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교회 김지철 목사가 21일 자신의 SNS에, 영화 '사일런스'를 본 소감을 남겼다.

김 목사는 특히 "영화에는 케리그마(말씀 선포)가 없다. 영화는 사람들이 성상을 밟느냐 밟지 않느냐로 신앙을 축약시켜 버린다. 이것이 영화의 한계성이고, 17세기 가톨릭교회의 한계성이 아닌가 여겨졌다"고 했다.

이어 "결국 일본의 지금의 문화가 기독교의 복음보다 더 우월하다는 일본인들의 자부심이 드러나는 영화는 아닌가 하는 점"이라며 "'더 이상 기독교 복음은 일본 땅에 씨앗을 뿌릴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 아닐까? 즉 배교의 형태, 기껏해야 문화로 포장된 복음이 아니라면 일본인의 삶의 자리에 깊이 뿌리를 내릴 수는 없는 것 아닌가라는 절망감"이라고 했다.

김 목사는 "나는 목사로서 이 영화가 불편하다.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에게 흔쾌히 권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신앙 선배들의 고난을 생각하길 원한다면, 또 우리 현실을 다시 새롭게 보길 원한다면 한 번 보아야 할 영화가 아닐까"라고 전했다. 다음은 그의 소감 전문.

영화 <사일런스> 중 한 장면. ⓒ영화사
 영화 <사일런스> 중 한 장면. ⓒ영화사

'케리그마' 없는 <사일런스>

'사일런스(Slience)'라는 영화를 보면서 나는 계속 마음이 무거웠다. 진짜 침묵 속에 빠졌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쉽게 일어날 수 없었다. 침묵으로 시작된 영화가 마지막까지 침묵으로 일관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간에 뭔가 생명이 약동하는 모습을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영화를 보면서 불편한 마음이 쉽게 사라지질 않았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인간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가? 그리고 동시에 인간이 지조 있게 신념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이런 인간의 연약성이 내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권력을 가진 자의 집요한 핍박과 잔인함이 아주 실감 나게 펼쳐진다. 그것도 아주 '멋진 권력자들(?)'이 지닌 혹독한 무자비함이었다. 그것은 매우 심리적이고 전략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반대로 핍박을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연약한 백성들이며, 천민들이었다. 그들의 신앙은 때론 그 기복주의적인 천박성과 무기력함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둘째로, 주인공인 로드리게스 신부가 그의 스승이었던 '페레이라 신부'와는 달리 마지막까지 자기 신앙을 지키기를 바라는 나의 속마음 때문이었을까? 주인공이 마지막 순간에, 당당히 '나는 순교하겠다'고 용감하게 나서지 못한 것을 보면서 실망했기 때문일까?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을 기대했기 때문이었을까? 순교보다 아름다운 배교처럼 느껴졌기 때문일까? 하지만 결코 그것만은 아니었다.

저자가 밝힌 것처럼 우리 신앙의 역사는 믿음의 영웅들의 발자취로 만들어진 것이 사실이다.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신앙의 지조를 마지막까지 지켰던 사람만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엔도 슈사쿠가 '침묵'을 집필하게 된 동기를 들어보자!

"후미에(성상)를 밟지 않았던 사람은 결국 고문을 받고 죽어갔다. 그들은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 편, 본의는 물론 아니면서도 후미에를 밝았던 '약한 사람들'도 있었다. 누구를 막론하고 후미에를 밟고 싶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나는 기리시단(그리스도교) 시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곧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교자가 될 수 없었던 사람들, 즉 자신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신앙을 버렸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은 그 어느 교회에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념을 관철했던 강자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었지만 배교자, 말하자면 '썩은 사과'에 대해서는 당시의 교회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학교가 낙제생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과 같았다."

순교자들은 물론 우리의 모형이지만, 막상 그 고난의 자리에 들어서면 그 누구도 그런 길을 갈 수 있다고 장담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주님을 부인하는 것을 '누구도 해서는 안 되고, 누구도 하기 싫다!'고 다 속으로는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의 고난과 죽음의 공포가 어쩔 수 없이 거부하며, 배교의 자리에 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감독(원작)은 그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도 아픔이 있었다. 그리고 할 이야기가 있었음을 표현해 주려고 하고 있다. 물론 그런 뒷면의 이야기를 우리도 알고 함께 아파하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기독교적인 메시지를 희망을 품고 바라본다면 몇 가지를 찾아낼 수 있다. 배교와 회개를 반복하는 '키치지로'의 과정이 곧 우리의 모습과도 오버랩 된다. 마지막 순간에 그의 얼굴이 빛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로드리게스가 죽은 후에 그의 아내가 마지막 그의 손에 쥐여준 것은 바로 십자가상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의 부인이 남편의 죽음에도 울지 않았다는 것을 통해서 영원한 부활을 상징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감독의 숨겨진 메시지를 찾는 것이리라.

엔도 슈샤쿠는 '침묵'에서 배교 이후 로드리게스 신부의 회고 장면을 이렇게 쓰고 있다.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형태로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 내가 그 사랑을 알기 위해서 오늘까지의 모든 시련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이 나라에서 아직도 최후의 가톨릭 신부이다. 그리고 그분은 결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비록 그 분이 침묵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나의 오늘까지의 인생은 그분과 함께 있었다. 그분의 말씀을, 그분의 행위를 따르고 배우며 그리고 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교한 후에 그는 성상을 감별하는 일을 맡으며 얼마나 반복적으로 순교자와 비순교자를 결정했을까 하는 현실적인 물음이 끊이질 않는다.

영화 자체가 긴박하게 돌아가는 것, 그리고 뛰어난 영상미 등은 참으로 놀랍다. 하지만 감독인 마틴 스콜세지의 종교관이 그대로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 즉 종교에 연연하지 않는 문화로서의 종교에만 관심이 있는 그의 태도이다. 마틴 스콜세지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신앙을 잃은 가톨릭교도이다. 하지만 로만 가톨릭교도이고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I'm a Catholic. But I am Roman Catholic, there's no way out of it.)"라고 했다.

전체적으로 영화의 몇 가지 아쉬움을 이야기 하고 싶다. 첫 번째로 영화에 나오는 권력자의 말처럼 일본은 복음이 심어지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늪 같은 곳은 아닌가? 그 후에 일본의 종교 상황을 보면서 가슴이 아파왔다. 2010년 일본의 종교인 통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 인구 1억 2700만 명 중에서 불교 69.9%, 기타 23.7%, 무종교 5%, 회교 0.15%), 개신교(기독교) 0.69%(약 87만 명), 가톨릭 0.4%.이다. 당시 17세기에 엄청난 신앙에 대한 핍박과 실제적인 배교 이후에 정말 복음의 역사가 침묵한 것은 아닐까?

두 번째로 17세기에 일본에 전해졌던 당대의 가톨릭 신부들은 결국 성상과 성물을 통한 성례전을 신앙의 표상으로 삼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성상이나, 성물 위주였던 것과 달리 케리그마인 말씀이 함께 나눔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영화를 보면서 계속된 안타까움은 그런 부분은 전혀 언급이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신앙이란 성물이나 성상을 밟는냐? 밟지 않느냐?는 어쩌면 주술적인 틀에 의해서 신앙을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말씀 한 구절이라도 인용이 되었더라면 하는 기대였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영화에는 케리그마가 없다. 영화는 사람들이 성상을 밟느냐 밟지 않느냐로 신앙을 축약시켜 버린다. 이것이 영화의 한계성이고, 17세기 가톨릭교회의 한계성이 아닌가 여겨졌다.

세 번째는 결국 일본의 지금의 문화가 기독교의 복음보다 더 우월하다는 일본인들의 자부심이 드러나는 영화는 아닌가 하는 점이다. '더 이상 기독교 복음은 일본 땅에 씨앗을 뿌릴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 아닐까? 즉 배교의 형태, 기껏해야 문화로 포장된 복음이 아니라면 일본인의 삶의 자리에 깊이 뿌리를 내릴 수는 없는 것 아닌가라는 절망감이다.

나는 목사로서 이 영화가 불편하다.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에게 흔쾌히 권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신앙 선배들의 고난을 생각하길 원한다면, 또 우리 현실을 다시 새롭게 보길 원한다면 한 번 보아야 할 영화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