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설런트 프리칭

크레이크 바르톨로뮤 | 김광남 역 | 이레서원 | 136쪽 

설교처럼 쉽고, 설교처럼 어려운 것이 있을까? 처음, 설교는 쉬웠다. 열정으로 설교했고, 교인들은 아멘으로 화답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다'는 한 마디로 축약될 것 같다.

사역이 십년 즈음 넘어갈 때, 설교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교는 성경공부가 아니다. 그렇다고 강연도 아니다. 그럼 무엇일까?

아무리 고민해도 설교에 대한 고민들이 해결되지 않았다. 당시 읽었던 설교학 책들만 해도 산을 이룰 것이다. 기억나는 몇 가지만 추려봐도 두 손으로 다 셀 수 없다.

가장 유명한 것이 로이드 존스의 <설교와 설교자>이고, 그다음으로 찰스 스펄전의 세 권짜리 <목회자 후보생들에게>가 있다. 당시 굉장히 유명했던 해돈 로빈슨의 <성경적인 설교 준비와 전달>이란 책이 있었고, 해돈 로빈슨과 토리 로빈슨이 공저한 <1인치 내러티브 설교>도 있었다.

이연길 목사의 <이야기식 설교 구성>이 굉장히 유행했는데, 알고 보니 유진 로우리의 책이었다. 프레드 B. 크래독의 <권위 없는 자처럼>은 압권이었다. 귀납적 설교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최고의 책이었다. 그런데 왜 절판되어 출간되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다. 토마스 롱의 <설교자는 증언이다>는 책도 굉장히 산뜻했다. 존 스토트, 브라이언 채플, 존 맥아더, 박영선, 김서택. 최근에 나온 책들까지 합한다면 아마도 1백 권은 넘을 것이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설교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하는 것일까? 감히 이 책을 답을 주는 책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적지 않은 고민을 해결해 주는 책임에는 분명하다.

이 책은 비행기가 공항에서 이륙해서 목적지까지 가는 전 여정을 설교로 비유한다. 목차를 읽어보면 마치 한 편의 여행 에세이 같은 느낌이 든다. 목적, 비행기, 화물, 기장, 도착지에서 바라보는 광경, 공항, 비행기 착륙시키기, 그리고 결론까지.

불과 110쪽 분량의 적은 책이다. 그럼에도 설교가 가진 모든 특성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부록으로 추천도서와 '확대된 사도신경'을 넣어 설교 예시를 보여준다.

서론에서 저자는 기독교의 한계를 '종교의 사유화'로 정의한다. 즉 개인의 신앙고백은 있으나, 공적 영역에서 복음이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종교가 사유화될 경우, 종교는 우리 삶의 영역에서는 허용되지만 주요한 공적 영역들 속으로는 들어가지 못한다(17쪽)."

결국 이러한 종교의 사유화는 주님을 개인적인 구주로 여길 뿐, 더 이상의 기대는 하지 않는 '마약'과 같은 기독교로 전락시킨다. 반대로 자유주의적 설교는 공적 구원을 개인 구원으로 치환시켜 개인의 종말을 가져온다. 이러한 이분법적 설교는 성경이 말하는 바른 설교관이라 할 수 없다.

저자는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강력한 설교는 '적용'에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 복음주의는 공항에서 비행기를 이륙시켰다. 그러나 착륙하지 않고 하늘을 계속 운항 중이다. 삶과 현장이라는 또 다른 공항, 즉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저자는 마치 기장처럼, 설교라는 비행기를 적용이라는 공항으로 이끈다.

2장에서는 목적지인 교인들의 현장, 비행기는 설교이며, 화물은 '하나님의 말씀(23쪽)'이다. 저자는 끊임없이 교인들의 '현장'을 세심히 살피라고 강조한다. 4장의 도착지에서 바라본 풍경과 5장의 '공항'은 실제로 교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다.

'하나님이 중심에 계시는 피조세계'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4장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조망한다. 그러니까 설교가 도착해야 할 목적지인 이 세상은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현장이며, 성경으로 재해석되어야한다. 그 현실 속에서 '무한한 속도로 다가오시는 하나님(43쪽)'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 그것이 설교다. 바른 설교는 청중으로 하여금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현실에 의해 압도(42쪽)'되게 한다. 5장에서는 '회중 가운데 실제로 말씀이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살피기 위한 창의적인 방법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105쪽)'고 도전한다.

즉 비행기는 착륙되어야 한다. 착륙할 공항이 어떤 곳인지, 공항의 상태는 어떤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면 설교는 반드시 불시착하고 말 것이다. 결국 설교자는 '이중 듣기'를 해야 한다. 하나는 성경이라는 텍스트, 다른 하나는 현장이라는 콘텍스트다.

"설교자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문화 속에서 지금이 어떤 '때'인지에 대해 가능한 한 깊은 인식을 갖는 것이다. 존 스토트는 설교자들에게 '이중 듣기(double listening)'의 필요성을 환기시킨다. 설교자는 한 귀로는 "성경의 말씀을, 다른 한 귀로는 우리의 문화가 내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73쪽)."

현장이라는 세계는 객관적 시각으로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삶의 현장은 성경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일부로서 역사와 삶을 해석할 때 진짜의 삶을 볼 수 있다.

그럼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이라는 곳은 어디일까? 저자는 성경을 6막으로 구성된 드라마로 여길 것을 제안한다.

1. 하나님이 그분의 나라를 세우시다: 창조
2. 그 나라 안에서의 반역: 타락
3. 왕이 이스라엘을 택하시다: 구속의 시작
   -왕의 백성
   -땅,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왕
   막간: 끝을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 신구약 중간기
4. 왕의 오심: 성취된 구속
5. 왕에 대한 소식의 전파: 교회의 사명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그리고 온 세상 속으로
6. 왕의 귀환: 완성된 구속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5장이다. 이러한 역사는 하나님 나라라는 성경의 이야기 속에서 재해석되어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미완의 셰익스피어 작품을 가지고 '즉흥적으로 드라마(55쪽)'를 만들어 실연한 것과 같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불가피하게 세상을 성경이란 '렌즈(66쪽)'로 보아야 한다. 성경 속에서 바라본 역사가 참이다. 존 칼빈의 말처럼 성경은 색안경이 아니라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이 도움을 받는 안경이다.

"한편으로 성경의 이야기는 놀라울 만큼 계시적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해석학을 제공하며, 교회가 우리가 그 웅장한 이야기의 어느 부분에 들어맞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56쪽)."

분명 성경의 이야기는 현대와 다르다. 하지만 성경의 이야기는 전 역사를 아우르는 계시다. 창조부터 재림까지는 하나의 이야기다. 성경이라는 참 이야기 속에 청중들의 현장이 존재한다. 설교자는 성경 속에 파묻혀 살면 안 된다. 현장으로 나아가야 한다. 삶이라는 현장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일하시는 일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도는 서론에서 자유주의적 설교와 복음주의적 설교가 갖는 이분법적 설교 형태를 벗어나 성경적인 바른 설교로 인도한다. 그렇다면 바른 설교는 '성경 해석', '현장 해석', 그리고 '성경적으로 현장을 재해석하기'라는 3단계를 거쳐야 한다.

6장에서 설교의 예를 제시하면서 성경 본문의 이야기를 어떻게 삶에 적용시켜야 하는 가를 보여준다. 하지만 여전히 성경을 삶에 적용하는 것은 어렵다.

3장은 의미심장하다. 설교다운 설교가 되기 위해서는 설교자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설교라는 비행기를 운행하는 기장은 설교자이다. 그러나 저자는 기장은 설교자가 아니라 '성령(34쪽)'이라 답한다.

왜 성령일까?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스스로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무를 필요(35쪽)'가 있고, 말씀이 자신을 인도하도록 해야 한다. 즉 설교자가 먼저 성령이 자신을 인도하는 기장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경건 생활이 없는 설교자는 스스로 자가당착(自家撞着)의 사람이다. 바쁨을 자랑하는 목회자는 나쁜 목회자이다. 그는 성도를 위하여 바쁘지 말아야 하며, 보이는 일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에 충성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도와 말씀에 대한 헌신은 숨겨져 있기 때문'(39쪽)이다.

설교로 고민할 때 함께 신학하던 형제와 '적용 논쟁'이 일어났다. 나는 적용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했고, 그 형제는 적용은 성령님이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여 '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형제에 의하면 설교자는 강해만 잘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 형제의 주장이 틀렸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은 정치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기 때문(64쪽)'이다. 성경이 틀렸다고 말했다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틀렸다고 말해야 한다. 성령님이 인도하시도록 방치하는 것은 직무유기다.

올리버 오도노반에 의하면 '신학이 복음적인 것이 되려면 반드시 정치적이어야 한다(65쪽)'. 선지자들의 죽음과 세례 요한의 목 베임,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다분히 정치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삶에 뿌리내리지 않은 설교는 아편이다.

난 그렇게 믿는다. 바른 설교자라면 성경이 말하는 세상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적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결국 삶에 뿌리내리기 전에, 삶을 해석하는 성경에 먼저 뿌리내리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니 존 스토트의 주장처럼 '이중 듣기'는 불가피한 것이다.

마지막 책을 덮으면서, 왜 이 책 제목이 '엑설런트 프리칭'인지 생각했다. 수사학적 기교나 청중을 휘어잡는 기법 등이 없는데 말이다. 필자의 소견으론 '현장에 대한 집요한 강조'라고 믿는다.

저자는 성경의 권위를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현장성을 중요시한다. 설교에 대한 불시착은 현장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부제를 '성경과 오늘의 세계를 잇는 설교'라 붙인 이유가 그것이다.

나는 부제의 마지막 단어인 '설교'를 '성령의 임재 속에서 살아가는 설교자'로 수정하고 싶다. 그만큼 설교자의 삶은 중요하다. 성경과 청중, 그리고 성령의 임재 속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설교자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엑설런트 프리칭'이 가능한 예배가 되지 않을까?

130쪽 분량의 소책자 수준임에도, 실용적이며 탄탄하다. 특히 문장들이 독자들로 하여금 공감을 일으킨다. 밑줄 친 문장을 몇 개 가져와 서평을 마무리한다.

"영광 중에 계신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을 이끌어 죄와 굴레로부터 탈출시키는 여행을 하고 계신 중이었다(43쪽)."

"나는 성경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는 여행의 침전물이며 그 여행은 그리스도 사건에서 절정에 이르는 것이라고 여기기를 좋아한다(51쪽)."

"설교자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문화 속에서 지금이 어떤 '때'인지에 대해 가능한 한 깊은 인식을 갖는 것이다. 존 스토트는 설교자들에게 '이중 듣기(double listening)'의 필요성을 환기시킨다. 설교자는 한 귀로는 성경의 말씀을, 다른 한 귀로는 우리의 문화가 내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73쪽)."

정현욱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에레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