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9일부터 강의를 위해 저는 처음으로 싱가포르를 일주일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강의는 저녁에만 있었기 때문에 낮에는 싱가포르 이곳저곳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저를 초청해준 친구와 더불어 보행자들만을 위한 길이 15m 내외의 작은 터널을 걸어서 지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터널 입구와 출구 양편에 경고판이 큼지막하게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런 경고판은 싱가포르 시내에서 가끔 볼 수 있었지만 보통 때는 차를 타고 다녀서 자세히 볼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내용이 적혀있는가 싶어서 경고판을 자세히 보니 자전거를 탄 사람도 터널 안에서는 반드시 내려서 끌고 가라고 적혀 있었고, 놀라운 것은 이것을 어긴 사람에게는 1000달러의 범칙금을 부과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혹시 100달러를 잘못 읽었는가 싶어서 다시 봤지만 틀림없이 영이 세 개 붙어 있었습니다. 현재 환율로 1싱가포르 달러가 1000원 정도임을 생각한다면 작은 터널에서 자전거를 내리지 않고 타고 간다고 해서 범칙금 100만원을 부과하는 셈이었습니다. 과연 이 법을 누가 지킬까요?

궁금해 하는 터에 껄렁패처럼 생긴 20세 전후의 건장한 서양 청년 두 명이 자전거를 타고 빠른 속도로 터널에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나 보니 터널까지는 신나게 달려 왔으나 입구에서는 급히 자전거에서 내려서 뛰어 터널을 통과하고는 다시 부리나케 올라타고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감시하는 사람도 없이 범칙금 표시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지만 사람들은 마치 누가 감시하는 것처럼 법을 잘 지키고 있었습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싱가포르에서는 길거리에서 담배꽁초나 껌 따위를 버려도 범칙금이 엄청나다고 합니다. 횡단보도가 아닌 곳에서 길을 건너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가히 범칙금 왕국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하지요.

처음 싱가포르 창이공항에 내릴 때는 이런 범칙금 왕국에 입국한다는 생각 때문에 내심 좀 긴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딱 하루를 그곳에서 지내고 보니 어쩌면 이렇게 편리한 나라가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범칙금이 많다고 해도 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담배꽁초는 버리지 않으면 되고, 횡단보도가 아닌 곳에서는 길을 건너지 않으면 됩니다. 게다가 건강에 그렇게 해로운 담배를 왜 비싼 돈을 주고 피웁니까? 조금만 움직이면 곳곳에 횡단보도가 있는데 구태여 목숨과 “재산”을 걸고 차도를 건널 이유가 뭡니까?

저는 싱가포르에 불과 1주일밖에 머물지 않았지만 쾌적하고, 질서 있고, 깨끗하고, 친절하고, 아름다운 도시환경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1인당 국민소득이 캐나다에 버금가는데 물가가 싸고, 대중교통이 편리할 뿐 아니라 전 세계 대도시 중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습니다. 실제로 500여만 명이 살아가는 대도시지만 살인사건이 몇 년에 한번 정도 날까 말까 하다는 얘기를 친구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래서 살인사건이 한번 나면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전 세계 기업들은 물론 각종 국제기구나 NGO, 심지어 기독교 단체들까지 싱가포르에 국제본부나 아시아 본부를 설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싱가포르를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저는 지난 1월 20일, 용산에서 일어난 참사를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용산 참사는 용산 재개발 항의 농성장을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저항하던 농성자들이 시너를 뿌리고 화염병을 던지는 통에 화재가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경찰 1명을 포함하여 농성자 5명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다친 사건입니다. 농성 과정에서 농성자들은 복면을 착용한 채 LPG 가스통, 염산병, 화염병, 벽돌, 새총, 골프공, 유리구슬 등으로 경찰에게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도대체 법치가 기본이라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어난 이 일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용산 참사는 여러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만 우선적으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희생자들이 법 테두리 내에서 행동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인화성이 극히 강한 시너를 뿌리며, 화염병과 벽돌을 던지고,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는 새총을 쏘아대면서 경찰에게 저항한 것을, 그래서 여러 경찰관들이 죽거나 다친 것을 어떻게 정당화 할 수 있을까요? 민주주의 국가에서 경찰에게 폭력으로 저항하는 것은 아무리 억울한 사연이 있더라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인권이라고 하는 것도 법 테두리 내에 있는 사람들이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죄수들에게도 인권이 있지만 그들의 경우에도 형을 집행하는 교정 당국의 권위에 순복한다는 전제하에 인권이 존중되는 것입니다.

이번 용산 참사의 경우, 희생자들이 공권력의 요구에 순순히 응했는데도 경찰이 저들을 살상했다면 과잉진압이나 인권침해라고 비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국민을 보호하는 합법적인 공권력에 폭력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인권을 운운하는 것은 말이 되질 않습니다. 아무리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법 테두리 내에서 요구를 관철해야 합니다. 어느 나라의 법도 완전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나라의 법도 완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우리나라의 법이 일제 시대나 군사독재 시대의 법은 아닙니다. 우리는 더 이상 불복종과 저항이 미덕인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정부가 용산 재개발 사업을 민간업체에 맡겨서 그곳에서 오랫동안 생활터전을 이루고 살던 사람들이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주장도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정부의 재개발 정책이 바르지 않다고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억울함을 해결하고 부조리한 법을 개정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으며, 실제로 우리 사회에는 그런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물론 쉽지는 않지만) 적법한 길이 열려있습니다. 이제는 어떤 경우에도 문제를 폭력으로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가난함과 억울함도, 약자라고 하는 동정심도 더 이상 폭력을 정당화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만일 캐나다나 미국에서 경찰의 경고를 무시하고 화염병을 들고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경찰이 총을 들고 진압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40여 년 전 폭력적으로 월남전 (특히 미군의 캄보디아 진격에 대해) 반대 시위를 하던 켄트주립대학 시위대에게 발포했던 미국 정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미국 경찰은 여러 차례 해산 명령을 내렸지만 시위대들은 캠퍼스 내 ROTC 건물을 불태우며, 공권력에 저항했습니다. 여러 차례의 해산 명령에도 응하지 않자 결국 닉슨 대통령은 발포 명령을 내렸고, 1970년 5월 4일, 긴급 투입된 오하이오 연방 방위군은 시위대에 발포했습니다. 그로 인해 4명이 죽었고 9명이 다쳤습니다. 켄트주 대학살(Kent State Massacre)로 불리는 이 사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하고, 기록을 남기긴 했지만 지금까지 아무도 대통령이나 정부에 형사적인 책임을 묻지는 않았습니다.

용산 참사를 대하면서 우리 국민들이 권위에 대해 유난히 저항적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된 데는 역사적 이유가 있습니다. 과거 일제 치하에서는 공권력에 불복종하는 것이 조국을 되찾기 위한 애국적 행위였습니다. 군사독재 시절에도 정부에 저항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위한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합법적으로 선출된 지도자들이 나라를 이끌고 있는 지금은 그 때와는 전혀 사정이 다릅니다. 물론 현 대통령이나 정부의 정책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만 그것은 후에 폭력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표로 심판해야 합니다.

저의 이런 주장에 대해 어떤 분들은 제가 부자들의 편을 든다고 오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글은 강자, 약자를 떠나 모두가 법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부자들의 불법에 대해서는 귀가 아프도록 들었습니다만 약자도 불법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흔히 정의감이 있는 사람들은 심정적으로 약자를 선(善)이라 생각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을 선(善)이라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이것은 진실이 아니고 정의가 아닙니다. 법은 원래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일차적인 정신이며, 모든 사람에게 공평해야 합니다. 법이 지켜지지 않아서 사회적인 혼란이 야기되면 먼저 약자들이 피해를 입습니다. 사랑과 공의는 손바닥의 양면처럼 함께 가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이번 사건에서 용역업체들을 동원해서 폭력을 행사한 개발업체들에 대해서는 준엄한 법의 심판이 필요하며, 철거민들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이루어지도록 국민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사회의 치안을 유지해 달라고 권위를 위임해 준 경찰을 처벌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 정부는 합당한 보상을 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 정책적 실수에 대해 비난 받아 마땅하지만 경찰은 (다소 아쉬운 점은 있을지 모르나) 기본적으로 자신들의 책무를 다했다고 봅니다. 저는 이 나라, 저 나라에 살아보면서 정말 이 세상에는 어디에도 완전한 법이 없고, 완전한 나라가 없음을 발견합니다. 민주주의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은 경찰보다는 용산 희생자들의 편을 드는 글이 훨씬 더 인기가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약자의 편을 들어준다고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자신이야말로 정의의 화신인 듯이, 약자의 대변인인 듯이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긴 안목으로 대중들에게 아첨하지 않고, 진정으로 이웃과 조국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샬롬을 이루는 길인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용산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고 정부를 규탄하는 것을 멀리서 TV로 지켜보면서 저는 정말 답답함을 느낍니다. 법치는 민주주의의 기본이며, 공권력을 존중하는 것은 국가의 안위는 물론 우리 스스로를 지키는 가장 기본적인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검찰이 경찰의 과잉 진압에 대해 형사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다니 안심이 됩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민주 조국에서 공권력에 폭력으로 저항하다가 죽은 사람들을 두고 야당은 정치공세를 하고, 국민들은 정부에 항의를 하며, 대규모 추모집회를 한다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국가 권위의 상징인 국회 의사당 문을 해머로 부수고 난입하는 국회의원들이 형사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더 부끄럽긴 하지만... 용산 참사로 인해 온 나라가 시끄러운 이 때 새삼 작은 도시국가 싱가포르가 부러운 것이 저만의 생각일까요?

/양승훈 교수(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원장, www.view.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