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가 히틀러 '미친 자'로 지목한 것은
전쟁이나 홀로코스트 시작해서가 아니라,
히틀러가 인간의 본성 깊은 곳에 자리잡은
악의 가능태 완성해 현실화했단 판단 때문
교만과 우상숭배가 초래하는 파멸의 역사
◈신학과 몰락: 영화 <다운폴>을 통해 본 나치 독일의 패망
영화 <다운폴>(The Downfall, 2004)은 1945년 4월 30일, 나치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로 생을 마치고 나치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기 직전 14일 동안 히틀러와 그 주변인물들, 즉 당시 나치 독일 수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영화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암울하기 그지없다.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군이 등장하는 영화 후반부를 제외한 모든 장면이 벙커에 깊이 숨은 채 다가오는 파멸을 기다리는 나치 정부와 군 수뇌부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
특히 독일의 패망에 완벽하게 절망한 나치 수뇌부와 독일군 사병들의 자살 장면이 연달아 등장하는데, 영화 역사상 가장 많은 자살 장면이 등장하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당연하게도 히틀러이지만, 히틀러보다 더 강렬한 인상으로 부각되는 인물도 존재한다. 바로 나치 세력의 2인자이자 히틀러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던 선전부장 요제프 괴벨스(울리히 마테스 분)이다.
영화에서 괴벨스는 이미 전세가 기울어진 베를린 방어를 위해 민간인들을 대거 동원해 '국민돌격대'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그들을 말 그대로 무의미한 총알받이 신세로 전락시킨다.
이때 SS 소장 빌헬름 몽케 장군(안드레 헤니케 분)은 무기도 없이 강제로 징집되어 전선에서 몰살당하는 국민돌격대 동원을 멈추라고 요구하나, 괴벨스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전 (죽어가는) 국민들을 동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들 스스로 자초한 일입니다. ... 우리는 한 번도 우리가 할 일을 감추지 않았고, 국민들은 그들 스스로 우리에게 정권을 위임했으니까요. 그리고 이제 그들이 그 대가를 치르고 있을 뿐입니다."
이 대사는 많은 관객들에게 <다운폴> 최고의 명대사로 꼽힌다. 이 대사 속에는 당시 나치 수뇌부가 독일 국민을 대하는 광기어린 지배자적 태도와 함께, 나치 정권에 보내온 압도적 지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당시 독일 국민들의 운명을 표명하고 있다.
▲영화 <다운폴>의 나치 정권 선전부장, 요제프 괴벨스(울리히 마테스 분). 히틀러가 자살한 다음 날, 자녀 넷을 살해한 뒤, 아내 마그다 괴벨스와 함께 권총으로 자살한다. |
영화 속에서 이 말을 한 괴벨스 역시 히틀러가 자살한 바로 다음 날 아내와 함께 어린 자녀 넷을 독살한 뒤 함께 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그 뒤로 영화 속에서는 나치 독일 지도층 인사들, 그리고 그들에게 세뇌된 독일군 병사들의 연쇄 자살 장면이 이어지는데, 죽음을 택하지 않을 것 같은 인물들조차 줄줄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관객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은 1944년 7월 20일, '발키리 작전'을 통해 히틀러를 암살하고 베를린을 장악하려 했던 '7‧20 음모' 주모자들이 예견했던 그 절망적 패망과 비극이 이 영화의 민간인 몰살과 나치 수뇌부 자살을 통해 고스란히 묘사되고 있다. 이는 본회퍼가 예견한 "미친 자에게 맡겨진 운전대"의 결말이었다.
◈신학과 예견: '미친 자'가 운전대를 잡은 민족의 운명
독일 패망이 눈앞으로 다가온 1944년 4월, 히틀러는 독일이 아직 확보하고 있던 수용소 전체에 수감된 사형수들의 형 집행을 서두를 것을 지시했다. 또한 모든 유대인 수용소 수용인원들을 몰살할 것을 지시했다.
이는 죽어도 혼자 죽지 않겠다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이 시기 수많은 독일 반정부 인사들과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 학살당했다. 본회퍼 역시 이 시기, 4월 9일에 교수형을 당했다.
영화 <다운폴>은 본회퍼가 예언한 "미친 자가 붙잡은 운전대"의 비극적 결말을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특히 그 미친 자에게 운전대를 쥐어준 동승자들의 결말이 어떠한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베를린에서 국민돌격대로 총알받이가 되어 몰살을 당했던 민간인들은 바로 12년 전인 1933년, 독일 의회 해산과 히틀러 총통 취임을 열렬하게 지지하고 환영하던 바로 그 유권자들이었다.
본회퍼가 <행위와 존재>를 통해 인간 인식과 그에 관여된 죄성을 비판했던 시기는 히틀러 집권 3년 전인 1929년이다. 이 시기 히틀러와 나치당은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으로 인해 한층 가속화된 독일의 경제 파탄을 틈타 이미 독일 의회 제2당으로 도약해 있었다.
▲본회퍼의 <행위와 존재>가 출간된 1930년 군중 앞에서 연설하는 히틀러. 이 시기 이미 히틀러는 독일 내 거물급 정치인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
시기적으로 봤을 때, "미친 자가 붙잡은 운전대"에 대한 본회퍼의 예견은 이미 이 당시부터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본회퍼는 이미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독일 민족 내부에 도사리고 있던 비슷한 유의 광기가 어떤 식으로 폭발하고 어떤 규모의 비극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즉 본회퍼가 히틀러를 '미친 자'로 지목한 것은 단순히 그가 전쟁을 일으키거나 홀로코스트를 시작해서가 아니라, 히틀러라는 인물이 인간 본성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악의 가능태를 가장 완성된 형태로 현실화하고 있는 자라는 판단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히틀러와 나치 독일에 대한 본회퍼의 비판은 애초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것이었다는 말이다.
1930년대 초반까지 독일 정치권은 히틀러의 집권이 가져올 파멸과 비극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 독일 철학계 역시 히틀러가 어떤 일을 벌일지 제대로 예견하지 못했다.
현대 독일 실존철학의 대가 하이데거 같은 이는, 194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독일 민족주의에 대한 나치 정권의 입장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독일 신학계와 반유대주의의 직접적 표적이 된 독일 내 유대인 지식인들은 나치 정권이 초래할 비극적이고 폭력적인 앞날을 일찌감치 예견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나치 정권 집권 초기부터 탄압 대상이 되었다.
본회퍼는 처음부터 나치당원들에게 '불온한 인사'로 지목되었다. 폴 틸리히는 히틀러 정식 집권 몇 달 전인 1932년 10월, 나치당원들의 위협 때문에 미국으로 도피했다.
히틀러 추종을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아리아 민족 우월주의에 입각한 민족 차별 사상을 마귀적인 것으로 선언한 <바르멘 선언>(1934)을 주도했던 칼 바르트는 선언 직후 나치 정권에 의해 독일로부터 영구추방을 당해 고국 스위스로 대피해야 했다.
▲본회퍼와 마찬가지로 나치 정권에 의해 탄압을 받았던 독일의 저명한 루터교 신학자, 폴 틸리히. |
당대 독일 신학계가, 비록 소수에 불과하긴 하지만, 이처럼 히틀러와 나치 정권이 주관하는 독일의 운명이 극악한 결말에 이를 것임을 예견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인 판단도 아니고, 철학적인 판단도 아닌, 오로지 신학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특별히 독일 민족 전반을 지배하고 있던 편협한 교만의 심성, 그리고 열등감을 포장하기 위해 극대화된 우월감을 통해 드러난 자기 우상화의 죄악을 정확하게 지목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인간의 원죄적 죄성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가능케 해주는 동시에 피조물로서 인간의 올바른 위치를 지정해주는 예리한 기독교적 인간이해 덕분이었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