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진 박사
정교진 박사

김여정 담화문의 파급력

2020년은 6·25사변이 발발한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그때의 참상이 주는 교훈을 가슴에 깊이 새기는 이달, 6월이 되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올해로 20주년이 되는 <6·15 남북공동선언>에 밀리는 추세다. 민간차원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에서도 이 기념행사를 준비하는데 매우 분주해 보인다. 행사(연출)의 달인, 탁현민을 지위를 격상시켜 다시금 청와대로 불러들인 것을 보면 아주 제대로 준비할 요량인가보다. 코로나 19 사태로 거국적으로 하기에는 어렵겠지만 국회의사당에서의 기념식을 비롯해 평화콘서트, 기념학술회, 기념토론회, 기념사진전, 평화챌린지 등 행사들이 차고 넘친다. 하지만 북측이 불참하는 반쪽행사들이다. 여하튼 6·15정신을 계승한 남북관계발전과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달성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는데 적기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복병이 오늘 나타났다. 그 복병은 다름 아닌 북한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당중앙위 제1부부장)이다. 김여정의 올해 모습은 작년 이맘때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다. 작년 6월 10일 이희호 여사가 운명을 달리하여 김정은의 조의문과 조화를 전달하기 위해 12일 판문점에 나타났던 김여정의 환하고 친절한 인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일 년 만에 독기녀로의 완벽한 변신이다. 대경실색한 정부 당국은 김여정의 대북전단 살포 비난 담화 4시간 만에 삐라 금지법을 만들겠다고 백기를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여정의 담화는 비난을 넘어 매우 고압적인 협박문이었다. 그의 6·15 공동선언에 대한 언사는 이 정부에게는 너무나 큰 치명타이다.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20주년 기념행사를 망치겠다는 엄포는 그야말로 혼절각이다. 금강산관광 폐지 및 개성공단 완전 철거, 북남군사합의 파기 위협은 6·15 공동선언을 물거품으로 만들겠다는 경고성 발언들이다. 총선 이후 이 정부가 설정한 목표 지향점의 좌표가 사라질 판이다. 총선 전부터 '토지공개념'을 정치 이슈화시키며 6·15 공동선언 20주년 전후로 자연스레 연방제 논의를 내부 공론화시키고자 했던 여권은 동력을 잃을까 노심초사다. 6·15 기념 관련 학술회, 토론회에서 던질 화두, 연방제안이 물 건너가게 생겼으니 좌불안석에 전전긍긍일 것이다.

남북 통일방안의 모멘텀, 6·15 공동선언

남북 정상 간 통일방안 논의의 접점은 바로 2000년 6·15 공동선언이다. 공동선언의 5가지 항목 중 2번째가 연방제 관련 조항인데,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이다. 이 같은 남북합의는 2007년 10·4선언에서도 "6·15 공동선언 적극 구현"이라고 재확인하였고 2018년 4·27 판문점 선언 제1조 1항에서도 "이미 채택된 남북 선언들과 모든 합의들을 철저히 이행함으로써"라며 6·15 공동선언 내용을 실행할 것을 재천명했었다. 이런 면에서 이 정부에서 '연방제' 논의를 꺼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만지작거리던 카드를 꺼내 볼 만큼 절호의 찬스도 맞았다. 이에 필자도 연방제를 거론하면서 그 허와 실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교차비교 하기 매우 적절한 표본도 만났다. 해방정국에서의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협의 과정이다. 정확히 말하면, 소련 지도부의 전략 및 지령 내용이다. 여기에서 차후 전개될 남북한 연방제 로드맵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당시와 작금의 정치판은 닮은꼴이다. 미소공위를 논하기에 앞서, 북한에서의 연방제 통일방안의 생성 및 그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좀 더 이해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통일방안, 연방제의 시작 및 그 과정

1960년 8월 14일, 김일성의 '8·15해방 15주년 경축대회 연설'에서 처음 제시된 이 통일방안은 이후 막연히 연방제로 불리다가 1973년 6월 23일, <고려 연방제>로 정식적으로 불리게 되었다. 김일성은 조국통일 5대 방침을 제시하면서 '고려연방공화국'이라는 단일국호에 의한 남북 연방제 실시를 제시했다. 1980년 10월 10일, 제6차 당 대회에서는 '민주'라는 수식어를 넣어 '고려민주연방공화국창립방안'을 내놓았다. 김일성은 연설에서 "북과 남이 서로 상대방의 사상과 제도를 인정하고 용납하는 기초위에 민족통일 정부를 세우고 이를 기초로 북과 남이 같은 권한과 의무를 지니고 지역 자치제를 실시하는 연방공화국을 수립한다"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함정이 있었다. 연방정부의 구성 항목 세 번째는 "남북 동수의 대표와 적당한 수의 해외동포 대표로 연방국가의 통일정부인 <최고민족연방회의>를 구성한다" 이다. 여기에 대한 선결조건으로 '정치활동의 자유화'를 내세웠다. 공산당을 포함하여 모든 정치, 사회단체 및 개별 인사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자는 것이다. 교묘한 술책이자 기만술이다. 당시 북한 정권의 이 전략은 해방정국 당시 소련측이 미소공위에서 내걸었던 것을 그대로 답습한 듯하다. 미소공위 당시, 소련 지도부의 지령을 받고 분주히 움직이던 소련대표부의 활동을 도둑수업한 김일성이 후에 그대로 베낀 것으로 보인다.

<낮은 단계의 고려연방제>는 1980년대 북한경제가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남한과의 격차가 심해지자 기존의 <고려 연방제>에서 중앙정부에게 부여했던 외교권, 군사권을 회수하여 지역정부(남·북)에 귀속시키자는 느슨한(단계적) 통일방안이다. 이 조치 또한 미소공위에서의 소련측 전술과 맞닿아 있다. 1민족, 1국가, 2제도, 2정부 원칙은 고려연방제안과 동일하며 주한미군 철수 등 남조선 혁명의 선결조건도 철회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김정일은 1997년 8월 4일에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조국통일 3대원칙',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과 함께 '조국통일 3대 헌장'으로 규정한 바 있다.

미소공위에서 보인 소련의 기만술

모스크바 삼상회의 의정서(1945.12.28.)에서의 신탁통치안이 결정되고 그 선결조치로 민주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미소공위의 임무는 일차적으로 임시정부 구성원에 관한 합의서를 작성하는 것이고 그다음은 설립되는 임시정부를 지도하는 역할이다. 당시, 소련 외무상 몰로도프가 소련 대표단에게 내린 지령 중에 하나는 임시정부 각 부처장관의 자격을 '동맹국에 우호적인' 남북한 민주정당, 사회단체 대표로 제한시키라는 것이었다. 즉, 신탁통치안을 찬성하는 인사들만 세우라는 지시다. 미소공위 핵심 쟁점이었던 민주정당들과의 협의 대상에 있어서도 신탁통치안을 반대하는 당이나 단체와는 협의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당이나 사회단체는 임시정부 각료는 물론 설립협의회에도 참여할 수 없다는 의미다. 즉, 신탁을 찬성하는 좌익(일부 중도 포함)만 참여시키라는 것으로 소련 지도부의 저의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지령대로 소련 측 대표단은 제1차 미소공위(1946.3.20)에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우익정당과 사회단체를 협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임시정부 수립에도 참여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을 폈다. 미국 측 대표들은 거부 의사를 표명했고 제1차 미소공위는 50일 만에 결렬되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위가 열리게 되었고 소련 지도부는 3월 16일에 다시금 지령을 내린다. 1차 때와 같은 입장을 견지하되, 임시정부 설립안(원칙, 구조, 구성, 정강 등)에 있어 공동위원회와 협의해야 할 정당 및 사회단체 명단을 북측에서 45%, 남측에서 55% 비율로 양보하라는 지령이었다(40대60까지도 허용) 당시 판세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다. 남한내에서 좌익 정당, 사회단체들의 협의회 참여 비율은 반드시 50%가 되게 하라는 지령도 하달했다. 그 연속선상으로 남한 내에서 활동했던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을 통합한 '남조선노동당'을 세 개의 정당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지시했다(1차 미소공위 당시 통합되지 않았음). 소련은 당시 남한 내, 노동당의 영향력을 우익 정당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남북한이 합산될 때 좌익 정당과 사회단체들의 수적 우월로 임시정부 수립 과정에서 그 협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소련은 2차 미소공위를 5일 앞둔 5월 17일에 다시 지령을 내렸는데 남-북한 정당, 사회단체 비율을 다시 50대50으로 하라고 번복했다. 그 어떤 돌발변수도 만들지 않겠다는 결의로 보인다.

미소공위를 앞두고 소련은 임시정부 형태를 '내각책임제'로 내세우며 구체적인 임시정부 정강 18개 항을 하달했다. 우리는 여기서 3항과 11항을 주목해야 한다. 3항은 "정치적 자유를 보장한다. 언론·출판·집회·종교의 자유와 민주주의 정당의 활동, 노동조합, 기타 민주단체 활동의 자유 등을 보장한다."이다. 남한 내에서의 공산주의 활동을 확실히 담보하라는 것이다. 11항은 "대기업, 은행, 자원, 산림, 철도, 운수와 독점 자본가에 속했던 재산을 국유화한다."이다. 이것은 남한사회를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전환 시키겠다는 분명한 목표설정이다.

남북한 연방제 카드, 누가 꺼내느냐가 관건

모스크바 삼상회의 의정서가 채택되고 3일 후인, 1945년 12월 31일 평양에서 세 사람이 밀담을 나누었다. 소군정 민정사령관인 로마넨코와 김일성, 그리고 박헌영이다. 로마넨코는 신탁을 지지하라고 요구했고 두 사람은 받아들였다. 그리고 세 사람은 신탁통치안에 따라 수립될 임시정부의 좌·우파 비율을 2:1로 설정하였다. 북쪽의 통합된 세력 하나와 남쪽의 좌파세력 하나를 합치면 둘이 되고 나머지 남쪽의 우파세력은 하나가 되면 결국 2:1이 된다는 논리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산당이 임시정부에서 주도권을 획득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처럼, 당시 소련 지도부는 남한 내 공산주의 좌익들이 상당한 세력으로 준비되었다고 보면서 '연방제' 카드를 던진 것이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기득권을 차지한 좌익세력들이 자발적으로 내놓으려는 카드가 아닌가.

연방제로 가는 길은 어떨까. 우선은 개헌을 통한 '의원 내각제'로의 전환이다. 다음은 의회가 정지되고 남북한 결의기구인 <최고민족연방회의>가 설치된다. 최종적으로는 국가 지도자 선출이다. 남한에서 정치선점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달렸다. 연방제안 자체가 큰 문제는 아니다. 어떤 정치세력이 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이 글은 WORLD VIEW 7월호에 실릴 예정입니다.

정교진 박사(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