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영화, 해외 콘텐츠 분석하고 쪼갠 뒤
흥행에 도움될 요소 뒤섞는 부분적 모방 행태
<반도>와 <강철비 2>처럼 애국심 의존 벗어나
◈문화의 모방: 무한 경쟁 속 생존을 위해 부분 모방을 택한 한국 영화
2019년과 2020년의 한국 영화 트렌드는 아무래도 '패스트 팔로잉(fast following)', 이 한 단어로 압축해서 표현 가능할 듯하다.
2018년 두드러졌던 한국 영화 흥행 침체 이후, 특히 신파와 애국 마케팅이 더 이상 관객들에게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한국 영화계는 난관을 극복하고자 경쟁 상대였던 헐리우드 영화 및 넷플릭스 채널 작품들을 본격적으로 '카피'하기 시작했다.
물론 과거 한국 문화계 전반이 해외 문화에 많이 개방돼 있지 않던 시절처럼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노래나 영화를 통째로 카피하는 식의 모방은 아니다. 이런 명백한 지적재산권 침해 행태는 더 이상 문화 시장에서 용납되기 어렵다.
대신 최근 한국의 영화인들은 참고할 만한 해외 문화 콘텐츠를 나름 여러 각도로 분석하고 쪼갠 뒤, 그 중 영화 흥행에 도움될 만한 요소를 '마트에서 쇼핑하듯' 이것저것 집어들고 뒤섞는 부분적 모방 행태를 지속하고 있다.
최근 코로나로 인해 크게 침체됐던 한국 극장가에 조금이나마 활력을 불어넣어준 <반도>나 <강철비 2> 모두 이런 특징이 두드러진다.
<반도>는 <워킹 데드>를 비롯한 각종 좀비 콘텐츠들과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요소들을 주로 빌려왔고, <강철비 2>는 미국 정상이 납치되어 유고 처리를 할 것이냐 여부를 따지는 데서는 <에어포스 원>을, 잠수함 내부에서 군사 반란이 일어나고 적국 잠수함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는 데서는 <크림슨 타이드>를 적극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요즘에는 영화를 볼 때 신파와 애국심 자극 요소에 더해 데자뷰(Déjà Vu), 기시감까지 떨쳐내느라 애써야 한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어느 영화에서, 어느 드라마에서, 어느 TV 시리즈에서 따온 건지 생각하다가 작품 자체에 대한 집중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하지만, 모방된 요소들을 이리저리 조합하는 기본 서사의 얼개가 이들의 매력을 확실히 살릴 수 있게 미리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급조된 서사에 다른 작품의 요소들을 모방하면 결국 조잡한 결과물만 내놓게 된다.
영화 <반도>나 <강철비 2> 모두 이런 맥락에서 그리 좋은 평을 받지 못한 작품들이다.
지난주 개봉한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어떨까? 주기도문의 한 구절을 빌려 영화 제목으로 정한 이 작품은 영화 평론가들과 관객들 사이에서 <맨 온 파이어>(2004), <테이큰>(2008), <아저씨>(2010), <터미네이터 2>(1991), <존 윅>(2014) 등을 연상시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확실히 전직 국가정보부 특수요원이 납치당한 어린 딸을 구하기 위해 나선다는 점에서는 앞의 세 작품을, 추격과 총격 액션 장면에서는 뒤의 두 작품을 과감하게 모방한 듯하다.
그래도 <반도>나 <강철비 2>처럼 신파나 애국심에 의존하는 한국 영화의 구태의연한 서사 공식을 답습하지는 않는다.
그래서인지 최근 개봉된 한국 영화 기대작들 가운데서는 가장 호평을 받고 있으며, 누적 관객 증가 속도도 상당히 빠른 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일련의 모방 시도가 크게 나빠보이지 않는다. 한국은 아직 전 세계에 가르치고 전할 것보다 배우고 익혀야 할 것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나라이다.
한국 문화는 1993년 김영삼 문민정부가 세계화(globalization)을 천명한 이래, 점차 더 전세계 선진 문화조류에 노출돼 왔고, 특히 1990년대 중반 인터넷 혁명 이후에는 거의 가감없이 세계의 문화를 접하고 배울 수 있는 여건을 갖추게 된다.
이런 경향은 2010년대 이후 브로드밴드, 와이파이, LTE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더욱 강화된다. 온라인-모바일 채널을 통해 고화질 영상 송출이 가능해지면서, 한국 시청자들, 관객들은 이제 거의 무한정으로 글로벌 영상 콘텐츠에 노출되고 있다. 그리고 그만큼 문화 콘텐츠를 보는 안목과 기대감이 높아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모방과 짜집기에 급급한 작품들이 관객들의 취향을 만족시켜줄 리 만무하다.
한국 문화계는 이제 선진국 문화 요소들을 모방하더라도, 세계 기준에 맞는 문화적 얼개와 연출력을 가지고 해외 문화 콘텐츠들과 경쟁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이런 무한 경쟁은 한국 문화 콘텐츠의 자체적 품질을 높여줄 것이다. <설국열차>처럼 드물게나마 명작 취급을 받는 모방품들이 등장하고, <기생충>처럼 한국적 오리지널리티를 기반으로 세계 문화의 요소들을 녹여낸 작품들이 하나둘 등장하는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문화의 위상: 세계 문명사와 문화사에서 한국 문화의 위상
모방에 몰두하는 현 한국 영화의 실태는 한국 문화 전반의 실태와도 상응한다. 통상 한국 내에서 국내 언론의 보도만 접하거나 한국 문화의 위상을 과대포장하는 온라인-모바일 콘텐츠 내용에만 의지하는 이들은 방탄소년단이나 블랙핑크 등으로 대표되는 K팝이나 영화 <기생충> 등으로 대표되는 K무비의 위상이 전 세계적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동유럽, 동남아, 중앙아시아 각 지역에서 한국 문화를 동경해 한국에 와 보게 되었다는 외국인들의 '고백'들만 모아놓은 유튜브 영상들을 접하게 되면, 확실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법하다. 마치 전 세계에 한국문화 신드롬이 일어난 것처럼 믿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이 그런지는 두고 볼 일이다.
한국 문화의 위상이 적어도 2000년대 이전보다 월등히 높아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많이들 착각하는 것처럼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 문화에 열광한다는 식의 과대포장에는 공감하기 어렵다.
기존 한국 문화의 세계적 위상이 워낙 형편없었기에, 기저효과 덕을 봐서 상대적으로 '이전에 비해' 현재 한국 문화계의 업적이 대단해 보일 뿐이다.
전 세계 문명사 및 문화사에서 실제 한국 문화의 위상은 어느 정도인가? 이를 알아보려면 세계 각국의 역사 교과서들을 살피면 된다. 특히 미국과 서구 선진국들의 교과서들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세계 문명사 및 문화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비교적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처럼 한국과 직접적인 정치적-역사적 이해관계가 있었던 동아시아 국가들을 제외하고, 한국의 문명사적, 문화사적 업적은 서구 역사 교과서 어디에도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가 각기 전 세계 문명사의 주요 챕터들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당황스러울 정도이다. 그만큼 한국 문화가 전 세계 문명, 문화 발전에 기여한 바가 없다시피 하다는 증거이다. 특히 기술 문명 부분에서 이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를 조선시대 이후 한국 지도층이 유지해 온 쇄국책 탓으로 돌릴 수도 있겠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한국 문화의 전통적 위상은 심하게 낮은 편에 속한다. 기본적으로 중국 문화의 별 특징없는 아류라는 인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 전 세계적으로 위대한 문화 유산이 등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 영향력이나 세계사적 의미는 빈약하기만 했다.
예를 들어 신라의 고승 원효가 집필한 <대승기신론소>, 세계 최초 금속활판 인쇄본인 <직지심체요절> 같은 것은 대단한 문화적 업적임에 분명하나, 그것들이 현대 세계 문명 및 문화 발전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따져보면 그 위대함이 퇴색될 수밖에 없다.
한국의 문화 양식이 최초로 세계 문화계 전반에서 아주 미약하게나마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구한말 한국이 개항을 하면서, 그리고 한국에 미국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기독교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처음 한국 문화에 대한 서구의 평가는 처참했다. "불결하고, 게으르고, 질 낮은 전통과 하루하루의 현실에만 몰두하며 미래를, 발전을 생각할 줄 모르는 문화와 생활습성." 이것이 한국인들이 일궈놓은 문화와 생활양식에 대한 그들의 전반적인 평가였다.
매우 빠르게 근대화를 이룬 미국인들, 그리고 정직, 성결, 신앙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선교사들의 눈으로 보기에, 한국 문화는 한없이 미개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