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조간을 읽으며 깜짝 놀랐다. 아니, 윤동주 시인이 중국 국적의 조선족이라니? 이 말은 결국 윤동주가 중국 사람이라는 말이 아닌가. 아무리 중국이 자국 중심으로 역사를 왜곡한다고 해도 한국 현대문학사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 추앙받는 윤동주를 중국인으로 내세울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윤동주의 '서시'를 외어 보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 /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2021년 2월 16일은 윤동주 시인의 76번 째 기일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윤동주 국적 논쟁이 일고 있다. 중국의 최대 포털사이트인 바이두가 윤동주의 국적을 '중국'으로, 민족은 '조선족'으로 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이미 지난 해 말 윤동주의 출생일에 즈음하여 한 인터넷 매체가 보도한 적이 있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오늘 윤동주의 서거일을 맞아 주요 언론들이 다시 보도하면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기사를 읽은 독자들은 중국의 반복되는 역사 왜곡에 울분을 토로하고 있다. 윤동주가 태어난 1917년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기 훨씬 이전이다. 조선족이라는 민족공동체 역시 중국인민공화국이 출범하면서 그때까지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 남은 조선인들을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 규정하면서부터다. 지금의 국경을 기준으로 국적을 부여하고 민족을 판단할 수 없는 이유이다.
더욱이 윤동주는 일생의 대부분을 조선에서 살았고, 법적으로도 본적이 함경북도 청진시 포항동 76번지인 엄연한 조선인이었다. 그는 평생을 조선 사람으로 살면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한글로 쓰여진 그의 시 '별헤는 밤' 속에 등장하는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는 시어(詩語)처럼 중국 이름을 지닌 소학교 친구들은 그에게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었다.
중국은 2007년 윤동주가 살았던 명동촌 생가를 복원하고 연변조선족자치주 중점 문화재 보호 단위로 지정하였다. 이어 2012년부터 용정시에서 본격적인 문화재 복원사업을 추진하여 윤동주 전람관을 건립하면서, 입구에는 중국 내 조선족 출신 장관이자 소수민족 문제를 주관하는 국가 민족 사무위원회 주임인 이덕수 씨가 쓴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 표지석이 세워졌다. 중국인 윤동주는 이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윤동주를 중국인을 뜻하는 중국 조선족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이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난 해 광복절에 외교통상부 산하기관인 재외동포재단의 한우성 이사장은 KBS TV에 출연하여 "150년 재외동포 역사가 낳은 자랑스러운 최고의 민족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윤동주를 통해 5,200만 국민과 740만 재외동포가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윤동주를 한국인에서 자랑스러운 재외동포로 분리해 낸 것이다.
이어 그는 지난 해 12월 22일 재외동포재단 공식 블로그인 코리안넷과의 인터뷰에서 "재러동포 최재형은 사업가로 성공하여 독립운동에 기여했고, 재미동포 최종림은 최초 비행학교를 설립하여 모국 공군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주일대사관 부지와 건물을 기증하고 대규모 모국 투자로 대한민국 산업화에 초석을 다진 재일동포 서갑호, 재중동포 윤동주 시인, 재미동포 김영옥 대령 등 무수히 많은 동포들이 모국에 기여하고 거주국에서 활약했습니다." 라고 밝힘으로서 그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드러냈다.
아무리 개인의 사적 견해이고,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이라는 특수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문재인 정부의 차관급 인사가 공개적으로 윤동주 시인을 재중동포라고 두 번씩이나 주장했으니, 중국이 중국 국적의 조선족이라고 한들 어떻게 역사를 왜곡한다고 따질 수가 있겠는가?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이다. 역사란 모름지기 역사적 인물이 활동하던 그 시대적 환경 속에서 판단해야 하는 것이 기초적인 상식인데, 현재의 법적 잣대로 재단하여 윤동주를 재중동포라고 부르는 것은 무지의 소치를 넘어선 망언이다.
윤동주는 누구인가.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원래 북간도의 척박한 땅이었지만 1899년 함경도 출신의 김약연, 김하규, 문병규 등이 140여 명의 식솔을 이끌고 북간도로 집단 이주한 후 윤동주의 조부인 윤하현 등이 합류하면서 '동방을 밝히는 곳(明東村)'이라는 뜻을 지닌 북간도 최대의 한인촌을 형성했다.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은 함경북도 종서군 동풍면 상장포에 거주하다가 1886년 길림성 자동으로 이주하였으며, 독실한 크리스천인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는 명동촌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아버지 윤영석은 1910년 명동학교의 설립자인 김약연의 누이동생인 김용과 결혼하고 명동학교에서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19세기 말 조선인들이 간도로 대거 이주하게 된 것은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 기근이 심해지자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서였다. 그런데 간혹 미국의 청교도처럼 종교적인 이유에서 새로운 촌락 공동체를 건설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구세동(救世洞)·영생동(永生洞)·낙원동(樂園洞)·명신동(明信洞)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와 달리 유교를 신봉한 김약연은 처음에는 맹자의 정치철학에 입각하여 '신(信)·식(食)·병(兵)'의 이념을 실천하는 유교적인 이상촌을 세울 생각으로 1901년 서당인 규암재를 설립했다.
그러다가 이상설 등이 이웃 대불동에 설립된 서전의숙을 통해 신식교육의 필요성을 깨닫고 명동학교를 건립하였다. 이때 김약연은 서울청년학관을 졸업한 정재면을 교사로 초빙하였는데, 정재면은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릴 것을 부임하는 조건으로 제시했다. 이에 김약연은 며칠을 숙고한 후 기독교로 개종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로써 마을에는 교회를 설립하고 학교에는 신앙교육을 실시하는 등의 기독교 공동체로 변모하는 한편, 이동휘를 비롯한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을 초청하여 부흥사경회를 열어서 신앙훈련과 민족정신 고취에 힘썼다.
김약연은 독립운동을 위한 교육에만 그치지않고 자신이 직접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18년 11월 무오독립선언에 서명한 39명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며, 1919년 3월에는 '간도 독립선언포고문' 작성에 동참하고 북간도의 3·13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탓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2년 동안의 옥고를 치렀다. 일본군 간도토벌대는 1920년 10월 20일 명동학교를 파괴한데 이어, 1925년에는 명동학교를 폐쇄 조치했다. 이때까지 명동학교는 17년에 걸쳐 1천 2백여 명의 민족지도자를 배출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명동학교와 명동교회를 다니며, 민족정신과 구국 신앙을 배운 윤동주는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그리고 평양의 숭실중학교와 광명중학교를 거쳐 1938년 4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이렇게 여러 학교를 전전하게 된 것은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후 은진중학교를 다니다가 전학한 숭실중학교가 1936년 신사참배 거부로 자진 폐교하였기 때문이다. 1941년 12월 연희전문을 졸업한 윤동주는 이듬 해 3월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그 해 10월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학과에 편입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명동소학교부터 도시샤대학까지 윤동주가 수학한 학교는 하나같이 미션스쿨이었다는 점이다. 윤동주는 1943년 7월 14일 방학으로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교토 카모가와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중국 군관학교 입교 전력 때문에 '요시찰인'으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던 송몽규와 더불어 조선인 유학생들을 모아놓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이었다. 특별고등경찰은 '재 쿄토 조선인학생민족주의그룹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듬 해 3월 윤동주는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판결문에는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다."라고 적혀 있었다.
교토 우지강에서 있었던 윤동주 송별회 사진(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윤동주) ©김형석 박사 제공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29세의 젊은 나이에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사망 시각은 오전 3시 36분이며, 사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아버지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후쿠오카형무소에 도착해서 송몽규를 면회했을 때, 송몽규는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감옥에서 정체 불명의 주사를 놓아서 이 모양이 되었다는 증언을 했다. 윤동주의 죽음이 '생체실험'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그 같이 증언한 송몽규 또한 20일 남짓 지난 3월 7일 윤동주의 뒤를 따라 옥사하였다.
따라서 그가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일본의 소금물 생체실험 때문이라는 견해와 그의 사후 일본군에 의한 마루타 생체실험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두 가지 주장 모두 불확실하다. 윤동주의 유해는 3월 6일 문재린 목사의 집례로 장례를 치룬 후에 용정 중앙장로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해 6월 그의 무덤에는 집안 사람들의 정성으로 '시인 윤동주지묘'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윤동주가 죽고 얼마 후에 해방이 되고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그의 가족과 친인척들은 모두 북간도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 바람에 그의 무덤은 40년 넘게 북간도에 방치되어 있었다. 1992년 한중국교가 수립된 뒤 육촌 동생인 가수 윤형주가 재종 형인 윤동주의 묘소를 찾아갔더니 풀이 무성하고 비석이 쓰러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2007년 이후 연변조선족자치주 중점 문화재 보호 단위로 지정하고, 생가와 묘소를 새로 꾸미는 과정에서 윤동주를 '중국조선족애국시인'으로 포장해 버린 것이다.
윤동주 시인은 100여 편의 시를 남겼다. 그의 시에는 민족주의와 기독교 신앙이 깊게 베어 있다. 그의 대표 작품인 '서시'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소원한 것처럼, 윤동주는 일제의 통치에 저항하다가 희생 당한 민족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서 한국 기독교 민족주의자의 표상이다. 그동안 동북공정으로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던 중국이 이제는 윤동주마저 중국인으로 매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는 무엇이 무서워서 언제까지 중국의 눈치만 볼 것인가? "역사를 잃어버리면 나라도 잃어버린다"는 역사의 진리를 명심하자.
김형석 박사(전 총신대 역사신학 교수, 대한민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