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유로운 삶 또는 죽음"?

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미주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2020년 4월 17일 헌팅턴비치에서 100여 명이 "자유로운 삶 또는 죽음"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코로나 19로 인한 '자택 대피령'을 이제는 끝낼 것을 요구했다고 합니다.1) 그런데 그들이 요구한 표현인 "자유로운 삶 또는 죽음"은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 이 시위를 검색해 보니 "give me freedom or give me death"라는 우리에게도 다소 익숙한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라는 표현이더군요. 이 유명한 문장은 1775년 당시 버지니아 의회 의원이었던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면서 한 연설의 한 문장이었다 합니다.2)

중앙일보가 원래의 의미를 다소 어색하게(?) 번역한 "자유로운 삶 또는 죽음", 이 문구가 제게는 '우리는 자유인이기에 자신의 삶과 죽음 또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로도 들립니다. 일견 맞는 말 같기도 하지만 삶과 죽음이 그렇게 선택의 문제로 볼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의 존재는 우리의 선택 이전에 주어진 것이지요. 우리가 우리의 삶을 선택하지 않았지요. 그리고 죽음 또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주어지는 것일 겁니다.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죽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삶과 죽음은 자유롭게 선택'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운전하고 가는데 다람쥐 한 마리 갑자기 나타나 도로를 가로질러 갑니다. 다람쥐가 저 정도 속도로 가고 제가 이 정도 속도로 가면 사고가 날 것 같은데, 더군다나 다람쥐가 중간에 잠깐 멈춰 섭니다. 제 마음이 다급해졌습니다.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입과 동시에 손으로 "빨리 건너가" 외쳤습니다. 엉뚱한 생각을 해 봅니다. 다람쥐가 길을 빨리 건너가는 것은 본능적으로 죽지 않기 위해서이겠지만, 길 중간에 서는 것을 보면 죽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지, 아니면 지금 상황이 어떤지를 잘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러한 다람쥐나 다른 동물과 달리 우리 인간은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할 수 있는 존재죠. 그러기에 질문해야 합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너무 많이 죽어갑니다. 전 세계적으로 4월 28일 현재 21만여 명이 죽어가고, 미국에서만 5만 6천여 명 정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죽어가는 이들이 많을까요? 죽은 이들이 계속해서 늘어나는데 생명을 숫자로 표기하는 것이 아주 불편하기도 하네요. 어디까지일까요? 언제까지일까요?

또 그렇게 죽어가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너무 고생합니다. 그들 중 2차 감염으로 죽어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의료 시설은 그 죽음을 감당하기에 턱없이 부족하고, 자신도 감염에 걸린 이 총체적 극한 상황에 너무 오래 있다 보니 우울증에 걸려 극단적 선택을 한 분도 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됩니다. 그들의 죽음은 무엇인가요? 그들 중 마스크도 없이 환자들을 치료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무엇인가요? 그들에게는 자유로운 삶의 선택권이 없었던 것인가요? 이렇게 보면 "자유로운 삶 또는 죽음"이라는 시위 문구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충분히 알겠는데 너무나도 낭만적으로 들리네요.

자신의 자유로운 삶은 좋은데 혹시나 그 자유로운 삶으로 인해 타자에게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생각은 안 하시는지요? 그리고 타자에게 드리운 그 죽음의 그림자는 누가 거두나요? 자유로운 삶을 선택한 그 자신이 거두나요? 그 죽음의 그림자를 거두기 위해 가족도 몇 달씩 보지 못하고 목숨 다해 애쓰는 의료진들이 하지 않은가요? 이즈음 되면 생각이라는 걸 해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자유가 타자에게 아픔을 주는 것이라면 그런 자유는 자유가 아니지요. 방종도 아닙니다. 바로 '죄'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유는 패트릭 헨리가 원래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왜곡하는 것임에도 틀림없을 겁니다.

2. "죽음을 향한 존재"

우리가 코로나 19 이후 당분간 집에 머무는 것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죽음을 퍼트리지 않기 위함도 있지요. 이런 때에 '존재'를 다시금 생각합니다. '있음'을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함께 따라오는 '없음', 즉 '무(無)' 또한 생각합니다. 없다가 있는 것은 '기쁨'이지만, 있다가 없는 것은 '슬픔'이지요. 없어지면 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기에 그럴 것입니다. 있다는 것에 더욱이 감사할 뿐이지요. 언제까지 그렇게 이 땅에 있을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없어지겠지요. 없어진 후에는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겠죠. 그것참 아련하지 않을까요. 그러니 '지금'이 중요합니다. 비존재가 되면 이 땅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게 될 터이니 인생이 얼마나 덧없겠습니까.

그런데 그 죽음이 우리에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보다 가까이 있음을 이 코로나 19로 인해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보헤미아 출신의 농부』라는 책에서 인용한 문장이 우리의 심장을 멍하게 합니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이미 죽기에는 충분히 늙어 있다."3) 이 말은 받아들이기에 슬픈 말이지만 죽음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우리 곁에 있음을 말해 주는 듯합니다. 하이데거의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표현은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것은 사실 죽음을 향해 한 발 더 내딛는 그런 의미일 것입니다. 그것도 태어나자 마자요.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다 살고 난 저 끝에 있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전방위적으로 죽음이 곁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 겁니다.

죽음을 앞둔 인간의 모습은 어떨까요? 그것도 어느 날 만나 함께 가정을 이루다가 이제는 떠나 보내야 하는 분들의 심정은 어떨까요? 김광석이 부른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가사 일부분입니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려 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인생은 사실 누구에게나 외로운 법입니다. 떠나봐야 이별의 아픔을 알겠지만 아픔 없이는 인생의 성숙 또한 없겠지요. 사람 사는 세상, 이별은 늘 언제나 그렇게 아린 법이지만, 인생의 가장 먼 이별을 눈앞에 둔 이들의 마음은 더 아릴 것 같습니다. 더 사랑하지 못했기에 만시지탄(晩時之歎)인 경우가 많은 법이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을 때가 올 것입니다. 후회도 사랑도 그 어떤 것도 자신의 의지대로 무얼 어찌할 수 없을 그 날이 올 것입니다.

이 세상 내 의지대로 살아왔다고 큰소리치기도 하지만 내 의지대로 더 이상은 살 수 없는 그 날이 온다는 말이겠지요. 그날에 우리는 무어라 작별 인사할까요? 자신 먼저 떠날 때, 아니면 먼저 떠나보낼 때, 우리도 아마도 이런 비슷한 말을 할 것 같습니다. "나와 살아줘서 고마워. 그 나라에서 만나." 우리는 이 마지막 한마디 말을 하기 위해 오늘도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3.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삶'

'안경이 코끝에 걸려있는 것'을 전문 용어로 "노안"이라 칭합니다.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속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노안이 코끝에 찾아왔습니다. '평안'이 찾아와도 시원찮을 판에 '노안'이 엄습했습니다. 허리띠가 배 밑으로 내려간 지 오래되었습니다. 중고등학교 때 그러한 모습으로 다니시는 선생님들을 이해 못 했습니다. '어떻게 혁대가 허리 아래에 있을 수 있지' 궁금했었는데, 막상 당해 보니, 헛웃음만 나옵니다.

요즈음 앉고 일어설 때 저도 모르게 "아야야" 소리가 납니다. 어릴 때 어른들이 내던 그 소리를 이제 제가 내고 있네요. 그런데 이것은 의지적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라 그냥 자동반사적으로 입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입니다. '벌써 이렇게 되었나', 생각해 보지만 인생 그런 것이겠지요. 하지만 살아 있기에 또 그렇게 살아갑니다. 풀이 얽혀 있는데 자라듯이, 조그만 틈만 있어도 자라듯이, 인생은 또 그만큼 그렇게 흘러가나 봅니다.

횡단보도에서 있었던 한 이야기입니다. 허리가 굽으신 할머니 한 분이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마치 지금껏 살아오시면서 지신 인생의 모든 무거운 짐을 여전히 지고 가시는 듯, 슬로비디오 한 장면처럼 힘겹게 느리게 걸어가십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실 때마다 삶의 고단이 묻어나는 듯합니다. 그 모습을 신호를 기다리며 차에서 보고 있는 제 마음이 급합니다. '저렇게 걸으시다가 시간 내에 건너지 못하시면 어떡하나?' 할머니의 고단한 인생을 아는 듯 신호등도 잠시 호흡을 멈춘 듯합니다. 아니 온 세계가 할머니의 그 경건한(?) 걸음을 마음속으로 애태우며 응원하는 듯합니다. 그렇게 겨우겨우 그 길 건너시자마자 신호등 불빛이 바뀌네요. 휴, 다행입니다. 할머니 인생길, 이만큼만이라도 아무 일 없으셨으면 합니다.

할아버지 한 분 버스를 기다리시면서 어깨 운동을 하십니다. 힘껏 올리시는 어깨가 안쓰럽습니다. 모두가 거쳐야 할 미래겠죠. 우리 인간은 언젠가는 온 힘을 다해 마지막으로 호흡 한 번 할 날이 올 것입니다. 영화 <은교>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시인 로스케의 이 말은, 인생은 '주어진 것'이라는 혹은 '어쩔 수 없이 흘러가는 것'이라는 늙은이의 항변 같지만, 그 속에는 존재에 대한 진리의 한 조각이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임영웅이라는 트로트 가수가 다시 불러서 알게 된 노사연의 <바램>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존재의 이유>와 <사랑을 위하여>라는 곡으로 유명한 김종환이 작사 작곡을 했더군요. 가사가 참 좋습니다.

내 손에 잡은 것이 많아서 손이 아픕니다

등에 짊어진 삶의 무게가 온몸을 아프게 하고

매일 해결해야 하는 일 땜에 내 시간도 없이 살다가

평생 바쁘게 걸어왔으니 다리도 아픕니다.

내가 힘들고 외로워질 때 내 얘길 조금만 들어준다면

어느 날 갑자기 세월의 한복판에 덩그러니 혼자 있진 않겠죠

큰 것도 아니고 아주 작은 한마디 지친 나를 안아주면서

사랑한다 정말 사랑한다는 그 말을 해 준다면

나는 사막을 걷는다 해도 꽃길이라 생각할 겁니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저 높은 곳에 함께 가야 할 사람 그대뿐입니다.

때로는 인생살이 힘겨울 때 누군가 함께 해 준다면 그것으로 힘을 얻을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거의 비슷하기 때문일 겁니다. 돈이 많든 적든, 어느 나라에서 살든, 어떤 정치적 성향을 지니고 살아가든, 이 땅에 살아가는 이들의 기본적인 모습은 비슷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늙어갑니다. 그런데 가사에 보니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간다'고 하네요. '늙어가는 것'과 '익어가는 것'은 같은 현상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기왕이면 모두가 표현할 수 있는 것 아닌 표현을 찾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사물을 제대로 보고 생각하려면 나남없이 나이 처먹어 분별이 좀 생기고 이빨도 좀 빠져야 합니다"라고 합니다.4) 다소 거친듯한 표현이지만, 나이 들어 인생의 여기저기가 고장이 나고 그래야 세상이 그나마 제대로 보이나 봅니다. 그것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일 겁니다.

100세 시대입니다. 죽음을 향한 존재이지만 고령화 사회가 되어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 인생을 나이로 정해 놓고 살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삶은 다양합니다. 다양한 삶 속에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겠지요. 배워야 합니다. 손발을 움직이고 두뇌를 사용해야 합니다. 인생은 누군가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 땅에 존재하게 하신 그 누군가의 뜻대로 그리고 자기의 속 자아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직접 경험하겠지만 삶의 의미를 제대로 고민하고 알아가는 것보다 더 행복한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아, 생(生)이여!'

4. 소중한 목숨

아시아나 항공의 비행기 한 대가 2019년 7월 8일 뉴욕에서 인천으로 가던 중 앵커리지 공항에 비상 착륙했습니다. 사연은 이러했습니다. '미국에 거주하는 최 모(8) 양이 엄마와 함께 아시아나 항공을 이용해 한국으로 가던 중 갑자기 고열과 복통에 시달렸다는군요. 탑승했던 의사의 소견에 따라 병원으로 이송해야 하는 결정을 내렸고요. 기장은 당시 470여 명이나 되는 승객들의 동의를 얻어 앵커리지 공항에 비상 착륙했습니다. 뉴욕에서 출발 후 1시간 30분이 지났기에 안전한 착륙을 위해서는 15t이나 되는 연료를 소진해야 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최양은 병원으로 이송되어 위기를 넘겼다' 하네요.5)

항공사의 이러한 조치는 경제적 수치로 따지면 상당한 비용을 지불한 일일 겁니다. 그렇지만 돈과 생명 중 생명을 선택한 아주 귀한 결정이지요. 그 비용을 지불하고 한 생명을 구한 항공사에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네요. 생명은 소중합니다. 생명은 그 어떤 비용으로도 등치 될 수 없습니다. 수백억 수천억을 준다 해도 한 생명을 바꿀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몸에 붙어 있는 것 중 잘라내도 무방한 것들이 있습니다. 머리카락, 손톱, 발톱, 수염 등등이겠지요. 그러나 자르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목숨입니다. 하나 뿐이기에 그렇습니다. 자르면 재생하지 못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목숨이 소중합니다.

코로나 19로 사회적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이유는 우리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일 겁니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연속시키기 위해 우리는 이 모든 불편함을 참고 살아가는 것일 겁니다. 목숨이 가장 소중하기에 그렇습니다. 죽음을 멀리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러기 위해 운동도 합니다. 코로나 19를 이겨 모두 살아남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면도하다 피가 아주 조금 났습니다. 그것도 전기면도기로 했는데 말이죠. 물로 씻는데 따갑습니다. 저렇게 피가 조금 나는데도 물이 닿으니 따가움을 느낍니다. 몸이 신기합니다. 따갑다는 의식을 하게 해서 나의 관심을 유도하네요. 거울을 보게 합니다. 아픈 부위를 드러나게 해서 주인으로 하여금 그곳을 돌보라고 하는 신호 같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존해 왔겠죠. 인류 역사는 그렇게 아픈 부위들을 치료하며 세대를 거듭해 온 것이겠죠. 삶의 역사, 생명 연장의 역사 말입니다.

LA에서는 산책하다 보면 곳곳에서 도마뱀을 자주 만납니다. 어느 날 길을 걷는데 도마뱀 한 마리가 길 중간에 턱 하니 배를 깔고 엎드려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 다가오면 미리 몸을 피하는데 낮잠을 자는지 그냥 가만히 있는 거예요. 제 다음 발걸음이 땅을 디디면 곧 도마뱀을 밟을 것 같은 데도 가만히 있습니다. 급기야 제가 그 짧은 순간에 어느 쪽으로 발을 움직여야 할지 선택하고 그 방향으로 발을 움직이는데 도마뱀이 저와 같은 방향으로 몸을 피합니다. 그사이에 저는 또 한 번 발을 움직여 가까스로 다행히 도마뱀을 비켜 갔고요. 그야말로 한 생명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 우스꽝스러운 걸음을 걸었던 것이지요. 누가 뒤에서 봤으면 왜 저러나 했을 겁니다.

100세 학자로 여전히 글을 쓰고 계시는 김형석 교수님이 언젠가 98세 노인에게 세배하면서 "백수하시기 바랍니다" 인사드렸더니 덕담을 하지 않으시더라는 겁니다. 이유를 몰랐는데 알고 보니 백수(白壽라) 하면 99세를 칭하는 말이니 1년만 더 살라는 말로 들렸을 거라는 것이지요. 거의 100세를 살아도 더 살려는 마음에는 끝이 없나 봅니다.6) 살아 있기에 더 살려는 마음이 있을 겁니다.

5. 어쩔 수 없이 오는 그날을 준비하며

야구 선수가 타석에 들어 서기전 혹은 타석에 들어서서도 투수가 던지기 전 한두 번 스윙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헛스윙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투수가 던지는 공을 치지 못하면 헛스윙이지만 그 전에 하는 것은 공을 제대로 치기 위한 연습입니다. 그 연습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실전을 위해 정말로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우리에게도 죽음을 준비하는 연습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을 잘 맞이하기 위해 준비할 필요가 있지요. 그런데 코로나 19로 죽어가는 가족들과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 하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생을 마감하면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죽어도 장례절차를 제대로 밟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시신이 너무 많아 병원에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냉동차에 보관하기도 하고 어느 섬에 매장을 하기도 하더군요. 가족들의 인사도 없이 말이죠.

오래전 교인 장례식에 갔다가 집으로 가는 길에 이사한 집에 인터넷이 아직 안 되기에 교회에 들러서 인터넷 좀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네 인생의 끝인 죽음은 인터넷 안 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과 친구들과 단절이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죠. 이건 슬픈 일이지요. 사회학자인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마지막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에누리 없는 애정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남아 있는 사람이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7)이라 했는데, 우리에게 그런 시간마저 없다면 그 마지막이 얼마나 가슴 아프겠습니까?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쓰신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라는 책에 나오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딱 한 번이라도 좋다. 낡은 비디오테이프를 되감듯이 그때의 옛날로 돌아가자. 나는 펜을 내려놓고, 읽다 만 책장을 덮고, 두 팔을 활짝 편다. 너는 달려와 내 가슴에 안긴다. 내 키만큼 천장에 다다를 만큼 널 높이 들어 올리고 졸음이 온 너의 눈, 상기된 너의 뺨 위에 굿나잇 키스를 하는 거다."8) 암에 걸린 딸을 먼저 보내며, 일에 빠져 살다 보니 그 흔한 굿나잇 키스 한번 딸아이에게 해 주지 못했던 것을 뒤늦게 후회하는 장면입니다.

죽음이 안타까운 건 이렇게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죽음 그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지요. 까닭에 지금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더 사랑하고 그들의 얼굴을 더 많이 봐 주고 더 안아주고 해야겠습니다. 돌이킬 수 없기 전에 말이죠.

죽음의 일상적 절차도 제대로 밟지 못하게 하는 이 시기에 죽음을 연습할 필요가 있습니다. 같은 산책로지만 왼쪽으로 걷느냐 오른쪽으로 걷느냐에 따라 마주 대하는 대상의 각도도 달라지고 느낌도 달라집니다. 때로는 다르게 볼 수도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모두가 그 길로 갑니다. 그런데 어떤 관점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느냐에 따라 살아가는 일상의 삶도 달라질 것이며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도 달라질 것입니다.

6. 그 끝 너머를 소망하며

간혹 물에 빠진 개나 철조망에 뿔이 걸린 사슴이나 동물들을 그곳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구하는 영상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동물들은 구하는 사람을 물려고 하거나 뿔로 위협합니다. 사람들이 헤치거나 잡아먹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해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인데도 저항합니다. 정말로 미련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러한 저항을 견디고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 주면 예의상 인사 정도는 해야 하는데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뒤도 안 돌아보고 냅다 도망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인간의 모습도 이와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죽음의 한계 안에 있으면서도, 다시 말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없으면서도, 밖에서 들어오는 생명의 손길을 거부합니다. 물론 우리 인간은 동물과 달리 죽음이 무엇인지 질문은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한 답은 알 수도 없고, 또한 그 죽음을 해결할 능력도 없습니다. 이는 그 죽음 너머의 영역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그 죽음 너머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의 영역입니다. 그러니 그분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분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시작하시고 끝맺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잘났다 하더라도, 생명의 문제조차도 해결하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이기에, 그 끝/죽음 너머의 소망을 하나님께만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말씀하십니다(계21:5). 이 땅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어떤 형태로든 아픕니다. 관계 맺는 모든 것들은 어떤 형태로든 슬프죠. 그러니 새롭게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새로움이 이 땅에서는 완전히 실현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이 땅 또한 아프고 슬픈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1절)을 소망합니다. 모든 아픔의 눈물이 없고, 죽음이 없고, 슬퍼하는 것이 없는(4절) 그런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그 끝 너머로 가기 전 이 땅에서 무엇 해야 하나요? 그 끝 너머에 온전히 새롭게 하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가슴에 품고, 우리는 우리의 생이 다하는 날까지, 지금 여기서의 삶 또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낡은 것들을 떠나보내야 합니다. 그것은 생각의 낡음일 수 있고, 존재 방식의 낡음일 수 있고, 관계 맺음의 낡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새로움이 오늘 여기서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실 하나님을 정말로 믿는다면 오늘 우리의 삶 또한 변화되어야 합니다.

내일의 변하지 않는 소망을 품고 있다면 오늘의 삶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현재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일 것입니다. 현재가 그러한 희망의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미래가 지금 여기 살아가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지요. 그러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차가 지나가며 일으키는 바람에 떨어진 꽃잎들이 흩날립니다. 바람을 맞설 만큼의 무게가 되지 않기 때문이겠죠. 사람과 나무와 집은 그 바람의 강도를 견딜 만하여 흩날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존재의 무게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중심의 무게일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지만,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잡고, 죽음 이후의 삶을 다시금 기대하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영원토록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박동식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1)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page=1&branch=LA&source=LA&category=&art_id=8228804
2)https://en.wikipedia.org/wiki/Give_me_liberty,_or_give_me_death!
3)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옮김, 『존재와 시간』(까치, 1998), 329에서 재인용
4)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옮김, 『그리스도인 조르바』(열린책들, 2009), 34. 
5) https://news.v.daum.net/v/20190806090045803?d=y
6) 김형석, 『행복 예습』(Denstory, 2018), 21. 
7) 노베르트 엘리아스, 김수정옮김, 『죽어가는 자의 고독』(문학동네, 1996), 42.
8) 이기주, 『언어의 온도』(말글터, 2016), 153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