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총동문회(회장 홍문균 목사) 주최로 개교 34주년 기념 제26회 정암신학강좌가 '개혁교회와 신앙교육'을 주제로 11일 서울 양천구 목동 지구촌교회(담임 조봉희 목사)에서 개최됐다.

이날 '제네바교회와 신앙교육- 칼뱅의 제1차, 2차 신앙교육서를 중심으로'를 주제로 발제한 안상혁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는 "칼뱅은 '제네바 신앙교육서(교리문답서)'를 그의 제네바 종교개혁에 있어 중심적인 위치에 자리매김했다"며 "성경 전체의 진리 말씀을 요약한 '신앙교육서'를 가지고 교구민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효율적으로 교육하는 것을 그의 제네바 종교개혁의 핵심 과제로 간주했다"고 강조했다.

안상혁 교수는 "종교개혁은 교육개혁을 낳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성직자의 주된 역할이 바뀌어 중세의 사제는 미사와 성례를 집례했다면 개혁된 교회의 성직자들은 주로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쳤다"면서 그러나 제네바만 해도 '개혁된 교회'의 신앙과 말씀을 가르칠 성직자의 수가 부족했다고 말했다.

그는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도시였던 제네바도 1535년 말까지 종교개혁 도시로 변화됐다고 말할 수 있지만 문제는 도시 전체의 종교개혁을 각 교구 단위로 적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며 "각 교구에서 개혁된 신앙을 설교하고 가르칠 수 있는 충분한 수의 성직자를 공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했다.

제네바의 종교개혁가 기욤 화렐의 설득으로 1536년 제네바 종교개혁에 칼뱅 또한 "제네바의 정치적이며 종교적 정황을 숙지하고는 도시 안에서 진정한 교회개혁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는 '고등교육을 받은 성직자 확보'와 '교구민과 그들의 자녀를 바른 교리로 교육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고 안 교수는 말했다.

그러면서 안 교수는 칼뱅과 화렐이 작성해 1537년 1월 16일 시의회에 제출된 '제네바 교회의 조직에 관한 시안'에서 '자녀 교육'에 관한 부분을 소개했다.

여기에는 "우선 모든 어린자녀들을 교육시키기에 적합한 간단하고 쉬운 기독교 신앙의 요강(要綱)을 마련합니다. 자녀들은 일 년 중 정해진 기간에 목회자들 앞에 나와서 문답시험을 치르고 각자의 능력과 필요에 따라 추가적인 교육을 받되 교육이 충분하게 이루어졌다고 인정될 때까지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부모들로 하여금 그들의 자녀들이 상기한 요강을 열심히 배우도록 신경을 쓰고 또한 공지된 날에 목회자들 앞에 그들의 자녀들을 데리고 오는 일을 성실함으로 감당할 것을 명령해야 합니다"고 기록돼있다.

안상혁 교수는 이같은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칼뱅은 같은 해에 제1차 신앙교육서를 불어로 집필해 33개 항목으로 주요한 교리들을 간략하게 해설했다고 말했다. 1538년 겨울에는 동일한 내용을 라틴어로 번역해 출판했으며 1542년에는 불어로 작성된 제2차 신앙교육서를 출판하고, 3년 후 같은 내용을 라틴어로 출판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제1차 신앙교육서는 칼뱅의 기대만큼 활용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제1차 신앙교육서 불어본과 라틴어본이 출판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538년 4월 칼뱅이 파렐과 함께 제네바에서 추방됐기 때문이다.

칼뱅은 3년 후 제네바 시의회의 초청을 받아 1541년 9월에 다시 제네바로 돌아온다. 안 교수는 이때도 칼뱅은 시의회가 "신앙교육과 권징을 성실하게 실천할 것을 약속한 후'에야 허락했다고 말했다. 또한 칼뱅은 본격적인 교회개혁의 착수에 앞서 '교회법규안'을 작성해 시의회에 제출하는데 여기에서도 칼뱅은 '교육'과 관련된 내용을 포함시킨다.

칼뱅은 '신앙교육을 담당할 교회의 두 직분'을 말하며 첫째는 '목사의 직분', 둘째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교사들'을 꼽았다.

'교회법규'는 같은 해 11월 공표됐으며 칼뱅은 얼마 후 제2차 신앙교육서를 출판하고 3년 후 같은 내용으로 라틴어로 번역해 출판한다. 안 교수는 "(라틴어본)서문에서 칼뱅은 신앙교육의 필요성을 또다시 강조한다"며 "올바른 교리문답 교육은 하나님의 교회를 바른 진리 위에 설립하고 다음 세대의 교회가 또 다시 진리로부터 일탈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실천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안 교수는 "제네바에서는 1544년까지도 적지 않은 수의 교구들은 (개혁된 신앙을 가르칠 성직자가 부족해)옛 사제들의 도움에 의존해야 했고 정치적 혼란으로 화렐과 칼뱅이 추방됐던 1538년에서 1541년 사이의 기간은 교구단위의 교회개혁을 지연시키는 주요한 장애요인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이러한 역사적 정황을 고려할 때, 1546년에 이르러서야 각 교구를 포함하는 제네바 도시 전체의 종교개혁이 비로소 안정화되었다고 진단한 윌리엄 내피(Willam Naphy)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고 말하며 "1546년은 칼뱅에 의해 '제네바 목사회'가 조직화된 해로, 1546년 이후로는 각 교구를 담당하는 성직자들의 교육수준이 그 이전보다 눈에 띄게 높아졌으며 이와 더불어 성직자들의 사회적이며 경제적 수준 또한 상향되었다"고 그 효과를 언급했다.

또한  "정암에 따르면 신앙교육은 자녀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신앙교육에 대한 이러한 정암의 정의와 적극적인 태도는 칼뱅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물론 칼뱅과 정암은 일차적으로는 그들 시대의 필요에 대한 반응으로서 신앙교육을 성실하게 수행했지만 교회의 신앙교육은 어느 한 특정 시대에 좀 더 필요하고 어느 시대에는 덜 요구되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