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에 요한복음 21장을 통해 복음과 죄악의 연결고리 네 가지를 보았다. 첫째, 삶의 현장에서부터 예수그리스도와 연결하는 고리가 되어 내 삶의 터전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다. 둘째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믿음을 기억하고 주님을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이로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모셔야 한다고 했으며, 셋째로 항상 어린아이 같은 심정으로 주께 능력을 간구하며 살아야 된다고 했다. 넷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건져 올리는 인생을 살 때 인생과 가정이 찢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요한복음21:7)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는데 빈그물이었다. 주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잡혔다. 주의 사랑의 제자가 요한 사도. 요한이 그 이야기를 듣고 급히 주시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성미가 불처럼 급하다. 8-9절 보면 다른 제자 보면 가만히 있는다. 성미 급한 베드로가 먼저 물속에 뛰어든다. 그 와중에 평소 베드로 같지 않는 행동을 한다. 윗옷을 벗어놓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예수님이 말하니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 속에 뛰어들었다. 어떻게 베드로가 겉옷을 입고 예의를 갖추었을까.

예수님과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을 한 후 식사가 끝난 후에 그 유명한 주님이 세족식이 있었다.. 발을 씻어 주셨다. 져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겉옷을 벗으셨다. 그리고 수건으로 씻으셨다. 이 때가 계절적으로 4월 달이다. 굉장히 더웠을 것이다. 그리고 12명의 제자들의 발을 씻엇다. 이 후에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친구가 아니라 스승이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집중하다가 일을 멈추면 땀이 난다. 스승이신 예수께서 구태여 제자들 앞에서 겉옷을 입지 않아도 된다. 그 더우신 상황 속에서 제자들 앞에서 겉옷을 입고 예의를 갖추셨다. 베드로는 그것을 기억한 것이다. 이 성미 급한 베드로가 주님의 하신 대로 겉옷을 두르고 주님께 나아갔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예의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믿음은 하나님의 대한 예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대한 예의는 우리의 예배를 통해서 절정에 다다른다. 우리와 부모님과 관계를 보면 식탁에서 편안히 앉아서 이야기 나눌 수 있다. 서로 잠옷을 입고 친구처럼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생신이거나 신년, 추석. 내가 먼 길을 떠난다면 우리는 부모님에게 예의를 갖춘다. 부모가 자식에게 잘한다고 친구처럼 계속 지내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일주일에 한번 예배를 드리는 시간을 하나님과 집에서 만나는 것과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의를 다해서 하나님께 예배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왜 예배라 불리는가. 예배의 본래의 말뜻이 히브리말로 부복한다는 것이다 유대인은 예배를 그렇게 받아드렸다. 그 경배라는 것은 노예가 발등에 입을 맞추는 것. 우리나라에서 예절을 다해 예배를 드릴 때나 큰절을 올릴 때 예의를 갖추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절을 받는 사람만 볼 수 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예배 드리는 나는 없어지는 것이다. 그 시간은 하나님만 드러나는 것이다.

레위기 제사를 보자.
(레위기1:1-2) 1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2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찌니라

2절에 누구든지가 주어이다.

3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없는 수컷으로 회막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찌니라 4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찌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4절에 그가 제사 드리는 사람이다. 안수할찌니.. 그를 위하여 속죄할 것이다.

제물 머리 위에 놓고 안수해라. 죄의 전가이다. 내가 손을 놓고 기도하는 순간, 기도하는 것이다. 내가 이런 죄를 지었다고, 나 대신 제물을 받칩니다. 지금 그 상황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5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문 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5절에 그는 제사 드리는 사람이다.

구약시대의 제사를 어떻게 생각했나. 내가 제사를 드릴 때 내가 제사를 머리 위에 안수하고 제사 드리는 그가 제물을 잡으라는 것이다. 잡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칼로 목을 치라는 것이다. 5절에 보면 제사 드리는 자가 송아지의 목에 피가 나면 피를 받아다가 뿌리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내가 죽는 다는 것이다. 나 대신 제물이 죽는 것이다.

6그는 또 그 번제 희생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그는 가죽을 다 벗긴다. 그리고 각을 뜬다. 그때에 심정을 느껴보자. 죽어야 할 제물을 놓고 내가 내 속의 모든 죄까지 하나님 앞에 다 회개한다. 제사 드리는 것을 직접 드리라고 하는 것은 이런 심정을 느끼라고 그런 것이다.

7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단 위에 불을 두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제사 드리는 자가 나무를 놓고 불로 태우는 것.

8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단 윗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9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찌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겉만 불태우는 것이 아니라 내장까지 물로 씻은 다음에 불로 태운다. 제사 드리는 사람이 자기 손으로 씻는다. 내 속 오장 육부까지 다 내어놓는 것이다. 나의 죄를 놓고 제사 받으시고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이다.

칼을 들고 제물을 치니 피가 틔었을 것이다. 온 몸이 냄새투성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죄 사함을 받았다는 큰 기쁨이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있을 것이다. 그런 죄사함을 받은 사람이 세상 나가서 죄를 짓을 수 있겠나.

우리가 주일 성전에 나올 때 죽으러 오는 것이다. 내 영의 각을 뜨는 것. 저 말씀을 볼 때 하나님 제가 보고합니다. 내 삶의 현장에 나는 없고 하나님의 말씀만 드러나게 해주십시요.라는 심정으로 나가야 한다.

요즘 많은 성도들이 목사님의 말씀을 감상한다. 죽지 않는다. 우리 각자가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죽어져야 한다. 말씀 앞에서 죽어져야 한다. 그럴 때 이 시대의 진정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설교 제목 기억 나시는 분이 있나? 없을 것이다.

지난 주일. 여러분들이 정말 예배를 드렸다면 일주일의 푯대삼고 살고 그 말씀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번 주부터 교회 갔다 오는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 붙들고 살기 바랍니다.

요한복음21:8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우리 평생을 살다 보면 밤샘할 때가 있는데 그 밤샘이 계속된 밤샘이면 반드시 새벽참을 준비해야 한다. 계획 없이 밤샘하면 새벽에 배가 고프죠. 예전에 노름하면서 밤을 많이 새봤다. 지금 본문에서는 이 제자들은 밤새도록 빈 그물을 던졌다. 생선 그 옆에 떡도 있다. 음식을 보는 순간에 아마 시장기가 돌았을 것이다. 그 음식을 먹을 생각을 안했다. 왜냐하면 그 음식이 거기에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다.

12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준비한 것. 제자들이 욕망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라고 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먹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밤새도록 주님이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이 정성껏 주님이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떻게 그것을 바로 먹을 수 있었겠는가. 예수님은 즐기시지 않았다.

12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주신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생선으로 그와 같이 하시리라. 자기 부끄러움에 손을 대지 못하는 제자들을 위해서 주님은준비하신 생선과 떡을 가져가셔서 아이들아 먹으라고 하신다. 참 봉사와 본을 보이셨다. 헬라어로 봉사를 다아코니아. 디아코너스에서 파생되었다. 그런데 이 디아코너스라는 것은 본래 식사를 의미하지 않는다. 교회에서 우리는 집사를 보통 직분으로 생각한다.그러나 본래의 뜻은 원해서 봉사하는 사람이다. 종과 섬기는 자와 같은 것이다.

본래의 뜻에 더 정확하게 번역하기 원했다. 집사라는 말은 식탁을 차리는 말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이 정성껏 식탁을 차렸다. 음식을 준비하고 그 음식을 우리 안에 가져온다. 주방장이라면 주인이 아니다. 서비스하는 봉사자라는 것. 미국의 삶. 성경의 삶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봉사는 그 댓가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식탁을 차리시대 댓가를 받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흔히 어머니의 사랑을 식탁을 차리는 것에 비유한다. 어머니는 음식 차릴 때 자기 입맛에 맞추지 않는다. 남편과 아이 입맛에 맞게 차린다. 어머니는 가족들에게 서비스를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가 나이 들어서도 어머니만 생각하면 마음이 뭉쿨해지는 이유는 그것이다. 간혹 어머니가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라고 하는데 그것은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럴때 대가를 요구하기에 관계가 틀어지게 된다.

참된 교회는 평생 봉사하면서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교회이다. 오늘날 교회는 많은 봉사자가 있지만 봉사할수록 교회의 스포트라인을 받고 싶어 한다. 교회에서 봉사하지도 않는 사람은 문제도 안일으킨다. 봉사하는 사람이 열심이다. 봉사하는 사람이 무엇인가 바라기 때문이다. 진정한 봉사는 내가 최선을 다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먼지밖에 안된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봉사가 했는데..라며 과시하는 순간부터 교인과 교인관계가 뒤틀리게 된다.

소리 없이 우리 어머니들이 우리를 위해 봉사하듯이 내가 주님의 마음으로 나갈 때 주님께서 마음을 터치 하신다. 주님의 터치가 생기면 더욱 더 열심으로 봉사하게 된다.

12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주신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이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던 사람. 불평, 원망으로 가득 찼을 것. 지금 주님을 만났을 때는 당신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구태여 당신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눈으로 보았다. 주님을 내 눈으로 보고 있으니 의문이 없어졌다. 믿음은 주님을 향한 시선이다. 내게 많은 신앙적인 갈등이 있다면 내 문제만 바라볼 뿐 주님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을 보면 모든 질문은 해소된다.

예전에 단군교란 종교가 있었는데 그 교주가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확실히 바뀐 것이다. 명색이 대한민국 단군교 교주인데 이분이 그것을 버리고 자기 손으로 단군교 성전을 없애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없애지 못하는가. 사람이 그린 단군 그림을 못 없애는 것이다. 그래서 도움을 청해서 내가 갔다. 불로 태우는 데 불이 다 탈 때까지 옆에 그 회개한 교주다리가 떨리는 것이다. 그 사진을 평생 섬기고 그 그림을 보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이론으로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사도바울 이후의 20세기 기독교 최고 변증가라 불리우는 영국의 루이스는 ‘그리스도인은 그분을 바라보는 때에만 그리스도인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에 100% 동의한다.

노아방주에는 세상의 모든 짐승이 있었다. 모든 짐승과 새들의 양식을 준비하라고 하셨다. 매일 밥 줘야 한다. 그 방주에 1년 동안 지내면서 짐승의 우는 소리와 새들이 우는 소리를 생각했다. 오래 지나면 굉장히 고통스러워질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매일 오물을 쌀 것이다. 그 악취를 생각해보자. 이것이 한두달도 아니고 1년 17일이다. 노아의 방주는 절대로 천국이 아니었다. 왠만한 사람이 아니면 정신병자가 될 수 있다. 어떻게 그들이 견딜 수 있나. 방주의 구조. 창6:16에 위에서 중하로 할 것이니라. 창문은 딱하나. 천장 위에 있었다. 문은 옆에 그 방주에는 옆에 창문이 없다.

노아 식구들이 세상을 보았으면 그들은 미쳤을 것. 창은 천장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그들로하여금 세상 밖을 못 보게 하셨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천장의 시선을 통해 하나님께 고정시켰기 때문에 그들은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낼 수 있었다. 어떤 교인이 좋은 교인인가. 자기 영혼을 하나님께 집중하는 사람이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 그럴 때 세상에서 무엇이 크고 작은지 무엇이 길고 짧은지 모든 것을 명료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14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지금까지 죽 살폈던 일이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것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부활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복음서 어디를 읽어도 부활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다.
요한복음 11장 25절에 예수님께서 말씀을 직접 인용할 때 딱 한번 썼다. 사흘째 되는 날에 부활이란 말을 2천년 전 헬라어를 사용했던 사람은에게 부활을 이야기 할 때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부활이 없다는 것. 둘째는 부활은 정서에 따라 삼천리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통해서 헬라인들이 부활이란 단어를 썼다.

누가복음24:5-6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마태복음도 마찬가지. 마태가 죽은 자 가운데서도 살아나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가운데 부활을 사용하셨다. 죽은 자로 번역이 된 것이다. 그 헬라 말은 그대로 번역하면 시신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것.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있었던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믿는 것 같은데 삶 속에서 안 믿는 것이다. 불과 몇 주 전에 한 집사로부터 상담을 했다. 자신의 절신한 친구가 목사님이다. 그 목사님의 아들이 천재라고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모든 한국 최고의 명문대학에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지난 여름 방학 때 교회 수련회에 갔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그 이후로 그 목사님이 아무 일도 못하게 되었다. 당신의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머리로는 믿는다. 그분께서 시체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지 못한 것이다.

내가 사는 합정동 앞에 선교사 무덤이 있다. 한국에서 묻힌 분들이 성지이다. 개신교 최초의 성소이다. 예전에 후지산에 항공사가 추락한 적이 있다. 한 아버지가 그 비행기 추락사고로 두아들을 잃었다. 졸지의 두 아들을 잃은 이 아버지의 억울함이 얼마나 큰아픔인가. 하지만 아들의 죽음을 받아드렸다.

똑같은 아들의 죽음을 가지고 아버지들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나는 받아들여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하나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참함에 빠졌다. 생명은 거창하지 않다. 생명은 숨을 내쉬고 받아들이는데 있다. 우리는 이 육체를 가지고 있는 가운데 주님을 위해서 시체가운데 사는 것이다.

제가 어제 2년 만에 한 교우님으로부터 한 은혜로운 말씀을 들었다. 몇 년 전에 그 교우가 병으로 살아날 보장이 없었다. 마침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천상병의 소풍이라는 시를 생각이 났다고 한다. 시를 생각하면서 ‘인생이 소풍 왔다가 돌아가는 것이지요, 앞으로 기회를 주시면 오직 하나님만 위해서 살겠습니다.’라고 주님께 기도하였다. 이제 기쁨으로 주님께 돌아갑니다.라고 말이다.

그분은 주님을 받아들이신 분이다. 그래서 그분은 수술을 거쳐서 생명을 받았다. 여러분 시체가운데 사는 주님이 나의 주님이 되지 않는다면 세상 따로 주님 따라 이중선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왜 무덤을 땅 안에 묻는 것인가.

로마의 토지의 특성가운데 기인한다. 일단 한번 파고 그 흙이 잘 파지고 시체의 모든 냄새를 억제하고 몸의 모든 것이 자연으로 흡수된다. 그 어떠한 방식보다 훨씬 더 위생적이다. 초대교우들은 그 지하 묘실에서 예배를 드렸다. 시체가운데 살아계신 아버지께 예배를 드린 것이다. 시체가운데 주님을 경배할 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다.

사랑하는 교우들. 우리가 예배드릴 때 우리의 예쁜 모습만 보지 말고 우리 시체 가운데 나 자신을 발견함으로 시체가운데 살아계신 그분을 발견하고 그분과 동행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