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과 이데올로기
토마 피케티 | 안준범 역 | 문학동네 | 1,297쪽 | 38,000원

'강제 희년'이 세계 경제 불평등 감소시켜
세계대전으로 걷은 세금도 감소에 한몫해
1980년까지 경제적·사회적 불평등 해소돼

해마다 1월이 되면, 기독교인들이 하는 다짐이 있다. 성경 1독. '올해는 꼭 성경을 끝까지 읽어야지.'

그렇게 창세기부터 읽다가, 출애굽기에서 포기한다. 성막을 만드는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 폭의 길이는 스물여덟 규빗, 너비는 네 규빗으로...."

나도 1독을 여러 번 시도를 했지만, 첫 1독은 대학생이 되어서야 성공했다. 그때 성경을 읽으면서 눈에 띄는 제도가 '희년'이었다.

희년은 '리셋'이다. 너무 가난해서 종으로 팔렸던 사람은 '희년'이 되면 다시 자유의 몸이 된다. 너무 가난해서 가진 땅을 팔았던 사람은 '희년'이 되면 땅을 다시 돌려받는다. 모든 것이 '리셋'되어 처음 상태로 돌아간다.

'희년'은 가장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제도였다. 실제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한 번도 지키지 않았다. 단지 50년이 지났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리셋한다니. 차라리 '노예 제도'는 납득이 되어도, '희년'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왜 이런 정책을 말씀하셨을까?

토마 피케티의 <자본과 이데올로기>를 읽으면서 이해할 수 있었다. '강제(?)로 리셋시키지 않으면 불평등이 해소 될 수 없구나.'

<자본과 이데올로기> 3부 '20세기의 거대한 전환'에서는 불평등이 감소됐던 시기에 대해 다룬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유럽은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오히려 경제적 불평등이 심해졌다.

19세기 말에서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프랑스의 상위 1% 부자가 자신들의 소유에서 발생한 수입(배당금, 이자, 임대료)은 당시 평균 임금에 비해 30-40배 높은 수준을 누렸다. (한 달 월급을 300만원으로 보면, 이들의 평균 불로소득은 매월 1억 2천만원이었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그 수입이 평균 임금의 5-10배까지 낮아졌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불평등이 줄어들었다는 말이다. 그 이유 중 하나가 '강제 희년'이었다.

프랑스가 러시아에 받아야 할 빚이 '강제 리셋'되었다. 1917년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 이후, 새로운 소비에트 정부는 채무 전체와 채권 자산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한 마디로 다른 나라에 빚을 갚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본인들 의사와 상관없이 모든 빚을 탕감해주는 '강제 희년'을 지키게 되었다.

또 하나는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다. 영국과 프랑스 주주들은 1869년 개통된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로부터 배당금과 로열티를 받아왔다. 그런데 1956년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했다. 졸지에 자산이 사라져버렸다.

영국과 프랑스는 처음에 군대를 파견하려고 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의 압력으로 그냥 포기하고 이집트에 돌려주게 되었다. 한 마디로 '강제 희년'이다.

이처럼 원치 않게 빚을 돌려받지 못하게 되자, 오히려 불평등이 축소되기 시작했다. 다른 나라에 금융 이자를 갚느라 힘들어하던 나라들이 빚에서 벗어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성경의 가치관을 따른 '희년'은 아니다. 단지 국제 정세와 힘의 논리에 따른 '강제 리셋'을 당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결과 경제 불평등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불평등이 줄어든 또 다른 요인 중 하나는 세금이다. 1·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후 안정화 과정에서 각 나라는 부자들에게 많은 세금을 걷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 많은 나라들은 전쟁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재산에 대한 특별세를 만들어, 최대 50%까지 세율을 올렸다. 일본의 경우 1946-1947년 고액 유가증권(어음, 수표, 주식, 채권 등)에 최대 90% 세율의 특별세를 만들었다.

전쟁 직후라 단지 물려받아서 생긴 재산에 특별세를 걷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동의하기 시작했다. 대대적인 징병으로 저소득층 사람들은 수없이 피를 흘리고 목숨을 잃었다. 그러니 전쟁이 후 생긴 나라의 빚을 갚는 일과 나라를 재건하는 일에는 부자들의 돈을 사용하는 것에 불만을 품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부자들의 소득에(주급, 월급, 임대료, 증여 등) 누진세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1932-1980년 사이 부자들에게 높은 세율을 적용했다. 미국의 경우 평균 81%였고, 상속에 적용된 세율은 75%였다.

무엇보다 1914-1950년 유럽 나라 대부분이 부동산 시장과 금융 시장에 다양한 규제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일반인들은 전쟁 속에 굶주리고 피를 흘리고 있을 때, 자본가들은 아무런 노동 없이 계속 부유해진다는 것을 납득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후 많은 기업들이 국유화되고, 부자들의 재산이 국가에 몰수되었다. 많은 기업과 부자들이 나치에 협력한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1·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부자들을 향한 강력한 누진세, 자본에 대한 높은 세금은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세금은 교육 및 공공 보건, 사회 시설 건설 등에 사용됐고, 개인 기업이 할 수 없는 대규모 사업과 기술 개발도 이루어졌다. 1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는 경제, 사회적 불평등이 해소되는 시기였다.

1980년 후 누진세 낮추면서 불평등 심화돼
부자들, 누진세와 상속세 없는 나라로 이동
빈부에 따른 교육 격차, 직업과 경제 불평등

그러나 1980년대 이후에는 다시 불평등이 심해지기 시작한다. 각 나라들은 누진세를 낮추기 시작했다. 1932년과 1980년 사이 미국은 평균 81%, 영국은 89%의 누진세가 부과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에는 누진세가 40%대로 낮아졌다.

이렇게 된 이유를 저자는 크게 세 가지로 이야기한다. 먼저 불평등 해소를 위한 정책이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 부자들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한 것은 불평등 해소를 위한 정책이 아니었다. 단지 전쟁 이후 나라의 빚을 갚을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고, 전쟁 복구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론이 잘 준비된 정책이 아니었다. 그래서 작은 공격에도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예를 들어 미국의 기업가들은 최고세율 때문에 기업의 경쟁력이 약해지고 국가 경제가 성장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 때문에 유럽과 일본 기업에게 역전당했다고 말한다.

사실 이러한 역전은 미국 기업의 약세 문제가 아니라, 일본과 기타 기업의 약진에 의한 결과다. 당시 일본 및 프랑스 독일 등에서는 상대적으로 과감하고 평등한 교육 정책과 사회 정책을 펼쳤다. 이로 인해 뛰어난 인재가 늘어나고 생산성도 향상되었다. 덕분에 미국을 신속히 따라 잡았고 영국을 추월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누진세와 기타 불평등 해소를 위한 정책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없었기 때문에, 기업가들의 이런 주장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국민들에게도 제대로 된 설명을 해줄 수 없었다. 결국 1980년 이후 누진세는 줄어들고, 부자들에게 특혜를 주는 정책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또 하나는 세계화다. 부자들에게 높은 누진세와 상속세를 부과하는 것에 걸림돌이 된 것은 세계화였다. 세계화에 따라 자본들의 이동이 쉬워졌다.

실제로 2012년 세계 4위 부자인 루이비통 회장이 세금이 높은 프랑스에서 재산세가 없는 벨기에로 귀화 신청을 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자본이 세금이 적은 나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국가들이 부자들에게 면세 혜택을 주는 이상한 형태까지 나오게 되었다.

마지막 하나는 교육의 불평등이다. 미국의 경우 고등교육의 불평등이 심하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미국의 유명 대학 진학은 부모 소득에 따라 심한 차이가 있다. 더욱이 기부금 입학 때문에 이러한 불균형은 더 커진다.

실제로 확인해 보면 부자들의 명문대 기부는 자녀가 대학에 입학할 연령대일 때, 비정상적으로 커졌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입학 제도는 대부분 불투명하게 진행된다. 미국의 진학 과정은 불평등했고, 이는 직업의 불평등에 이어 경제적 불평등을 만들었다.

노동자들은 좌파, 자본가들은 우파 정당 지지?
현실은 반대로, 농민들이나 자영업자도 우파로
대안 제시했지만, 정책 한두 가지로 달라지겠나

4부 '정치적 갈등의 차원들을 다시 사유하기'에서는 경제적 불평등을 정치 속에서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계층별로 지지하는 정당이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많은 나라들이 양당 체제로 나누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기업과 부자들에게 세금을 많이 걷자고 주장하는 좌파 정당과 기업의 자율성과 개인의 사유 재산을 보호하자고 주장하는 우파 정당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노동자들은 좌파 정당을 많이 지지하고, 사회 기득권 측은 우파를 많이 지지할 것으로 생각된다. 저자는 막상 살펴보니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지지 패턴은 미국, 영국, 프랑스, 스웨덴 등 여러 선진국의 정치와 선거에서 발견되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니 처음에 좌파 정당을 지지하는 이들의 90%는 노동자들이었다. 하지만 막상 교육정책 및 사회정책에서 자시들이 소외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지지 세력에서 이탈하게 된다. 반면 고학력자들은 불평등 문제를 인식하고 꾸준히 좌파 정당에 투표하게 된다.

반면 우파 정당의 지지자들은 기본적으로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다. 게다가 작지만 자신의 재산을 가진 농민들이나 자영업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더욱이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모두 어느 정도 소득과 재산을 가지게 된다.

그들은 우파 정당이 주장하는 사유 재산 보호(낮은 세금) 정책이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는 것에 유리하다고 판단하게 된다. 그래서 우파 정당을 지지하게 된다.

정리해서 말하면 부자가 아닌 사람들도 우파 정당을 지지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좌파 정당에 대한 실망감과, 자신들의 재산 보호에 우파 정당 정책이 더 유리할 것이라는 느낌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불평등을 줄이는 정책이 실시되는 것이 쉽지 않게 된다.

저자는 마지막 17장에서 불평등을 줄일 수 있는 정책을 몇 가지 제안한다. 상속세와 누진세를 강조한다. 그리고 공공교육 강화와 교육 기회 평등을 주장한다.

또 국가간의 연합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부자들이 세금을 피해 다른 나라로 가는 일이 없도록, 모든 나라가 부자들에게 동일하게 세금을 부과하는 연합을 이야기한다.

토마 피케티의 <자본과 이데올로기>. 불평등에 대해 다룬 책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리고 그 불평등을 역사적인 흐름에서 살펴보면서 대안까지 제시한다.

그런데 막상 그가 제시한 대안을 실행하기에는 많은 장애물들이 있다. 정치적 문제, 세계화의 문제 등. 이상적인 정책인데, 실행 여부는 장담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정책 한두 가지로 사회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rawpixel.com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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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서 실현 못한 희년, 초대교회 이뤄내
내가 세상의 불평등 모두 바꿀 수 없다 해도,
곁에 있는 이들의 아픔을 함께 나눌 순 있어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희년' 제도도 제대로 실행된 적이 없다. 그러나 '희년'이 국가 제도적으로 실행된 적은 없지만, 공동체 안에서는 이루어진 적이 있다. 초대교회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행 4:34-35)".

국가의 '제도와 정책'으로는 이룰 수 없었던 일을 교회의 '은혜와 사랑'으로 이룬 것이다.

불평등을 줄이는 일.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 일을 이루는 핵심 키워드는 '제도와 정책'이 아닌, 성도 개개인의 '은혜와 사랑"이다.

오래된 드라마 대사 중 하나다. 해외에서 만난 소녀 파티마를 경제적으로 도와주려는 여자 주인공을 보며, 남자 주인공이 소용없는 행동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만나는 사람들을 다 책임질 수는 없어요.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세상을 바꾸진 못하겠지만 파티마의 삶이 바뀌겠죠. 그건 파티마에게 세상이 바뀌는 일이 될 거예요."

우리가 세상의 모든 불평등을 다 책임질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만나는 이들의 불평등에 손 내밀어 줄 수는 있다. 때로는 금전적으로 도울 수도 있고, 때로는 기도해줄 수도 있고, 가만히 곁에 서서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빌려 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들을 위해 울어주는 눈물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의 불평등은 바꿀 수 없어도, 곁에 있는 이들의 아픔을 함께 나눌 수는 있다.

박명수 목사
사랑의침례교회 담임, 저서 《하나님 대답을 듣고 싶어요》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https://cafe.naver.com/judam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