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오늘은 많이 힘들었죠? 어제부터 당신은 내게 물었어요. 내가 그곳에 가야 하냐고? 왜 나에게 이런 힘든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다고 했어요. 하나 넘으면 또 하나의 산이 있고, 강하나 건너면 더 넓은 바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네요.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이리 힘든 적이 몇 번이나 될까요? 누군가에게 하루는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몸부림치며 살아내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파했을 당신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너지는 것만 같습니다. 당신이 조금만 더 이기적이고 조금만 더 독한 사람이었다면, 그런 고민 따위는 있지도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혹시나 자신 때문에 누군가 누를 끼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당신을 보면, 아직도 당신 같은 사람이 있는가 싶어 의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이리도 착한 당신에게 고난이 많을까요?
그래서 오늘 당신에게 좋은 책 한 권을 소개하고 싶어 꺼내 들었습니다. 영국의 저명한 인문학자요 교인이면서 신학자를 능가는 신학적 통찰력을 가진 C. S. 루이스(Lewis)의 <고통의 문제>라는 책입니다. 아마 이 책도 최소한 세 번은 읽은 것 같습니다. 책을 사면 날짜와 이름, 구입한 장소를 적고 마지막으로 사인을 하죠. 그런데 이 책에는 그런 신고식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여기저기 뒤적거려 보니, 뒤 내지에 학생처장의 계좌가 보였습니다.
학생처장, 그 학교는 신학대학원입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이 메모는 학생처 직원으로부터 등록금을 내라는 전화를 받고 적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 직원은 내게 '만약 수업료를 OO까지 내지 않으면 퇴학되고 졸업은 할 수 없습니다'고 말했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알겠다고 했고, 난 당시 수업료를 관리하던 학생처장의 계좌번호를 달라고 해서 받아 적은 것입니다. 그때가 졸업을 얼마 앞둔 신대원 3학년 겨울이었습니다.
그리고 16년이 흘렀고, 여전히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고 지겹도록 괴로웠던 가난과의 전쟁은 나의 마음을 지리멸렬(支離滅裂)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목사이기에, 돈을 버는 직업이 아니기에 어쩔 수 없었어'라고 자위해 보아도, 찢어지게 아픈 가난을 변명하기에는 저의 삶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픔에 대해서는 당신은 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일본에서 태어난 당신은 한국에 건너와 10대를 보내야 했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을 다녔지만 결코 당신의 인생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잔인하고 무능한 남편으로 당신은 가슴 시린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세 자녀를 홀로 된 몸으로 지켜내면서 신학을 했을 때도, 당신은 하루하루 연명하듯 살아갔습니다. 겉으론 멋진 사역자, 훌륭한 전도사였지만 속은 문드러지고, 삶은 한 푼이 아까운 남루함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자녀들은 당신의 삶을 보며 '우린 절대로 신학은 하지 않을 거예요'라며 우겼죠. 아니 고3 딸은 신학과가 있는 고신대도 가기 싫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초롱초롱 빛나는 교회 아이들을 바라보며 행복해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청소년을 전도하겠다는 열정으로 불탔습니다. 시간과 물질, 그리고 자식들까지 희생해 가면서 열심히 섬겼던 교회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빈털터리가 되어 저의 곁에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어찌 이리 구겨진 종이 같을까요? 그래서 오늘 당신과 함께 나누고 싶어 C. 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를 꺼내 읽습니다.
C. S. 루이스에 대한 저의 추억은 결코 적지 않습니다. 언제부터, 어떻게 읽게 되었는지 그 근원을 알 수 없지만, 번역된 모든 책을 다 읽겠다는 다짐으로 루이스의 책들을 사들였고 읽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아무래도 <순전한 기독교>일 겁니다. 또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도 무척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감동적인 책은 루이스의 회심을 다룬 <뜻밖의 기쁨>이란 책이었습니다.
자전소설처럼 써 내려간 그의 회심 이야기는 '노크'라는 단어에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은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완악한 루이스의 마음의 문 앞에 섭니다. 그리고 노크합니다. 똑똑똑. 노크하시는 하나님, 그 신비스러운 정의에 울컥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찾아오시니까요. 그리고 노크하시죠. 노크하시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와 교제하시고 싶기 때문이죠.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오늘 이 책을 통해 당신과 저의 마음을 노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길 원합니다. 이 책은 어떤 사람이 루이스가 무신론자일 때 던진 질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왜 하나님을 믿지 않느냐?"
루이스는 답변합니다. 우주를 보라. 얼마나 어둡고 추운가. 자연계를 보라 서로 먹고 먹힌다. 그들은 삶 자체가 고통이다. 인간은 어떤가? 역시 삶 자체가 고통 아닌가? 가난, 사기, 전쟁과 질병과 테러가 난무하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을 내립니다.
"당신이 이런 우주를 자비롭고 전능한 영의 작품으로 믿으라고 한다면, 저는 모든 증거가 오히려 정반대의 결론을 가리키고 있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즉 우주의 배후에는 어떤 영도 존재하지 않거나, 선과 악에 무관심한 영이 존재하거나, 악한 영이 존재하거나 셋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19쪽)".
저는 루이스의 대답이 결코 가볍거나 우습게 여길 것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정말 우주나 세상을 볼 때, 이 말은 거짓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발달사를 보십시오. 진화론자들이든 성경이 말하는 역사든 간에 인류의 역사에서 평화로운 적이 몇 번이나 있었고, 행복하고 죽음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이 존재하기나 했나요?
석기에서 청동기로 넘어갈 때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역시 불행했습니다. 그들은 더 강력한 무기로 서로를 죽이고 정복했습니다. 철기 시대로 넘어가도, 최첨단 핵의 시대가 도래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두려워하고 삶의 짐을 무겁게 진 채 가고 있습니다.
과학의 발달과 인간의 행복은 절대 정비례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통스러운 존재입니다. 루이스는 1장을 마무리하면서 '고통을 배제한다는 것은 삶 그 자체를 배제하는 것(50쪽)'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래요. 맞아요. 삶이 고통이에요. 그럼 왜 고통이 찾아올까요.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지으셨는데, 세상에는 왜 악이 있고 고통이 존재할까요? 어거스틴이 한때 빠졌던 마니교처럼 간편하게, 세상에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며 서로 싸운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에 빠져들 것 같습니다.
세상을 그렇게 단순하게 보기에, 우리가 가진 기독교 신앙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루이스는 다시 하나님의 선함이 무엇인지 탐색해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선함을 이야기하는 루이스는 갑자기 적자와 서자의 이야기를 끌고 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아들을 징계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히 12:6-9)".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시는 것이고, 그 징계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꾸짖고 책망하신 적은 자주 있었지만 우리를 경멸하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61쪽)'.
맞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속의 악함을, 고난을 통해 징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더 사랑하지 말고 덜 사랑해 주기를 바라게 됩니다(63쪽)'. 당신은 이 부분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사실 이 부분을 읽고 마음에 많이 찔림을 받았어요. 그러나 여전히 이 무거운 짐을 지기 싫어, 마음으로는 하나님께서 덜 사랑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을 뿐이니까요.
그런데 루이스는 우리의 그런 마음을 간파했는지,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현재의 우리 모습에 만족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하나님이기를 그만 두시라고 요구하는 것(70쪽)'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 안에 남아있는 흠들을 고치시고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표현은 박영선 목사의 <하나님의 열심>이란 책에서 말한 그 의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니까요. 질투는 사랑이고, 그 사랑은 우리를 향한 거룩의 열망이니까요. 맥스 루케이도의 <예수님처럼>이란 책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변화되기를 원하신다'는 말도 통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께 덜 사랑해달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만 멈추어 달라고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과 고통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너무나 아프고 힘이 드네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지만 고통으로 찾아오는 사랑을 누가 환영하겠습니까? 부모는 자식이 거룩하게 되기를 바라지만 고통 속에서 지내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고통을 싫어하는 인간의 본성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고통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으면서도 괴로움을 싫어하는 딜레마에 빠진 인간의 실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자유의지론>에서 악의 기원을 정욕에 정복된 의지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하는 자연인들은 의지의 자유를 탐욕에게 빼앗겨 필연적 멸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악의 습성을 남아있는 육체를 벗지 않는 한 어느 정도의 악을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고난을 주시며, 고통은 우리 안의 탐욕을 말씀에 굴복시키게 만듭니다.
고통은 우리를 떠날 수 없습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넌 아직 영화에 이르지 않았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너무나 아픈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141쪽)".
고통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랑의 세리머니입니다. 고통이 없는 자들은 영혼의 잠을 자는 자들이며, 죽은 자들입니다. 키에르케고어는 <스스로 판단하라>에서 잠자는 자들, 즉 술 취한 자들에 대해 경고합니다.
"결과적으로 세속주의는 기독교가 술 취했다고 생각하고 기독교는 세속주의가 술 취했다고 생각한다(11쪽)".
고통은 '만사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환상'을 깨뜨립니다. 실제로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하나님의 고통입니다. 죄인들을 구원(사랑)하기 위해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입니다. 그것은 아픔이고 고통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의 표상입니다.
그러나 결국 십자가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러브콜이 됩니다.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인간에게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이 분명합니다. 간사하고 악한 인간은 고통이 사라지는 순간 다시 세상의 허무한 '장난감(160쪽)'에 한눈을 팔고, '싫어하는 목욕을 끝낸 강아지 꼴(161쪽)'이 되어 더러운 거름 더미로 자신의 몸을 던질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에게 고통은 필연이고 운명이 분명합니다. 그런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결코 달갑지 않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통이 깊어지면 영혼의 성장과 인격의 성숙을 이루어 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파괴적인 효과(241쪽)'를 내기도 합니다. 이것은 '고통의 원인을 직시하거나 알아보지 못할 때'입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우리 안에 있는 악을 버리기를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분명히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충고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현재의 고통을 잘 참고 이겨낸다면 분명 우리에게 좋은 미래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현세이든 내세이든 분명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딸 후우카여! 힘을 내십시오. 아직 우리가 절망할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뜻이고, 말씀하고 계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진 이 기회들을 불평과 원망으로 채우지 말고 더 깊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시간으로 채워가길 원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더 거룩하여진다면,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더 기쁠까요? 또한 한 편으로 고통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질 멋진 기회를 붙잡는 수고 또한 멈추지 않길 소망해 봅니다. 루이스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힘을 주네요.
"고통은 영웅의 자질을 드러낼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놀라울 만큼 많은 이들이 그 기회를 잡고 있습니다(242쪽)".
그러니 조금 더 힘내요. 고난은 우리를 본질에 천착하게 합니다. 어쩌면 고난은 우리 둘 사이의 접착제가 되어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고, 환상이 아닌 진정한 서로의 모습을 보게 하여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실 것입니다.
고난은 결국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이고,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속삭임이라 확신합니다. 저도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고난과 슬픔의 터널을 함께 지나는 동안 든든한 영혼의 동반자로 세워지길 소망합니다.
정현욱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