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안지영 교수
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안지영 교수

지난번에는 코로나 19로 인해 강제적으로 만들어져 버린 교회 현실에 대하여 얘기했다. 과거에는 전혀 경험해 보지 않았던 사태가 교회에 밀어닥쳤다. 교회 예배당에서 모이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졌다. 모이는 것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그나마 사회적 거리 두기를 유지하며 교회 예배당에 모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어색하기 짝이 없다. 예배 후에 나눌 수 있는 교제 시간도 허락이 안 된다. 잘못해서 코로나에 걸리기라도 하면, 교회 전체가 술렁거리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말이 오가게 될 것이 뻔하다. 아니 벌써 그런 현상이 나타난 교회도 있다. 그래서 모임을 하는 것이 여의치 않다. 소그룹 모임도 더 위험하다고 권장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온라인 예배로, 디지털 화상으로 모임을 하고 예배를 드린다. 하지만 이런 도구를 사용하는 것으로 만남의 깊이가 유지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앞의 글에서 언급했듯이 교회의 각 가정이 여기저기 들판에 떨궈진 풀포기 같은 형국이다. 하지만 교회는 이런 현실을 비관적으로 볼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 교회가 시도해 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교회 본질 회복을 위한 연구와 실험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것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코로나 19 이후 다시 모이게 될 교회는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는 이 기회를 가장 기초 단위인 가정을 소공동체로 어떻게 세울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러면 각 가정의 신앙 성숙을 도울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은 무엇일까? 교회마다 주일 예배 외에 각 가정의 예배를 돕기 위해서 가정 예배 안내서를 만들어서 배포하는 경우를 보았다. 아주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그것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안내지나 지침서 준비 여부보다도, 가족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것 같다. 온라인으로 드리든 가족이 모여 자체적으로 예배를 드리든 그 모임 분위기가 가볍지 않다. 그래서 가정에서 예배나 성경공부를 위해 모이는 것을 강조하기 이전에 그 모임이 왜 어려운지 더 근본적인 근원을 찾아내야 한다. 아무리 가정 모임 안내지가 탁월하다 할지라도 세대 간에 존재하는 불편한 간격이 있다면, 안내지는 그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모들은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이 왜 그렇게 어색하게 느껴지는가?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있는 시간을 왜 그렇게 불편하게 느낄까? 대부분의 가정에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릴 때 어색하고 불편한 이유는 '세대 간의 단절' 때문이다. 한 가족의 풍경을 그려보면 각자 방콕이다. 아빠는 아빠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각자의 방에 콕 박혀있다. 거실은 코로나 19 이전에는 교회에서 하라는 소그룹 모임으로 사용되는 때 말고는 거의 비어있었다. 공통의 관심사인 축구 대표의 경기나 미식축구, 혹은 농구 경기가 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나마 그런 공통의 관심거리가 있다면 정말 다행이다. 그 외에는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이슈도 없고, 있다 할지라도 논쟁이 될 가능성이 크다. 서로를 향하여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마음을 닫아 버릴 게 뻔하다.

세대 간의 소통 단절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단절의 씨앗'은 유초등학교 시절에 아이들 마음에 심어진다. 그리고 그 씨앗에서 싹이 트고 자라기 시작하는 때가 사춘기다. 대학에 가면, 이미 소통 단절이 굳어져 버린다. 그러면 이 '소통 단절의 씨앗'의 원인은 무엇일까? 나는 그 원인을 부부간의 소통 불량에서 찾는다. 소통하는 기술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자녀와의 소통도 자연스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간에 소통이 원만하지 못할 경우, 그 원인을 찾아내어 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부부가 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수고가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다.

나는 유대인 고등학교 수업을 참관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나는 일반 학교와는 완전히 다른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우선 도서관에 배열된 테이블에 학생들이 두 명씩 마주 앉아 토론에 열중하는 장면이었다. 교실 안에서도 선생님과 아이들과의 토론이 매우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토론의 내용이 모두 토라와 미쉬나, 그리고 탈무드에서 선택한 것들이었다. 이런 토론이 오전 시간 내내 이어졌다. 그러면 이러한 토론 문화가 어디에서 출발한 것일까? 바로 가정과 회당에서 출발한 것이다. 가정에서나 회당에서 어른과 아이들이 토론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요 전통이다. 아이들의 의견을 진지하게 듣고 반응하는 어른들이나 어른들의 말에 경청하는 모습이 나에게 매우 특별하게 다가왔다. 이런 방식으로 형성된 관계가 어찌 쉽게 무너지겠는가? 이러한 관계를 형성한 각 가정은 그 자체로 튼튼한 안식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의 토론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는 가정에서 대화하는 게 녹록치 않다. 집에서도 교회에서도 세대 간 소통을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통이 습관화되지 못한 우리는 의사소통을 통한 긴밀한 관계 형성을 위한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각 가정이 그러한 소통 문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길을 모르기 때문에 교회가 이번 기회에 도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코로나 19사태로 모두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진 이 기간이 소통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비록 대면 모임을 할 수 없다 할지라도 화상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도울 수 있는 길을 마련할 수 있다. 아직은 어색하고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아예 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다. 나중에 직접 대면할 수 있는 때가 오면, 그때 보충할 수 있다.

이 소통을 바탕으로 교회는 각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의 신앙을 위한 일차 책임을 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지금까지는 자녀들의 신앙을 책임진다는 대담한 선언을 하는 교회가 꽤 있었다. 이런 약속을 실현하기 위하여 교회는 교육 시설을 증설하고,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며, 좋은 사역자와 선생을 확보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시도가 모두 막혀버린 형편이다. 주일학교 교사가 교회 학생들을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아주 급격하게 줄어버렸다. 기존의 교육 프로그램을 그대로 사용할 수가 없다. 이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결국은 그 답은 가족에게서 나와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녀의 신앙 교육에 부모가 우선 책임자인 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둘째로,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일반적으로 부모들이 자녀의 신앙 교육을 매우 부담스럽게 여긴다. 자기들은 할 수 없고, 전문 사역자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는 이 프레임이 바뀌어야 한다. 전문 사역자들이 마치 고등학교 입시 전문 선생인 것처럼 여기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 교육 담당 사역자의 관점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사역자의 주된 역할이 부모가 아이들의 신앙 교육을 어떻게 책임지고 감당할 수 있을지 도와주는 역할이어야 한다. 그런 연구를 깊이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교회는 코로나 19 같은 사태가 다시 발생할 경우 똑같은 상황을 그대로 답습하게 될 것이다. 흩어져 있는 각 가정에서 신앙 교육이 자연스럽게 진행될 수 있도록 돕는 사역이 바로 교회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영역이다. 그래야 각 가정은 단단한 신앙을 기반으로 한 가장 작은 소공동체로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정이 단단한 신앙 소공동체로 생존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생존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그렇게 생존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했다고 할 수 있는가? 이것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면, 먼저 하나님이 한 가정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신 목적, 더 나아가 교회 공동체로 모이도록 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더불어 가정이 신앙 공동체로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은 분명하다. 교회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개인도 예외없이 모두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 면에서 각 가정은 그 자체로 세상 속에 뿌려진 씨앗이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한 신앙 소공동체로 존재한다.

"나의 아저씨"란 드라마에는 주인공과 함께 자란 동네 친구들이 저녁이 모이는 선술집이 있다. 그 선술집 주인도 같은 동네에서 같은 학교에 다녔던 사이다. 모두가 속내를 트고 지내는 사이다. 그중 누군가 다치거나 힘든 일이 생기면 모두 발 벗고 나서는 사이다. 각자 살아가는 힘겨운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곳에 가면 힘이 난다. 어떤 때는 모진 얘기도 하는 사이다. 하지만 서로는 알고 있다. 그것도 따스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임을. 그 모임에 주인공 동생의 애인이 점점 다가온다. 주인공의 회사 직원인 고아처럼 자란 여주인공도 발을 들여놓는다. 이렇게 발을 들여놓은 이들이 이곳에서 사람 사는 맛이 무엇인지 알아간다. 그동안에는 자기 외에는 모두 경계의 대상이요 증오의 대상이었는데, 이곳에서는 그런 방어막이 필요 없다. 그냥 그대로 서로의 마음을 담아낸다. 그러더니 점점 자신 속에 묻혀있었던 자존감이라는 꽃망울이 맺힌다. 나는 이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내가 섬기는 교회가 얼마나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한다. 내가 섬기는 교회의 소공동체는 서로에게 힘이 되며, 세상 속에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안식처가 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나는 가장 기초 단위인 가정에서 시작해서 여러 작은 모임 안에 이런 사귐과 나눔이 있을 때, 비로소 교회 공동체의 바로 세움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제 이 작은 공동체로서의 가정이 어떻게 지역 사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낼 수 있을지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와 목회자가 선교적 교회가 무엇이며, 선교적 삶이 무엇인지, 선교 사역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선교적 교회나 선교적 삶은 하나님 나라에서 출발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개념을 이해한 교회와 목회자는 각 가정이 주변과 지역사회, 더 나아가 온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안내해 주어야 한다. 현재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을 수 있도록 독려하고, 그 과정과 결과를 교회 공동체 차원에서 공유하여 기도하고 격려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각자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공동체 의식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언젠가 이 대유행병(pandemic)이 끝나면 우리는 다시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 속에 뿌리를 제대로 내리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씩씩하게 살고 있는 서로를 확인할 때, 그 교회는 새로운 면모를 갖춘 건강한 공동체가 될 것이다. 이제는 교회가 모이기 위해 더 이상 신경을 집중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대신에 각 가정이나 개인이 제대로 흩어지기 위해서 모일 필요를 느끼는 새로운 흐름을 가진 교회로 변모할 것이다. '흩어지기 위해서 모이는 교회' '말씀과 삶이 세상 속에서 드러나는 교회' 코로나 19 사태가 끝나고 난 후에 이러한 교회 공동체가 많이 나타났으면 좋겠다. 마치 씨앗이 흙 속에 묻혀있는 동안 씨앗이 심어진 티가 나지 않다가 비 온 후 어느 날 불쑥 싹이 흙을 뚫고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섬기는 교회를 향한 나의 간절한 바램이다.

안지영, 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실천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