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처음 부르실 때에도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마 4:19]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중간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지금 나를 따라올 수 없다고 하십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요한 13:36)
지금 나를 따라올 수 없다던 베드로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베드로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기에 주님이 이제는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까? 이 때부터 베드로에게 사도행전의 역사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우리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들은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됩니까?
1. 베드로에게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image of God]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했을 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베드로가 처음 주님을 만날 때와 비슷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자 많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옆에 있던 요한이 주시라고 하니 베드로가 겉옷을 입고 물로 뛰어듭니다. 이해하기 힘든 행동입니다. 입고 있던 겉옷도 벗어버리고 물로 들어가야 할텐데 겉옷을 주어 입었습니다.
물로 달려갑니다. 별로 멀지 않는 거리여서 (90m 정도 떨어진 거리) 얼마 일찍 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조금이라도 주님을 일찍 보기 위해 물로 뛰어듭니다. 고기 잡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주님을 보는 것이 급했습니다. 이것이 달라졌습니다. 처음 주님을 만날 때는 고기를 더 거두어 들인 후 주님 앞에 나와 나를 떠나 달라고 부탁합니다. 지금은 주님인지 아닌지 확인이 안되었음에도 달려 왔습니다. 주님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주님은 더 이상 무서운 분도, 내 인생에서 떠나길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달려가 보고 싶은 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 Image of God이 변화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미지가 어떤지는 이런 질문으로 확인됩니다. 불꽃같은 눈길로 지켜보신다고 할 때 하나님의 어떤 모습이 상상되어집니까? 감시 카메라입니까? 아니면 자전거 보조 바퀴를 떼고 달리는 딸의 뒤를 쫓아 가는 아버지의 눈길입니까? 딸의 자전거가 넘어지면 곧 붙들어주기 위해 한 시도 눈을 떼지 않는 아버지의 사랑의 눈길입니다.
불꽃같은 눈길이 그렇게 느껴진다면 하나님의 이미지는 무서운 분에서 나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달라진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이미지가 그렇게 달라질 때 새로운 사역의 장이 열리게 됩니다. 무서워서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에 감격하여 하는 일입니다.
2. 베드로에게 자신을 보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Self image]
베드로는 조반을 먹고 있습니다. 어떤 심정으로 조반을 먹을 것 같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베드로는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떳떳한 모습으로 주님이 마련한 조반을 먹을 수 없습니다.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최후의 만찬 장면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주님은 제자 중 하나가 자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요한에게 그가 누구인지를 예수님께 묻도록 합니다. 요한이 묻자 예수님은 이 떡을 떼어 가져다 주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롯유다였습니다. 베드로는 안심이 되었고 또 늘 잘난척하는 유다가 그렇다는 것이 천만 다행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빌라도 법정에 서는 때 가롯 유다가 예수님이 무죄라고 소리를 높일 때 자신은 맹세하여, 또 저주하며 주를 부인했습니다.
즉 자신은 가롯유다만도 못한 자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남겨둔 제자 7명을 데리고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영적 사역을 포기하고 세상으로 간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찾아와 조반을 마련하시고 먹으라고 하십니다. 눈물겨운 조반을 먹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사랑에 빚진 자가 되었습니다. 부족하고 허물진 자신을 덮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격합니다. 주님의 긍휼을 입은 부족하고 허물진 자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아야 했습니다.
주님은 왜 주를 부인했는지를 (과거를)묻지 않았습니다.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허물지고 실수투성이인 베드로를 긍휼로 덮어 주신 것입니다. 그 사랑에 감격한 부족하고 허물진 자임을 인정합니다. 빚진 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새 자화상이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삶에 새로운 출발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에게 주님이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베드로의 대답이 달라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주를 부인할지라도 나만은 죽는데도, 감옥까지 따라가겠노라던 그가 이제 주님이 아신다고 겸손하게 대답합니다. 자신 만만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하던 자신감이 사라졌습니다.
내가 주를 따라 죽는 곳까지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붙드시고 가시는 것이구나. 자신을 의뢰하던 악을 떠나는 베드로의 모습입니다.[창 4:1 & 25절의 비교]
그뿐 아니라 세 번째 질문을 하실 때 베드로는 근심했습니다. 정말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의뢰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따라갈 때 사도 행전의 새 역사가 시작됩니다.
3. 베드로에게 형제를 보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Inage of World]
베드로가 넘어야 할 마지막 고개가 있었습니다. 요한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 나는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요한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 요한도 같이 십자가를 진다면 갈만 합니다. 나만 그렇다면 좀 억울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고 에베소로 내려가서 그 곳에서 남은 생애를 보내야 했습니다.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 3000명씩, 5000명씩 회개했습니다. 바울은 넓은 세상을 두루 다니며 복음 전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고 에베소를 한 발자국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어린 양을 먹이는 일
다른 사람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자기를 비교하며, 요한을 경쟁의 상대로 보고 있을 때 주님은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낮은 곳으로 내려가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 낮아지면 하나님 나라에서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낮은 자리에서 섬기게 됩니다. 베드로는 무엇을 보며 말하고 있습니까?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의 기준으로 요한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의 화려함과 풍요로움을 보는 시각과 태도가 달라질 때 베드로 앞에 사도행전이 열리게 됩니다. 새롭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질 때 무서운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달려가 그 품에 안길 수 있는 사랑의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께 달려가는 나 자신이 자랑스러운 공로자가 아니라 허물과 실수로 가득한 부족한 인생임에도 주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자화상을 가지고 세상의 화려함과 풍요로움이 아니라 어린 양을 돌보는 것이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베드로는 주님을 따라갈 수 있으며 주님으로부터 위대한 사명을 부여 받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 베드로를 통하여 사도행전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 되고 있습니다. 부족하고 허물진 우리들을 통하여 동일한 역사가 시작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