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수님을 몰라보는 제자들의 불안과 절망
예수께서 제자들과 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도록 명령하시고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셨습니다.
마가복음 4:37에는 큰 광풍(狂風)이 일어나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가득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배가 파선(破船)되거나 곧 침몰(沈沒)할 것 같은 불안과 두려움에서 제자들은 경험과 기술이며 진액을 다하는 노력으로 생존을 위해 몸부림 쳐 봤으나 자신들의 경험적 기술과 노력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자각의식과 동시에 “이젠 죽는구나!”하는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 잡혔고 비로소 예수님 생각이 나서 찾기 시작했는데 예수님께서는 배 뒤편에서 베개까지 베시고 편안히 주무시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큰 광풍에 배가 파선되거나 침몰할 것 같은 극히 위태로운 상황인데도 예수님은 편히 주무시고 계시는 반면, 갈릴리 호숫가에서 태어나 어부로 살아온 제자들, 갈릴리 바다에 대해서는 가히 전문가적인 자부심도 대단했겠지만 그날은 아무리 노력해 봤으나 자신들의 기능이 전혀 기대걸 것이 없음을 확인하며 죽을까봐 호들갑 떤 모습이 너무나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후일 사도요한은 그의 복음서 1:1-3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하셨으니 예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이실 뿐 아니라 그 모든 피조물들을 자기 뜻을 이루시기 위한 도구들로 사용하시는 절대주권자이심을 알게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주여! 구원 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하시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즉 아주 잔잔해졌을 때 제자들은 너무나 놀라서 이구동성으로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하며 극히 감탄하는 모습에서 제자들이지만 아직도 예수님의 근본과 존재와 사명에 대하여 정확히 알지 못한 상태였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가면서도 거센 풍파를 만났을 때 예수님을 몰라보는 무지 때문에 공연히 걱정하며 사력을 다해 헛고생한 제자들의 모습과 오늘 귀하의 신앙생활은 어떻게 비교가 되십니까? 이날의 상황을 고찰해 보면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예수님으로, 우주공간의 전피조물을 통치하시는 분이심을 그날은 제자들에게 알아보게 하시고 이후 전인류에게 알게 하시려고 정통보수신학의 관념으로는 예수께서 친히 광풍을 불러일으키시고 또 말씀으로 잔잔케 하신 것으로 사료가 되기도 합니다.
2. 예수님을 알아보는 신앙의 성과
마태복음 8:1-4에는 예수께서 밤새도록 산기도를 마치시고 하산(下山)하실 때 밤새도록 길목을 지키며 기도했던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했는데 그 말의 내용은 예수님을 온전히 알고 있다는 신지식의 깊이와 예수님의 능력의 가능성을 알고 믿는다는 신앙고백과 예수님의 주권적 의지를 절대존중하는 자세를 보임으로 예수님 마음에 드는 감동을 드렸기에 문둥병을 고침받는 성과를 보았습니다.
마태복음 8:5-13에서는 가버나움 백부장의 하인이 중풍병으로 죽어간다며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간청할 때 예수님을 지존하신 하나님으로 신봉하며 그 말씀의 권능을 절대신뢰하는 신앙심을, 군율의 상명하복의 원리를 설명하면서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그 말씀의 권능을 전적으로 믿어 간청하는 백부장의 신앙에 감동하신 예수님께서 “내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하셨으니 가버나움의 백부장같이 이방인도 예수 그리스도의 근본과 존재와 사명을 확실히 알아보고 믿어지는 믿음으로 신뢰하면 구원 얻게 됨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네 믿음대로 될찌니라”하시니 그 즉시 하인의 병이 낫는 치유의 성과를 얻었던 것입니다.
3. 귀신이 잘 아는 예수님과의 관계 (28-34)
예수님께서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님을 만났는데 저희는 사나와 아무도 그 길을 지나갈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마가복음 5:4에서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메었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도 깨뜨렸기 때문에 아무도 저를 제어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큰소리로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하면서 불안해하고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누가복음 8:31에는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라고 했는데, 요한계시록 20:1-3에는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써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했습니다.
귀신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정확히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대속의 희생양으로 죽임 당하실 것과 삼 일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셨다가 재림하실 때 귀신을 잡아 결박하고 천년동안 무저갱에 가두게 될 것까지 잘 아는 말을 하면서도 예수님을 신종하여 멸망을 피하려 하지 않음은 고린도전서 12:3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하셨듯이 사탄에게는 성령님의 계시나 감동으로 역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19-20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줄 알고자 하느냐”하심을 보아서 귀신이 범죄한 후 천국에서 사탄으로 추방되기 전에 수억년을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께 수종들며 호위했었기에 옛 상전이셨던 예수님을 잘 알아 볼 수 있었고 이미 신적작정에 의하여 때가 되면 자기들이 무저갱에 천년간 인봉되었다가 최후 심판후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유황불 지옥에 들어갈 것을 잘 알고 있는 상태임을 푸념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들 중엔 예수님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척 하면서도 말씀에 순종하거나 성령께 이끌리며 쓰임 받기를 소원하는 모습이 없다면 귀신의 노리개가 되어 지옥길에 끌려가고 있지 않나해서 불쌍하고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떼거리 귀신들의 간청이 “우리를 좇아 내실진데 저기 돼지 떼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했을 때 허락을 받고 귀신 떼가 돼지 떼에게 들어가매 2,000여 마리가 갑자기 미쳐서 비탈길을 달려 바다에 빠져 죽었으나 귀신 떼가 나간 두 사람은 구원을 얻었던 것입니다. 돼지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신명기14:8에서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런 것의 고기를 먹지 말것이며 그 사체도 만지지 말것이니라”하셨습니다. 이같이 군대 귀신에게 사로잡혀 정신병자로 귀신의 앞잡이가 되었던 두 사람이 구원받게 된 표적을 통하여 그 지역 주민들이 복음화 되기를 시도하시는 우리 주님의 구령사역은 오늘도 구원얻어 성령받은 성도들에 의해 인류 복음화의 그날을 재촉하십니다.
호세아 6:3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서 여호와를 알자”했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알게 하는 이는 성령이십니다. 요한복음 16:13-14에 성령님의 계시와 조명,체험과 감동을 통하여 예수님을 알고보니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모든 피조물의 주관자로서 천계와 지계와 영계까지 지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성도가 주님 뜻을 좇아 살다가 어떠한 일을 만난다해도 자신의 방법이나 노력으로 몸부림칠 것이 아니라 즉시 믿음의 기도로 문제와 나 사이에 예수님을 앞세울 때 즉시 해결과 승리와 성공을 보장받게 된답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깊이 알아보는 성도라면 자기 인생을 주님의 뜻에 온전히 맡길 것이며 주님의 지시와 명령을 순종하는 믿음으로 나아갈 때 그 어떤 장애물, 광풍노도가 엄습해 온다해도 염려할 것 없이 예수님께 직고하면 즉시 그 길을 평탄하고 형통하게 하실 것은, 그 길은 주께서 가라하신 길이요 그 길에서 해야 할 일도 주님의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환난풍파를 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가하는 태도가 신지식의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