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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역사는 신학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 한다. 이는 마치 영혼과 육체의 관계 같기도, 근육과 뼈대의 관계 같기도 하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생각이 정리되고 통일되어가는 과정 속에 교회의 모습도 변해왔다. 반대로 때마다 변화해온 교회의 모습 때문에 신학도 그에 발맞춰 변해왔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신학사를 공부할 때 중요한 점은 통일(합의)과 변화, 즉 진리의 보편성과 그에 대한 해석의 다양성이 부딪히며 생기는 역동성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책에서 이 역동성을 특정 신학에 대한 과도한 칭송이나 비판을 자제하는 신중한 서술을 통해 드러낸다. 또 한 가지는 책의 분량이다. 같은 진폭의 파동도 파장을 계속 늘리면 점점 직선에 가까워지며 에너지가 작아진다. 반대로 파장이 짧아질수록 에너지는 커진다. 저자가 이 원리를 생각하며 책의 분량을 이토록 적게 가져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짧은 분량 때문인지 이 역동성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이 책의 원제가 Pocket History of Theology이다).

이 역동성을 느끼게 해주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는데 바로 '이야기'다. 명제가 아닌 이야기 말이다. 얇은 분량에 2천 년 신학사를 다 담아야 되니 각 시대를 간결하게 정의 내려가며 썼을 법한데, 저자는 그 시대의 중요한 한 두 사건과 인물들을 과감히 추려내어 어떻게든 이야기를 해나간다.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전후 사정(맥락)을 듣고 그 이면에 감춰진 다른 원인들을 알게 되면 여태껏 단순하게 선과 악으로 구분되던 사건과 인물이 보다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역사를 살피는 것은 단순히 거기서 흑백을 가려내는 일이 아니다. 역사라는 거대한 거울을 통해 우리 자신을 비춰보는 작업이다. 신학(혹은 교회)의 역사가 역동적임을 이해하고 인정한다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보다 깊고 성숙해질 것이다. 성경에 대한 이해는 말할 것도 없다.

이 책은 다섯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책의 목차는 1~5막으로 되어 있다). 1막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틀이 형성되는 이야기다. 삼위일체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형성되는 이야기로 영지주의, 철학과의 관계 설정 등이 다뤄진다. 2막은 첫 번째 이야기의 논의가 공의회를 통해 성문화되고 공교회의 기초가 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3막에선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그리고 중세교회의 형성을 다룬다. 4막은 종교개혁, 5막은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신정통주의와 다양한 현대신학 이야기다. 저자는 이야기라는 표현에 걸맞게 자칫 딱딱할 수 있는 신학사를 쉽고 간결하게, 그리고 정말로 재미있게 써 내려간다. 출판사는 원제의 'pocket'을 '하룻밤에 정리하는'이라고 옮겼는데 저자에 버금가는 재치가 아닌가 싶다.

신중한 역동성은 각 장의 제목을 통해 그리고 본문 곳곳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2막과 3막의 제목은 각각 복잡해지는 이야기, 갈라지는 이야기다. 공의회를 통해 이단이 정죄 되고 그 내용들이 정리됨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시작의 이면에는 의외의 동인들이 존재했고 그로 인해 독자들은 함부로 승자와 패자를 가를 수 없게 된다. 3막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논쟁보다는 이를 해결하려는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절충적 입장과 동서방 교회의 분열, 스콜라주의의 유행 등이 더욱 눈에 띈다. 고치고 다시 쓰는 이야기로 불린 4막에서는 종교개혁의 울타리를 루터와 칼빈으로 좁히지 않고 재세례파, 청교도, 성공회, 감리회, 아르미니우스, 경건주의, 존 로크를 위시한 이신론까지 매우 넓게 본다. 5막은 서로 간의 반작용으로 부상된 신학의 변천을 보여준다. 자유주의-근본주의-신정통주의가 그것이다. 윤리의 부재와 현 문화에 대한 대응으로 부각된 현대신학 역시 시대 상황과의 대화의 맥락이 있음을 놓치지 않고 일러준다.

하나의 보편교회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지상교회와 다양한 신학의 얼굴들, 이 모순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될까? 단순히 죄로 인해 타락한, 무능해진 인간들의 죄 된 결과로 치환해버리면 끝일까?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해 보이진 않다.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참된 신학이란 무엇일까? 과연 그것이 존재할까? 다음은 이런 문제를 고민한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 프란키스쿠스 유니우스(1545-1602)의 글이다.

"논제 39. 그래서 우리 신학의 형태는 앞서 우리가 언급했던 것처럼 그 자체로는 하나이지만 우리 안에서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과 지식의 일치를 얻을 때까지는 계속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함께 성숙한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 예수의 충만함인 교회의 성숙한 정도까지 이를 것이다."(참된 신학이란 무엇인가, 부흥과개혁사 역간)

물론 유니우스는 종교개혁의 영향을 깊이 받은 맥락에서 철학적 신학을 거짓 신학으로 배제하고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당시에 저런 고민이 있었음은 다양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과연 어디까지를 신학의 영역으로 봐야 할지는 계속 고민해야 할 부분이나, 먼저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세상은 넓고 교회는 많다. 그리고 그 교회는 유일한 하나님이신 삼위 하나님을 한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가운데 다양하게 존재한다. 신학도 마찬가지다. 평신도로서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는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이 사실을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신학은 더 이상 신학도와 목회자 그리고 신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수백 수천 년의 역사를 이어가는 교회이자 성도로서, 광활한 교회사와 그 궤를 같이하는 신학의 역사를 신자라면 누구나 배우고 알아야 한다. 빈약한 사유는 맹목적인 신앙만큼이나 위험하다. 얕은 사유와 미련한 신앙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패망의 원인이자 결과다. 자고 일어나면 바뀌는 세상이다. 순식간에 건물이 올라서고 지도가 바뀐다. 문화와 사상 역시 엄청난 속도로 태어나고 소멸되면서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부딪힌다. 신자는 교회와 신학의 역사를 공부하며 이러한 변화에 지혜롭고도 순결하게 대응해야 한다. 소중한 역사의 기록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에게 전달됐다. 우리가 함부로 주권자가 되어 역사를 재조립하거나 특정 부분만 편식하지 말아야 한다. 다양한 신학의 얼굴은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들의 모습이다.

이 책은 '하룻밤에 정리하는 ...'이란 제목이 말해주듯 적은 분량과 재미있고 쉬운 서술을 특징으로 한다. 지난번 이 코너에서 '기독교 교파 한눈에 보기(전희준, 이레서원)'를 소개했었는데 그 책과 더불어 읽기에 안성맞춤인 책이다. 현대신학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위해선 올 초에 출간된 저자의 '현대신학이란 무엇인가 - 자유주의 신학의 재구성에서 포스트모던 해체까지(로저 올슨, IVP 역간)'를 읽어보면 좋다. 나를 바로 알기 위해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된다. 두 지식이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칼빈의 통찰을 보편교회에 적용해보면, 다양한 교회와 신학을 이해하는 것 역시 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볼 수도 있겠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사와 신학사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고, 교회 교육 현장에서도 역사 교육에 대한 관심이 더 깊어졌으면 좋겠다.

이재웅 집사(평내교회), TGC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