표적 조직신학(기독교강요)의 목적이 “성경을 바로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었다는 것이 의미심장 합니다. 칼빈은 이런 관점에서 조직신학을 철저히 성경 주석을 기초로 행했습니다. 그에게 성경을 읽고 주석하는 것과 조직신학을 하는 것은 구분되는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개혁파 칼빈주의의 목사로서, 제가 이해하는 조직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직신학이란 성경을 바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성경의 가르침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그것을 배우고 익힌 후에는 바른 가르침을 분별하게 되고, 바른 신앙을 함양하게 되는 학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바른 가르침이 무엇인지 예를 들어 주신다면?
예를 들면, 성경에는 엘로힘, 야훼, 아도나이 등 하나님을 가리키는 여러 가지 이름들이 나옵니다. 그 이름에 따라 하나님이 어떤 때에는 창조주, 권능의 주, 심판의 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구원주, 언약의 주, 용서하시는 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성경을 부분적으로만 보게 되면 하나님의 한쪽 면만을 보고, 신의 속성의 일면만을 강조하게 되는 오류가 발생합니다. 균형을 잃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조직신학을 통해 성경 전체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과 속성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균형잡힌 신앙과 삶에 이를 수 있게 됩니다.
신론으로 대화를 시작했으니 신론의 한 이슈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전지전능의 하나님입니다. 그분의 지혜와 능력을 우리 인간이 다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롬11:33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작정, 예정, 섭리) 앞에 사람이 감히 할 말이 없습니다. 롬9:20에서는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전문적 용어로 하나님의 초월성(God’s Transcendence)이라고 합니다. 16세기 루터는 이러한 초월적 하나님의 속성을 “숨겨진 하나님”(Deus Absconditus)이라고 표현 했습니다. 칼빈주의 개혁파에서는 이런 하나님의 속성을 “하나님의 불가해성” 혹은 “비공유적 속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본질을 알 수 없고 그 성품도 다 알 길이 없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의 속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로마서의 서두에서 바울은 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1:20). 우리가 하나님을 능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양심으로도 알고 자연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기에 아무도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구약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야훼”라고 가르쳐 주시고 그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함께 거하시며 동행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자기 백성이 물으면 답하시고, 회개하면 마음을 돌이키시고, 약속하심으로 자신을 인간에게 매어 두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신학적 용어로 이것을 하나님의 내재성(God’s Immanence)이라고 합니다.
조직신학은 이 상충되어 보이는 하나님의 속성이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 줍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초월의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내재의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신의 성품이 초월성에만 머문다면, 저 높은 하늘에만 머무는 알 수 없는 신이 되어, 나와는 아무 상관없이 무자비한 공포만을 유발하는 신이 될 것입니다.(절대적 초월신). 또한, 만약 신의 성품이 내재성에만 천착한다면, 인간처럼 일희일비하며 이랬다 저랬다 하는 못 미더운 신이 될 것입니다.(올림푸스의 신들, 혹은 무당의 만신). 다시 말씀 드리지만, 조직신학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균형잡힌 속성을 밝히고, 우리의 신앙을 균형있게– 초월하신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경외심과 내재하신 하나님의 친근함에 대한 감사와 기쁨으로 – 함양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설교와 가르침에서 이런 성경적, 신학적 균형을 잃을 때, 분명, 성도의 삶과 교회는 문제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장로교의 전통적 강조점은 하나님의 초월성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것을 지키게 하시는 엄위하신 하나님에 초점을 맞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경도되어 단지 경외해야 할 하나님만 강조하게 되면 우리의 신앙이 율법적이 되기 쉽고,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놓치기가 쉽습니다. 장로교회가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초월성에 대한 편견은 그런 결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움을 갖고 섬겨야 할 분이시지만 우리와 언약을 맺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동행하시며, 무한히 선대하는 분이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오순절교회의 전통적 강조점은 하나님의 내재성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성령 하나님이 강조되어, 늘 나와 함께 하시면서 나에게 말씀하시고, 방언과 능력을 주시고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잘 되게 하는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내재의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만 강조하다 보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약해지면서 ‘내가 뭘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위험한 생각에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잘못하면, 개인적 독선과 비도덕적 신앙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 역시 오순절과 은사파가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내재성만을 강조하면, 그런 결과로 이어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균형 잡힌 기초를 갖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나는 교의, 교리들을 체계적이며 바르게 정리하는 작업이 조직신학이라고 한다면 조직신학이 목회자의 설교 외에 다른 방면에서도 끼칠 수 있는 현실적 영향력이 있을까요?
교회의 현실 속에서 조직신학적 관점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던, 초월적 하나님과 내재적 하나님 개념을 법과 사랑이라는 현실의 문제 속에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초월적 하나님은 영원한 법을 세우시고 심판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신이시라면, 내재적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용서하시고, 한없이 품으시는 신입니다. 이것을 “은혜와 진리”의 문제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은혜를 시행하려 하면 진리가 서지 않고 진리를 시행하려 하면 은혜가 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조직신학의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한 부류는, 은혜로 덮고 가자고 하면서, 사랑을 외칩니다. 그런데, 또 다른 부류는, 교회에는 엄연한 법이 있고 진리가 있으니, 법대로 하자고 하면서 정의를 외칩니다. 누가 틀리고, 누가 맞습니까? 은혜로 용서하고 덮자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고, 법과 정의를 세워 진리를 수호하자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균형있는 신학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판단해 보면 둘 다 뭔가 크게 잘못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선, 은혜와 사랑을 이야기 하면서 법과 진리를 세우지 않는 경우를 살펴 볼 때 그렇습니다. 성경의 예를 들면, 사무엘하 13장에서, 다윗은 자신의 장자 암논이 이복동생 다말을 강간했다는 불미스럽고 수치스러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일을 듣고 심히 불쾌히 여기기는 했으나(삼하 13:21), 암논을 불러다 율법대로 경책, 징계하지 않았습니다. 일견, 은혜를 베풀고 사랑을 베푼 것입니다. 죄가 큼에도 불구하고 은혜롭게 덮어 준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은 진리와 공정함이 함께 해야 진정한 사랑입니다(고전 13:6). 결국, 진리를 세우지 못한, 다윗의 왜곡된 사랑은, 다말의 친오라비 압살롬의 계획된 살해를 불렀을 뿐만 아니라, 후에는, 그의 왕국이 전무후무한 부자상잔의 비극을 겪는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 안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 법과 진리를 세우지 않고, “좋은 게 좋은 거다” 하고 은혜롭게 덮고자만 하면 치명적 결과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치명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초막절이 지난, 다음 날 아침에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데리고 예수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의 질문에는, 일견, 진리가 가득 차 있습니다.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간음과 같은 죄를 멸하여 거룩한 공동체가 되도록 하시는 의로운 뜻이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분명 진리 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진리를 담지하고 있었지만, 그 진리를 사랑으로 펴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이 가진 진리는 사람을 살리는 진리가 아니라,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는 진리가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 분쟁이 생길 때, 진리의 깃발을 높이 들며, 법과 정의를 외치는 분들에게서, 사람을 살리는 정의가 아니라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기 위한 치명적 정의가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진리는 갖추었지만 은혜는 상실한 바리새인의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진리가 없는 은혜는 사람을 못쓰게 만들고, 은혜가 없는 진리는 사람을 죽일 뿐입니다. 자,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은혜와 진리를 균형있게 시행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대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의 결국은 그 여자의 죄는 돌로 쳐서 도말해야 하는 악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의와 진리를 분명하게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우신 의와 진리는 사랑 가운데 시행되는 진리였습니다. 죄인된 우리가 함부로 남을 정죄하지 못하도록 깨우쳐 주시면서, 죄 없으신 당신조차도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시는 진리였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여자를 죽이려고 정의와 진리를 세웠지만, 예수님은 죄인된 여인을 살리기 위해 진리를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 상황에서, 예수님처럼 진리를 드러내야 합니다. 이것은 잘못이다, 저것은 하나님 앞에서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정도로 악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법과 진리를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사랑으로 드러내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 범한 당사자가 듣는 자리에서, “돌로 쳐라”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종국에는 모든 사람의 죄인됨을 기억케 하시고, 그녀에게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라”고 하시며 은혜로 그녀를 살려 주십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은혜가 충만한 진리였고, 은혜는 진리가 충만한 은혜였던 것입니다. 조직신학적으로 환언하자면, 은혜가 없는 진리는 참된 진리가 아니고, 진리가 없는 은혜는 참된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최근 시카고의 교계 분쟁을 살펴보면서, 간혹 당혹스러운 부분은, “은혜롭게 하자”는 말로 무작정 덮고 가려다가 나중에 더 큰 문제가 야기되거나, 혹은 “법과 진리대로 하자”며 외치다가 결국 사람을 살리는 법이 아니라 죽이고 정죄하기 위한 법이 되는 경우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의와 진리는 감춰진 채, 은혜를 빙자하여, 쉬쉬하면서 곪은 곳이 터지기까지 썩어가는 교회가 생기고, 은혜와 사랑은 식을 대로 식은 채, 스스로 세운 정의와 법으로, 정죄하고 면직과 출교를 시키고, 결국은 갈라지는 교회가 생겨나는 문제가 바로 우리의 상황입니다. 바로 이러한 현실적 상황에서, 조직신학적으로 균형 잡힌 관점은, 우리 자신의 편협한 은혜관과 진리관을 반성하게 하고, 교회를 다시 바른 가르침과 바른 실천 가운데 세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보면, 조직신학이 결코 강단의 선포에만 갇힌 학문은 아닙니다.
-네. 올바른 지적입니다. 그런데 조직신학에서 말하는 균형적 시각이 교단마다 큰 편차를 보이고 있는데,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균형잡혔다는 기준이 모호한 것 아닙니까?
물론 각 교단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위의 은혜와 진리의 문제를 놓고 볼 때, 어떤 교단은 은혜를 더 많이 강조하여 법보다는 법을 초월한 사랑의 실천을 참 기독교적이라고 가르칩니다. 최근의 예로서,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판단보다는 동성애자들을 향한 무한한 사랑의 강조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다른 교단은 진리를 우선시 하여 하나님의 법을 바로 세우는 것이 참 기독교적인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라고 가르칩니다. 같은 예로서, 동성애는 분명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죄이므로, 회개가 선행해야 하며,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거나 동성애 신부나 교역자를 세우는 것을 단호히 반대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교단은 초월성과 법을 강조하고 어떤 교단은 내재성과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정통 신학을 유지하는 교단이라면, 그 어떤 교단이라도, 그 교단의 신학을 꼼꼼히 살펴 보면, 한 면이 강조될 수는 있지만, 다른 한 면이 가진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습니다. 동성애에 대한 성경적인 판단은 변할 수 없고, 동성애자들을 향한 사랑의 태도도 유지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신학의 대가로 바르트를 꼽는데, 바르트는 절대 타자(Wholly Other)의 하나님, 초월적 하나님을 매우 강조하여 하나님의 절대 자유를 주장하였지만, 이 자유는 “사랑 안에서의 자유”라고 거듭 확인하였습니다. 교단 신학적 색채에 따라 차이점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런 균형감이 각 교단의 조직신학과 그들의 조직신학자들 안에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들이 현장에서 조직신학적 균형감을 갖기 위해서 목사님은 현장의 목회자들에게 어떤 제안을 하시겠습니까?
저는 성경적, 신학적 혜안을 가진 분들과의 교제나 멘토링을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것이 어렵다면 그런 혜안을 가진 분들이 저술한 책을 읽으면서 균형 잡힌 시각을 배워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각종 주제들에 대해 조직신학적으로 고민하는 독서도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균형 잡힌 신학적 안목에 있어서 많이 배우고 도움을 받았던 개혁파 사상가들로는,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도예벨트, G. C. 벌카우어, 리차드 마우, 코닐니우스 플란팅가, 존 스토트 등등이 있습니다. 또한, 기독교적 저자가 아니더라도, 리차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과 같은 책을 읽으면서 우리의 신관과 비교하며 고민하며 읽는 것도 조직신학적 통찰에 도움을 주는 독서의 일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조직신학적 성찰은 학문이나 책에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현실적 문제들 속에서 고민하며 그것에 대한 답을 성경과 신학에서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발전돼 왔다는 것입니다. 신학의 태두인 바르트도 그런 맥락 속에서 목회자들은 “한 손엔 성경이, 한 손엔 신문”이 들려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조직신학을 하는 원동력과 풍부한 자원은 모두 목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조직신학적 사고를 하는 데에 조직신학 서적보다 목회가 더 큰 통찰을 줄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물론이죠. 신학의 현장은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들을 살펴보면 예외없이, 앞부분에서는 교리를 설파하고 뒷부분에서는 실천을 이야기합니다. 교리는 교회의 현장에서 실천되고 성취되어야 한다는 성격적 예라고 생각합니다. 바르트는 이 때문에 자신의 대표적 조직신학서의 제목을 [교회 교의학](Kirchliche Dogmatik)라고 붙였는데, 이는 그 자신이 자펜벨에서 목회하는 동안 저 유명한 [로마서 주석](1919)을 내놓았을 뿐 아니라, 신학의 현장과 목표가 교회임을 절감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회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로 어거스틴을 꼽습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신학자이지만 무엇보다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된 후, 북아프리카의 히포에서 평생을 목회했습니다. 그의 수많은 조직신학적 저술들은 모두 그의 목회 현장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는 목회를 하면서 겪는 많은 이단들과 문제들에 직면하여, 목회의 연장선에서 신학적인 도전들에 응전으로서 저술활동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신학적인 글들이 대부분 전문적인 논문이라기보다, 설교처럼 쓰여지고 읽혀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6세기 칼빈도 수많은 책을 썼지만, 그 역시 목회 현장 속에서 부딪히는 경험과 문제들에 응답하기 위해 책을 썼습니다. 때문에 그의 [기독교 강요]에는 그가 목회 현장에서 직면했던 신학적 문제들에 대한 답변서의 측면이 강하게 존재합니다. 현대의 존 파이퍼 목사도 신실한 강해설교와 목회 활동 가운데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괄목할 만한 책들을 써서, 자신의 목회의 신학적, 실천적 토대를 삼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조직신학적 작업입니다. 이분들의 공통점은 모두 훌륭한 목회자이면서 동시에 조직신학자였다는 것입니다.
이 분들의 목회가 어떤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양적, 건물적으로), 성공한 교회는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분들에게 맡겨주신 목회 현장에 최선을 다하며 신학적으로 늘 진지하고 성실하게 목회를 감당했다는 점에는 이론이 없을 것입니다.
-현대신학은 목회현장을 떠나 너무 사변화되었고 심지어 목회와는 무관한 학문이 되어 버렸다는 비판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프린스톤신학교의 엘렌 채리(Ellen Charry) 교수는 유대인 출신의 여성 신학자입니다. 그녀는 [By the Renewing of Your Minds(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라는 책에서, 현대신학의 딸이지만, 현대신학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갖고, 참된 신학이 무엇인지 제시합니다. 그녀는 사변적이고 상아탑에 갖힌 현대의 신학 경향을 비판하며, 현대 이전의 신학은 궁극적으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조각하고 덕을 함양하는 목회적 신학이 아니었냐고 질문합니다. 신학의 진정한 목적은 목회 현장에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함양시킬 뿐 아니라 영성을 높여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학이란 결국 성경 말씀을 통찰력있게 해석하고 그 통찰력으로 성도들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시켜 덕을 함양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기에 목회와 신학함은 구분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채리 교수의 목회적 신학에 대한 주장에 상당히 공감하면서 이 시대 우리 목회자들이 갖추어야 할 것이 바로 이 목회적 신학, 신학적 목회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해석하여 바로 가르치고(Orthodox – 정통), 하나님이 원하시는 형상과 모양으로 이 땅을 덕스럽게(Orthopraxis – 바른 삶으로) 살아가도록 성도들을 세우는 것이 우리 목회자들의 신학적 과제인 것입니다.
특별히, 신학자요 목회자로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자세는, 바로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 바른 자세로 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거스틴은 신학도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를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신학은 신을 알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인데 하면 할수록 더 모른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는 학문입니다. 그래서 진짜 제대로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더 많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참된 공부는 우리의 무지를 깨닫게 해 주는 것이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 지도록 합니다. 그래서 개혁파적 신학의 전통에서는, 신학함은 단지 이성적 작용에 의한 지적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전과 진리 앞에 서는 작업이라 여겼기에 반드시 기도로서 시작하도록 가르쳐왔습니다. 또한, 우리가 신학을 통해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자신의 죄인됨과 부족함을 발견할 수 밖에 없기에 교만은 불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현대 목회자들이 이런 자세로 신학하고, 이런 자세로 목회한다면, 목회 현장의 갈등은 상당히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목회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겸손히 듣는 신학적 태도로부터 시작하고, 이러한 신 앞의 겸손은, 성도들을 향한 겸손과 인내의 자세로 이어져 목회의 고난을 감당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칼빈과 리차드 백스터, 조나단 에드워즈의 목회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겸손의 태도를 또한 진정한 신학적 목회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결론적으로, 조직신학이 추구하는 신학과 목회는, 오쏘독스(바른 가르침)과 함께 가는 오쏘프락시스(참된 실천)이라고 할 것인데, 참된 신학은 결국, 겸손의 신학이며, 참된 목회도 결국, 겸손의 목회일 것입니다.
-네 목사님. 오늘 인터뷰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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