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마가복음 9:35)

얼마 전에 미국에서 사온 ‘성령의 열매’라는 책을 읽다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 하나 있었습니다. 단어도 쉽고 문맥도 알겠는데 그 뜻이 도대체 모르겠는 것입니다. 바로 섬기는 것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번역을 중단하고 섬기는 것이라는게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묵상하고 또 책들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유명한 영성신학자인 리차드 포스터가 쓴 ‘영적 성장을 위한 제자훈련’이라는 책을 보면서 그 의문이 풀렸습니다.

1. 섬김의 진정한 의미

사람은 누구나 최고가 되기를 원합니다. VIP가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섬김을 받을 때 기분 좋고 또 항상 그러기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나만해도 그렇습니다. 항상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남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대우받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대접만을 받다보면 내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 버립니다. 항상 내가 대접을 받아야만 하는 최고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암시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마음에 굳어져서 목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고 누군가가 잘 대접을 해 주지 아니하면 기분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했습니다. 유월절 잔치상에 모여서 제자들은 누가 더 큰 자인가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 말은 곧 누가 가장 작은 자인가를 정하려는 의도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야 그 작은 자가 세숫대야에 물을 떠 와서 자신들의 더러운 발도 씻어 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가장 작은 자로 낙인 찍히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다 아시고서는 스스로 세숫대야에 물을 떠다가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

어떻게 보면 이 열두 제자들같이 소위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우리들도 이렇게 섬김을 받으려고만 하지, 낮아지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득권, 이권, 지도력, 권위 이런 것들을 다 버린다는 것이 참으로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완전히 가치관을 뒤집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높아지려거든 낮아지라. 높아 지려거든 남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섬겨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대로 섬기려고는 하는데, 무엇이 진정한 섬김인지 잘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섬긴다’라고 말을 하는데, 그 섬긴다는 것도 종류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섬기는 것에 대한 분명한 의미를 모르면 실컷 섬기고서도 은혜를 누리지 못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리차드 포스터’는 섬기는 행동을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가 있다고 말합니다. 곧 독선적인 섬김과 참다운 섬김이 있다는 것입니다. 독선적인 섬김은 인간의 노력으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참다운 봉사는 마음 속 깊은 곳, 거룩한 다른 분과의 관계에서 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강권 때문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또 독선적인 봉사는 ‘큰 사업’에 감명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섬김의 모습이 소문나기를 바랍니다. 남들이 볼 때도 거창한 봉사에 마음을 쏟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의 그러한 섬김의 행동을 보고 칭찬해 주고 인정해 주기를 원합니다. 물론 이렇게 겸손한 척하면서 말입니다. “뭘요, 아주 작은 정성입니다. 저희들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참다운 섬김은 남의 눈에 보이는지, 보이지 않는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봉사를 더 즐겨합니다. 그래서 숨겨진 채로 만족합니다. 주위 사람들의 칭찬을 바라지도 않고 또 그것을 구태여 원하지도 않습니다. 온전하게 하나님께 맡겨진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 아실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독선적인 섬김은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남들이 결론적으로 나를 어떻게 봐 주느냐 하는 결과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참다운 섬김은 결과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렇게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 자체를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독선적인 섬김은 자신이 봉사할 상대를 고릅니다. 어떤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힘든 섬김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사실상 그만큼 더 칭찬과 인정이라는 보상을 바랄 때 그렇게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섬김은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신에게 닥쳐오는 모든 것들에 대해 그저 묵묵하게 섬겨나갈 뿐인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독선적인 섬김은 기분에 의해 좌우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로 성령에 감동되어 섬기는 것 같지만 사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봉사할 기분이 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거나 몸이 피곤하면 웬만한 봉사의 일은 뒤로 밀쳐지고야 맙니다. 그러니 일시적으로 섬길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참다운 섬김은 오히려 봉사를 하면서 기분을 훈련시켜 나갑니다. 그렇기에 참다운 봉사는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굳혀집니다.

이러다보니 독선적인 섬김은 오히려 공동체에 피해를 끼치고 파괴할 수 있습니다. 좀 더 냉철하게 분석해 보자면 종교적인 허울이나 가면을 다 벗기고 나면 결국은 개인의 영광에 초점을 두고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자기 의가 드러나는 봉사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참다운 섬김은 무너져가는 공동체를 다시 회복시켜 줍니다. 다른 사람에게 봉사를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치마 폭으로 들어오도록 만들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결국 예수님의 마음으로 섬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만이 드러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참다운 섬김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누구든지 뭔가 일을 했으면 거기에 상응하는 댓가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마땅히 그러기를 원합니다. 육신은 당연히 명예와 인정 받기를 갈망합니다. 그래서 드러나는 봉사를 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육신의 욕망을 못에 박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만과 자존심까지도 불로 다 태워 버리라는 것입니다. 요한 1서 2장 16절에 보면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좇아 온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안목의 자랑이라는 것은 자신의 외적인 면에 사로잡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생의 자랑이라는 것은 겉치레하는 이기주의를 가르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것들이 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렇게 참다운 섬김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자꾸만 독선적인 섬김을 하기를 원하는데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러한 육신의 정욕에 이끌리지 않을 수가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자세로 나아가야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예수님은 이 땅에 군림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느니라”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을 가르치거나 지시하는 분이 아닌 섬기는 자로 함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해가 가면서도 이 말씀이 무슨 말인가 하고 의구심을 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섬기는 분이시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알 듯 모를 듯한 말씀으로 제자들이 가질 수 있는 의문을 확실하게 봉쇄해 버립니다. “누구든지 제일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가장 낮은 사람이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을 섬긴다’는 말씀에 우리는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섬기라’는 것이 과연 무슨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섬긴다는 것을 영어로는 Serve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9장 36절의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의 영어는 Serve하라고 하질 않고 NIV 영어 성경에 보면 “the servant of all”이라고 번역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servant라는 것은 바로 ‘종’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번역이라는 것입니다. ‘리차드 포스터’는 이러한 섬긴다는 말과 ‘종’의 개념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기를 선택하는 것과 종이 되기를 선택하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내가 지금 칼자루를 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누구를 섬길 것이며, 언제 어느 때에 봉사해야 할지 그 결정을 내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이 되고자 선택했을 때에는 우리가 주도권을 포기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주도권을 포기함으로써 자유함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용당하기를 스스로 선택한다면 조종당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종이 되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누구에게, 언제, 어느 때에 봉사할 것인가를 결정할 권리를 포기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노예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노예가 강제적일 때는 기분 나쁘고 자존심 상하는 것이지만 스스로 원하는 노예라고 생각한다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섬긴다는 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마음을 다하여 내가 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발적인 노예의 상태를 우리는 ‘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섬긴다고 말할 때는 이러한 종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섬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바로 그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들의 종이니라”내가 종이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사랑을 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저 엎드리고, 그저 나보다도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2. 누구를 섬겨야 하는가?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누구를 섬겨야 할까요?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을 섬기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이해가 되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목사를 가리켜 ‘주의 종’이라고 하는데 사실 목사만 주의 종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귀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6절 말씀이 이를 가르쳐 줍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者)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貴)히 여기시리라”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종만 되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낮아지라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쉽지 쉽게 되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선 내가 남편의 종이 된다? 아내의 종이 된다?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저의 경우를 좀 설명해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부부가 오래 전에 이혼의 위기를 겪을 때까지 내 마음을 지배했던 것은 “저 사람이 문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저는 그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가정사역을 하고, 또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나서의 생각은 “역시 내가 문제다”는 생각이 들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마음 속으로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되니까 그 다음부터는 모든 일에 있어서 아내를 배려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옛날 같으면 내가 알아서 다하고 나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게 되지만,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 온 다음부터는 그저 아내를 생각하게 되고 아내가 우선이 되는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사랑하고 나니까 내가 아내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아내의 종이 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기분 좋은 종이 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저만 그런게 아니었습니다. 어느 순간엔가 보니까 아내 역시 남편인 저의 완전한 종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아내는 나를 이렇게 부릅니다. “주님, 이제 오시나이까?”, “주님, 주님께서 원하는 대로 하시옵소서!”바로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내가 종 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내가 아내를 사랑하고, 우리 가족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사랑한다면 내가 그들의 종이 되고, 그래서 그들을 섬긴다는 것은 결코 기분 나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다 보면 그저 무릎을 꿇게 됩니다. 가슴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주체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우리는 이웃을 다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다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미국 하버드 대학 교수였던 헨리 나웬 박사가 갑자기 교수직을 사임하고 정신 박약아 수용시설인 데이 브레이크 복지원 직원으로 들어가서 여러 가지 허드렛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신학계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신학자 중 하나이며.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던 학자였던 헨리 나우웬. 그의 저서 20여권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
그가 높은 보수와 명예를 보장하는 하버드 교수직을 버리고 정신 박약아 시설에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박아들의 용변을 치우고, 목욕을 시키고, 식사를 돕고, 행동 교정 지도를 하는 등 구질구질한 일을 하는데, 고생은 물론이지만 생계유지도 어려울 정도의 낮은 보수에 아주 만족해 했다고 합니다.

모두들 “왜 그러느냐”라고 물었을 때 그는 몇 개월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얇은 책을 써서 그 마음을 대신했습니다. 헨리 나웬 박사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동안 나는 올라가는 길만 추구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 천재신동이라 추앙되고 하버드 교수에까지 올라왔습니다. 나의 저서 20여권은 뭇 사람의 인기를 얻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오직 성공을 향해, 즉 꼭대기를 향해 오르막길만 추구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정신 박약아 아담 군을 만났을 때, 이런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는 내리막길을 통해서 예수를 바로 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르막길에서는 예수가 안보였지만, 내리막길에서 복음서에 나타난 진정한 예수를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치료하는 자도 아니요, 화해자도 아니요, 생명을 주는 자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돌보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요, 깨어지고 연약한 자들입니다. 우리의 제한적이고 매우 조건적인 사랑이 하나님의 무제한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여는 통로가 되도록 우리가 택함을 받았다는데 바로 목회의 신비가 있는 것입니다”

헨리나웬 박사는 또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되는 것이 더 쉽고, 사람들을 사랑하기 보다는 사람들을 컨트롤하는 것이 더 쉽다.” 여러분, 헨리 나웬 박사처럼 사람은 성공했을 때 남을 섬기는 자리로 낮아질 수 있다면, 바로 그 때.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신다면, 진정으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마음으로 나의 이웃들의 종이 되십시오. 마음을 다해 우리의 이웃을 섬기는 하나님의 종들이 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예 내가 저 사람들의 종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내가 뭐 받을 것도 없고, 그런 것 계산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고린도전서 9장 19절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진정으로 우리의 이웃들을 섬길 때,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말로 낮아지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섬겨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낮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아주 어려울 것 같지만 아주 쉬운 방법들이 있습니다. ‘리차드 포스터’는 우리가 종되는 방법에 대해 여러 가지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우선 숨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제레미 테일러’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감추어지고 적게 칭찬받기를 좋아하십시오. 찬양 없는 것에 만족하고 그대가 가볍게 다루어지거나, 과소 평가 당할 때에 괴로워하지 마십시오.”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사실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꼭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아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저 섬기는 마음으로 열심히 봉사하다 보면 그 일들로 인해 세상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아주 작은 일로도 얼마든지 이웃을 섬길 수가 있습니다. 내가 조금만 더 손해 보면 됩니다. 내가 조금만 양보하면 됩니다. 운전하고 가면서도 내가 먼저 기다려 주면 교통이 좋아집니다. 제가 미국이나 호주같은 외국에 갈 때마다 참 부러운 것 중의 하나가 외국 사람들은 그렇게도 양보를 잘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쓸데없는 양보까지 하고, 손도 흔들어 주고 웃어 줍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부러운지 모릅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 같지만 그것이 서로를 섬기는 아주 기본적인 행동인 것입니다.

대접하는 봉사도 있지요?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하라고 권면합니다(벧전 4:9). 성도끼리 서로 대접하는 일은 얼마나 보기 좋은 일인지 모릅니다. 꼭 성도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이웃에게 대접하는 일 역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 것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잘 들어 주는 것도 훌륭한 봉사입니다. 그저 그 사람의 마음이 되어 잘 들어 주는 것. 그렇게 잘 들어 줄 때 치유도 일어나고 하나님의 역사도 일어나는 법입니다. 서로 짐을 지어주는 봉사도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2절에 보겠습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가장 중요한 봉사는 생명의 말씀을 서로 나누는 봉사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를 다른 사람과 자꾸 나누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함께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훌륭한 봉사인 것입니다.

4. 결론은 사랑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의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한 봉사를 하고 섬긴다는 것은 사람을 힘들게 하고 또 지치게 만듭니다. 그러나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섬김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오히려 힘이 나게 만듭니다. 감격하게 만듭니다. ‘암스트롱’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하나의 촛불로 다른 초에 붙이려고 할 때 빛을 나누어준다고 해도 잃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불은 나누어 주어도 잃지 않고 오히려 그 밝기가 두 배로 늘어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어두운 구석구석에 나누어 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수 세기 전, 잠언서의 저자는 영감을 받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주님의 등불이니라”

자신이 아무리 부족하고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더라도 관계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비쳐지는 우리는 매우 중요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빛은 아무리 작더라도 빛으로서의 역할을 다 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곳을 환희 비치는 역할을 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지난 주에 남녀 선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2주 내에 각 부서에서 봉사하게 될 책임자들을 임명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 여러분에게 꼭 이것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십시오. 정말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사랑의 마음으로 성도들을 섬기십시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 교회는 참으로 복된 교회가 될 것입니다. 정말로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로 인하여 교회 구성원들이 치유 받고 은혜 받는 귀한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저 “나는 종이로소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헌신할 수만 있다면 그러한 여러분들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실 것이고, 여러분들을 향해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하실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추부길(웰빙교회 담임목사, 한국가정사역연구소 소장,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