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스는 게 두렵지, 닳아 없어지는 건 두렵지 않다"며 한국 최고령 목회자로 103세까지 피의 복음을 전파하다 지난해 10월 10일 새벽 소천한 방지일 원로목사의 1주기 추모예배가 6일 오후 3시 영등포교회 대예배실에서 진행됐다.
이날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 젊은 시절 영등포교회를 거쳐간 교역자 등은 한결같이 "아직도 방 목사님이 살아계신 것 같다"고 말했다. 당회 서기 서영호 장로는 "목사님이 해외나 지방으로 설교하러 많이 다니셔서 지금도 목사님이 미국 설교 여행 갔다가 돌아오실 것만 같다"고 했다.
1967~76년까지 영등포교회에서 부목사를 지냈던 성종식 목사(원삼중앙교회 원로목사)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의논할 사람이 없을 때는 방 목사님의 빈 자리가 느껴진다"고 했다.
▲6일 오후 진행된 고 방지일 목사 1주기 추모예배에서 박종순 목사(충신교회 원로)가 설교했다. ©영등포교회
3세때 아버지를 잃어 영등포교회에서 전도사로 있으며 방지일 목사를 아버지처럼 여기게 됐다는 이날 설교자 박종순 목사(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증경총회장, 충신교회 원로)를 비롯해 이날 배포된 방지일 목사의 추모문집에는 방 목사에 대한 감사의 기억을 간직한 수많은 이들이 등장했다.
이 문집에 글을 싣지는 않았지만 중학교 3학년때부터 영등포교회와, 방지일 목사와 삶을 함께 했던 이경득 장로도 그 중에 한 명이다. 이 장로는 1953년 6세의 나이로 어머니 손에 붙들려 영등포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그가 중학교 3학년때 방지일 목사가 영등포교회에 담임목사로 왔다고 했다.
"집이 교회 근처인데다 놀데가 교회밖에 없어 교회에서 살다시피했다"는 이 장로는 "여기가 그 자리"라고 했다. 교회 신축을 준비하는 영등포교회는 현재 옛 영등포교회 자리 건너편인 현대프라자 2층을 빌려 예배를 드린다. 이 자리가 원래 영등포교회 자리였다고 한다.
방 목사의 잔심부름은 중학생인 이 장로의 몫이었고 내년 장로 은퇴를 앞둔 때까지 옆에서 많이 모셨다고 했다.
"다른 분들이 목사님을 뵈러 가면 보통 7~8분은 문 앞에서 기다려요. 목사님이 정장을 하고 나오시거든요. 어릴때부터 형식적이지 않은 자리에서 많이 봐서인지 제가 가면 내복 바람, 파자마 바람으로도 나오세요"라고 이 장로는 말했다.
방지일 목사는 언제나 이 장로가 오면 "'냉장고 뒤지라'고 하고는 비닐팩을 갖고 와 '다 가져가라우' 하셨다"며 "방 목사의 집을 찾은 손님들이 선물로 주고 간 간식들을 다 가져오고 꼭 8층 식당에서 밥을 먹고 가야됐다"며 감사한 기억을 떠올렸다.
▲6일 오후 영등포교회에서 진행된 고 방지일 목사 1주기 추모예배 후 방지일 목사의 영정사진 주위에 둘러서 시무장로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영정사진 왼쪽 첫번째가 이경득 장로 . ©영등포교회
방 목사가 소천하시던 날 이야기도 했다. "목사님 댁에 갔더니 목사님이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다고 하셔서 병원에 갔다. 그래서 교회 장로들도 다 교회로 갔다. 장로들을 보시고 목사님이 '기도하라우' 하셔서 기도하고 난 후에 혼수상태에 빠지셨다"고 했다.
이 장로는 "재작년 방 목사님이 102세때 한 기자가 찾아와서 장수의 비결을 물었더니 막 사는 것이라고 얘기하셨는데 그건 신앙적으로 말하면 지금 잘 먹고, 내일은 없고 오직 오늘에 최선을 다하고 충실하라는 의미이다"며 "그날도 편찮으시고 8시간만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날도 최선을 다해 사신거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장로는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3개월간 고생했다. 안계신데 밥 먹을때도 옆에 오셔서 '많이 먹으라우' 하시는 것 같고 잠 잘때도, 앉아 있어도 생각이 나고 성경을 읽어도 생각이 났다"고 했다.
"방 목사님은 성경에 대해서 물으면 답을 잘 안 가르쳐주셨다. 대신 어디 몇번 읽으면 안다고 하셨다. 읽어서 내가 스스로 알게 하셨다"
대표기도를 준비할 때도 생각이 많이 난다고 했다. "제가 장로가 되니까 목사님이 '원고를 잘 쓰라우' 이 얘기를 하셨다. 기도의 틀을 가르쳐 준 다음에 원고를 써서 일주일간 고치고, 또 고치고 한 다음에 '달달 외우라'고 하셨다. 근데 못 외우면 원고를 갖고 올라가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이 장로는 "기도문을 다 쓰고 나서 다시 보면서 내 얘기는 빼고 말씀에 벗어난 것도 고친다"며 "기도 중에 십자가, 피, 선교는 꼭 들어가야 한다고 하도 강조하셔서 이것이 없으면 다시 썼다"고 했다.
그는 "이번 추모문집에 낼 글도 A4 3매로 썼는데 원고를 몇번 읽어 보니까 전부 내 얘기라서 안냈다"고 덧붙였다.
이경득 장로는 "방 목사님이 이렇게 큰 분인줄 모르고 살았다. 옆에 늘 계시니까...백두산이 위대한 산인지 거기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너무 커서... 백두산은 너무 큰데 우리는 너무 작으니 그렇다"며 "백두산을 내가 감히 쓸 수 있나"라고도 했다.
6일 오후 진행된 고 방지일 목사 1주기 추모예배 후 방지일 목사의 직계 유가족 장남 방선기 박사와 자부 정금영 박사(영정사진 오른쪽에서 첫번째, 두번째)와 장녀 방선자 장로(영정사진 왼쪽에서 첫번째)와 유가족들이 기념촬영했다. ©영등포교회
그에게 방지일 목사 하면 가장 기억이 남는 것이 언제냐고 물었더니 "목사님이 나를 한번 살려준 적이 있다"며 고등학교 1학년때 세례문답을 받을 때였다고 한다. 당시는 교회의 장로들이 세례 지원자들에게 질문을 했었는데 깐깐하기로 유명한 한 장로가 그에게 "예수님이 33살때 십자가에서 죽으셨지. 그러면 복음 전도를 하신게 한 15~20년 되시겠나" 라는 질문을 했는데 거기에 걸려 틀리게 답한 것이다.
그때 방지일 목사가 눈치를 채고 이경득 장로에게 다가와 "예수를 구주로 믿습니까?"라고 물어 "네. 믿습니다"고 크게 대답했더니 "세례 받을 자격 있구만"하면서 도장을 쾅 찍어 주시더라고 기억했다. 이경득 장로는 "요새도 세례문답을 할 때 그 생각이 난다"며 그래서 "예수님 구주로 믿으시죠?"라고 꼭 묻는다고 했다.
그리고 1989년에 이 장로가 중국 출장을 다녀오며 선물로 사온 '꿀에 잰 대추'에 감격해하던 방지일 목사의 반응도 전했다. 방 목사는 "30년 만에 먹어 보는 것이다. 산동성에 있을 때 먹어본 음식이다"며 "그런 칭찬을 잘 안하시는데 잘 먹었다고 하시면서 중국 또 안가냐고 하셨다"고 회상했다. 가 꼬들꼬들한 '족발'을 좋아하셨다고도 했다.
이경득 장로는 장로 은퇴 이후에 방지일 목사를 회고하는 책을 낼 것이라고도 했다. 혹시나 '백두산'의 위엄을 희석시킬까 두렵고 조심스러운 마음이지만 말이다.
영등포교회는 성전이 신축되면 역사관 내부에 방지일 목사 기념관도 마련할 것이다. 이날도 방지일 목사의 생전 흑백 사진이 전시돼 눈길을 끌었다.
8일 오전 11시 30분에는 춘천 효신가족묘역(춘천시 신동면 증리 산 25)에서 추모예배가 진행된다. 이날은 김삼환 목사(예장통합 증경총회장, 방지일목사기념사업회 이사장, 명성교회 담임)가 설교하고 유의웅 목사(예장통합 증경총회장, 도림교회 원로), 림인식 목사(예장통합 증경총회장, 노량진교회 원로)가 축도한다.
26일 오후 3시에는 예장통합 총회 세계선교부 주최로 공모를 받았던 '방지일 선교신학 연구논문' 시상식 및 논문 발표회가 장로회신학대학교 소양관 204호실에서 개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