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의 유리 현상은 한인교회 전반에 걸쳐 과거부터 깊게 제기되어 온 문제다. 한 극단에서는 신학적 지성이 목회 현장의 영성을 제한하는 방해 요소로 취급되기도 하고 또 다른 극단에서는 목회적 열성이 신학없이 표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에 본지는 현재 신학교에서 학업 중이면서 동시에 한인교회에서 목회를 함께 하고 있는 목회자들을 만나 신학의 학문성과 목회의 현장성 간에 일치점을 찾아 본다. 시카고 지역에는 게렛신학교, 노스팍신학교, 루터란신학교, 맥코믹신학교, 무디신학교, 북침례신학교, 시베리웨스턴신학교, 시카고신학교, 시카고대 신학대학원, 위튼대학교, 트리니티신학교 등 다양한 신학교가 밀집돼 있으며 최근 한 통계에서 미국 전역에서 신학생 배출율 1위 도시인만큼 이 문제를 논하기에 좋은 토양을 갖고 있다.

여섯번째 인터뷰는 시카고루터란신학교(LSTC)에서 신약학으로 Ph.D. 과정 중에 있는 이성헌 전도사다. 그의 삶은 신앙과 신학 간의 고민의 연속이었다. 외골수라 할 만큼 보수적 신앙을 지켜 오던 그는 성결교단의 서울신대에서 신학으로 B.A.를 하던 중, 신학과 삶의 상관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에 빠져 그 답을 찾고자 졸업 후, 진보적인 색채를 띤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으로 진학했다. 그곳에서 중국교회에 관한 관심을 갖게 된 후 학교를 중퇴하고 중국 남경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가 여러 곡절 끝에 홍콩 루터란신학교로 진학하게 돼 그곳에서 M.Div.를 마쳤다. 홍콩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신학과 문화의 접목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신앙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기독교가 수용되는 해석의 역사를 문화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성서도 당대 사회 정치 문화 상황 안에서 다각도로 해석되어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그 자세한 배경과 역사를 배우기 위해 성서학 분야에서 권위있는 시카고루터란신학교로 유학해 성서신학으로 Th.M.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성서 해석과 우리의 신앙이 서로 쉽게 닿지 않는 문제에 봉착해, 커뮤니케이션과 정보 유통에 대한 관심을 갖고 뉴저지 뉴브룬즈윅에 있는 Rutgers 대학에서 문헌정보학 분야 중 디지털 도서관을 전공해 석사 학위(Master of library and Information Science)를 취득했다. 그후 다시 시카고로 돌아와 시카고신학교(CTS)에서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동시에 시카고루터란신학교에서 신약학을 전공하고 있다. 현재 그는 “로마 지배체제 하에서 마가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을 갖고 논문을 준비 중이다. 공부하는 기간동안 홍콩제일교회, 뉴저지 길벗교회 등에서 이민목회를 경험한 바 있다.

-요즘 신약학의 추세는 좀 어떻습니까?

편집비평, 역사비평 등을 기본으로 하면서 동시에 성서를 전체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통전성을 강조하면서 성서가 가진 내러티브를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전에는 바울서신을 볼 때, 이 부분은 바울이 쓴 것이고 이 부분은 후대가 삽입해 넣은 구절이란 점을 공부했다면 요즘은 처음부터 끝까지 큰 관점에 입각해 성서를 읽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저는 마가복음을 연구하고 있는데 마가복음을 읽어도 한 구절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마가복음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읽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신약성서 연구분야에서는 ‘제국 연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 나라의 운동 자체가 로마라는 제국적 상황에서 나온 것입니다. 인간이 다스리는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이 통치하는 제국에 대한 열망이 마가복음에 나타납니다. 과거에는 제국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주는 현실감이 적었는데 요즘 국제화 시대를 지나면서 제국이란 말이 현대인의 삶에서 체감되고 있습니다.

-전도사님은 보수신학과 진보신학 사이에서 신앙과 신학의 문제로 오랜 고민을 하셨습니다. 진보적 학교에서 신약학을 공부하면서 어느 정도 해답을 얻으셨습니까?

제 신앙적 질문은 “우리가 하는 신앙과 신학이 왜 삶의 문제, 사회의 문제와 어긋나 있는가”였습니다. 결국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라는 제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기에 이 예수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관한 답을 얻기 위해 신약학을 택하게 됐습니다. 저는 역사적 예수에 관심이 많았으며 시카고루터란신학교에서 공부하며 로마 제국 상황과 예수의 운동을 보게 됐습니다. 이것은 로마 제국에 대한 대안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구약 시대부터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왕으로 나타납니다. AD 70년에는 로마에 대항한 유대인들의 전쟁이 철저한 패망으로 끝나면서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었으며 성전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마가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이야기합니다. 사실 제국이란 것은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힘입니다. 당시 로마라는 거대한 제국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인간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닌 하나님이 지배하는 사회를 꿈꾸며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말합니다.

저는 이 지배라는 개념이 썩 적합한 단어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생명”이란 단어로 바꾸고 싶습니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 안에 있으며 그 생명 안에 모든 존재가 깃들어지면 하나님 나라가 이뤄집니다. 로마처럼 인간이 지배하는 사회는 반드시 패망하게 돼 있으나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다는 것이 마가가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혹시 이 표현이 인간의 노력은 불필요하다는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습니다. 저는 인간의 노력도 필요하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운동의 근원과 주체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가 생명이라든지 하나님 나라 운동 면에서 크게 관심을 갖고 또 기여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저는 Institutionalism이 큰 장애요소라고 봅니다. 기관이나 단체, 조직이 불필요한 것은 아닌데 이것이 있으면 반드시 자기중심주의적이 되고 교리가 생겨나고 그에 따라 교단도 나뉘어지고 자기 교회, 자기 교단이 최고라는 오만에 빠지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내 파, 네 파가 나뉘고 목사와 장로가 나뉘고 내가 무조건 옳다는 자기중심적 생각을 갖게 됩니다. 저는 신앙을 하는 개인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이 속한 교회까지 철저하게 모든 것이 해체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무작정 파괴하자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재검토 하고 건설적인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Institutionalism을 버리고 나면 우리는 창조적인 개방성을 가져야 합니다. 생명은 늘 움직이는 것이고 반드시 세워지는 것입니다. 요즘 영성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이 영성은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도 중요한 주제가 되며 명상, 요가 등의 형태로 수용되고 있습니다. 기독교 영성이 이런 흐름을 간과하면 안될 것입니다. 영성이 건강한 삶과 반드시 연결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새벽기도에 나오고 방언을 받고 은사를 받는 것만 영성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영성의 개념조차 너무나 Institutionalism에 빠져 있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생명력이 넘치는 창조적 개방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생명의 물길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보고 생명이란 것을 다시 발견하게 되면 아무리 못난 인간이라도 그 안에 생명이 있음을 알게 되고 그들을 수용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가 가진 최고의 사명이자 목표는 이런 생명들 간의 관계를 하나님의 순리에 맞게 세워 놓는 것이며 이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과 하나님 나라 운동의 연관성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마가복음 4장에 나오는 겨자씨의 비유는 작은 것이 종국에 가장 큰 것으로 자라며 그곳에 많은 생명이 깃드는 비전을 선포합니다. 로마의 제국주의는 생명의 흐름을 거스르는, 결국 하나님을 거스르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청년과 더불어 시작된 예수 운동은 겨자씨처럼 작지만 뿌리를 내리면 큰 나무가 되고 그곳에 새가 깃들고 생명이 깃들게 됩니다. 예수님이 로마 제국의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말한 하나님 나라 운동의 방식은 그것을 전복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생명체들이 서로를 섬기는 사랑의 방식으로였습니다. 예수는 로마 제국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제국을 이야기하지만, 제국을 다시 힘으로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한 생명의 인식을 통해 모든 생명을 지키는, 쉽게 말해 원수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제국을 꿈꾼 것입니다.

-시카고 지역 교회에서 생명을 존중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 잘 이뤄지고 있나요?

비판적이긴 하지만 잘못하고 있다고 보진 않습니다. 목회를 못하고 싶어 못하는 목회자도 없고 목회자를 괴롭히고 싶어서 괴롭히는 교인도 없습니다. 다만 서로의 차이에 대해 비판보다는 같은 생명으로서의 관계성과 일치성을 찾아가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머리로 “우린 하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간에 연결된 긴밀한 하나임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시카고의 큰 교회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사실 나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잘하는 사람도 있고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것은 모두 내 문제이고 우리가 함께 아파해야 할 문제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강조하는 생명의 운동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현 교회의 문제에 대한 진단 부분이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목회자들의 설교에 있어서 신약학이 이런 방식으로 기여할 길이 있을까요?

현 신약학의 추세는 통전적 접근으로 바뀌고 교리보다는 내러티브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신약에 나오는 많은 사건들을 교리화시키지 말고 삶의 이야기, 생명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나를 따르라”고는 하셨지만 그것은 자신이 왕이 되고자 따르라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운동에 동참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가 따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생명, 그 근원을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표현이 현장 목회에서는 익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리적 언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신학적 언어를 실존적 언어로 재생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문제를 대함에 있어서 신학적 이해와 해석을 우리네 삶의 중간으로 끌어 내려야 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1세기 초대교회에 무슨 기독론이 있었으며 종말론이 개념화돼 있었겠습니까? 당시에 분분하게 해석되던 것은 있었지만 이것은 곧 그들의 삶의 문제였기에 다양한 모양으로 공존하고 있었지요.

-그런 접근은 보수적 목회자나 신학자로부터는 심각한 비판이 예상되는데요?

우리에게 친근한 기독론, 성령론도 모두 인간의 해석학적 산물입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신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성화론을 이야기할 때 우린 바울이 성화론을 교리적으로 정리했다고 보지만 사실 바울이 그것을 교리화한 것이 아니라 바울의 말을 정리한 사람들이 그것을 성화론이라 붙인 것이 아닙니까? 바울이 유대인으로서 이방에 선교하면서 부딪힌 당시의 ‘상황’과 그들에게 신앙을 설명한 ‘방식’이 무관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은 다 무시한 채 그것을 교리화시킬 때, 메시지의 본 뜻은 약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교리적 언어를 버리고 삶의 이야기로 설교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현실에서는 쉽지 않은 방법 같네요.

현실적으로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새벽기도에 나오고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보며 교회가 성장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저도 그런 프로그램이나 조직을 거부하진 않습니다. 다만 그것이 교회를 평가하는 전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 아무리 프로그램을 잘 돌린다고 해도 젊은이들은 교회에 오지 않습니다. 저는 더 많은 신자들이 교회 밖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실존적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 고민에 빠진 신앙인, 불신자를 전도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의 현장으로 다가가는 게 어떨까요? 설교도 교리화해서 이렇다 저렇다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로 끌어 내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자기가 친 그물에 목회자 자신이 구속되는 부자연을 낳게 됩니다. 이런 사태라면 목회도 신명이 나지 않겠지요. 결국 교회 성장을 못 시키면 목회자가 평신도들에게 판단받는 상황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결국 그렇게 해서 얻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생명이 생기가 있으려면, 자유로워야 합니다. 이 말은 ‘억지로 목회’는 이미 그 본심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회자가 스스로 자유스러워 지고자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우린 이질적인 교리와 제도적 구속을 뛰어넘어 창조적인 하나님의 생명 운동에 하나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우리 실존의 이야기가 신앙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요. 성과 속이 실상 구분이 없이 하나가 되는 것이고, 목사는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은 한 인간이 되는 것이지요. 신앙 생활이 우리의 삶의 실존에 맞닿게 하려면, 우린 예수도 그러했듯이, 삶의 중심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자가 평신도를 이해하려면, 그들이 생활전선에서 겪고 있는 이야기들을 몸으로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중 직업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는 목사님을 존경합니다. 결국 삶을 나눌 수 있음으로, 하나의 생명을 경험하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것이 아닐까요. 쉽게 말해, 복음전파죠.

저는 성장을 긍정합니다. 좋은 날들이 천하에 펼쳐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눈에 보이는 성장을 위해 생명의 흐름을 거스르면, 결국 쓰러집니다. 진정한 의미의 성장이 불가능하지요. 예를 들어, 개종과 전도는 다른 말입니다. 개종은 자기 교회, 자기 교단에 저 사람을 가입시키는 것입니다.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전도는 자신이 가진 좋은 경험을 삶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바로 그 사람의 신앙고백이 되겠지요. 예수님도 평생 한 일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고 선포하고 다니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우리의 삶을 나누면서 주변에 예수께서 외친 생명의 운동,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확장시켜 가야 할 것입니다. 생명은 자연스럽게 성장합니다. 생명은 자라나지요. 우리가 억지로 자라나게 할 수 있나요.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면 저절로 자랍니다.

-네. 전도사님. 인터뷰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