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6일 찬 새벽 바람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 버지니아 열린문장로교회에 모인 비전케어 멕시코 팀은 일찌감치 챙겨놓은 의료기구와 약품을 짐차에 옮겨싣느라 분주한 손길을 더욱 재촉했다. 이제 드디어 일주일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토요일 오전 버지니아에서 출발한 국제 실명 구호 단체 비전케어 제 120차 멕시코 캠프팀이 약 6시간을 날아 멕시코 치아빠스에 도착했다.(LA, 보스턴, 한국에서 온 비전케어 팀도 함께 조인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후덥지근한 멕시코의 열기가 느껴졌다. 목적지인 팔랑께까지는 약 2시간 정도 더 버스를 타고 가야하지만 봉사자들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친 기색보다 활기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주일이었던 다음날, 현지 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린 후 멕시코 전통 음식 타코를 대접받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시장을 가로지르는 아시안들이 신기한 듯, 곁눈질로 힐끗 힐끗 돌아보며 웃는 이들, 엄마 치마 뒷 자락에 숨어 살며시 쳐다보다 눈이 마주치자 수줍게 숨어버리는 여자 아이들의 시선이 눈에 띄게 들어왔다. 처음 한국에 선교를 왔던 선교사들에게도 이런 이방인의 시선이 있었겠다 생각하니 슬며시 웃음이 번졌다.
오후 1시 30분, 습하고 무더운 날씨 속 땀이 비오듯 흘렀지만 장비를 설치하기 위해 의료 사역을 하게 될 선한목자 클리닉으로 향했다. 덜컹 거리는 차 안, 현지 선교사님들과 정겨운 대화를 나누며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르고 하나 둘 씩 정성스럽게 챙겨온 의료품, 기계들을 실어내렸다. 안과팀과 내과팀으로 나눠 기계 및 약품을 셋업 하면서 일손들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사역이 시작되는 첫날 월요일 아침. 오전 7시 30분, 상쾌한 산 공기를 마시며 사역이 펼쳐질 병원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인데도 꽤 많은 환자들이 벌써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슬슬 손에 땀이 쥐어졌다. 앞으로의 일주일, 어떤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 하니 이야기
“수술 할래요.”
1시간 여의 긴장된 대화와 진지한 토론이 이어지고, 비전케어 멕시코 팀 첫번째 환자인 하니의 가족이 수술을 결정했다.
멕시코 사람 특유의 큰 눈과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소녀 ‘하니’는 유난히 위쪽으로 치우쳐 사시가 된 왼쪽 눈 때문에 자신이 나온 사진을 보는 것이 가장 싫었다. 하니의 동네에는 안과가 없다. 무료로 눈을 고쳐준다는 ‘비전케어’ 소식을 우연히 전해듣고 5시간이나 걸리는 먼 길을 엄마와 아빠 손을 붙잡고 찾아왔다.
어린 아이의 수술은 전신 마취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쉽지 않다. 더군다나 의료 기기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 전신 마취는 생명을 담보 짓고 해야 하는 일인 만큼 의사들의 진지한 대화가 오고 갔다. 사시는 수술을 해도 20% 정도 다시 돌아올 확률이 있다는 말과 전신 마취의 위험성에 대해 들으며, 하니의 부모도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한참을 고민하고 이야기를 나누더니, 결국 ‘수술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수술 전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하니의 가족(오른쪽)과 의사들(왼쪽). |
7살 하니의 부모는 자식을 수술대에 올려놓기 전,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했다. 먼저 하니가 기도했고, 엄마, 아빠가 차례로 기도했다. “예수님, 의사 선생님이 제 눈 예쁘게 해주세요. 수술 하는 동안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어느새 가족들의 얼굴은 눈물 범벅이 됐고, 마취를 담당하는 의사와 수술 담당 의사인 존 정 닥터도 다가와 이들을 꼭 껴안고 함께 기도했다. 수술 담당 의사인 존 정 닥터는 자신의 친 딸 사진을 보여주면서, “내 딸에게 수술한다는 생각으로 수술하겠다”며 안심시켰다.
마취 담당인 이승규 닥터는 당일 아침 구토 증상을 보일 정도로 긴장했다. 전신 마취를 위해 필요한 기계가 아닌 원시적인 기계를 가지고 수술을 감당 해야 하는 데에 따른 부담감 때문이었다.
드디어 수술이 끝나고, 한 참 후 하니가 부스스 눈을 뜨자, 이 닥터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깨어나지 못하는 줄 알았다.’는 게 후에 그의 입으로 고백한 진심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제가 하는 게 아니에요.” 선교지에 찾아온 의사들 모두의 진심이 담긴 고백들이다.
▲하니의 수술 전 후 사진. |
수술을 마치고 회복실에 누워있는 하니를 찾아갔다. 하니는 ‘시편 23편’을 외운 뒤 ‘구주는 나의 친구’ 찬양을 부르고 있었다. 마취가 점점 풀리며 눈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하니는 눈을 감은 채 활짝 웃어보였다.
하니의 엄마, 아빠는 과테말라 국경지역인 베네메리또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는데, 동네 시립병원에 갔다가 안과의사가 없어 돌아오는 길에, 간호사가 알려주어 ‘비전케어’가 온다는 소식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수술 다음 날, 하니는 한껏 예뻐진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꼭 기억할께요.” “은혜를 잊지 않을께요.” 한참 동안 인사를 나눈 뒤 아쉽게 돌아선 하니와 가족들이 조금씩 시야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비전케어 멕시코 팀의 가슴에, 그리고 하니 가족의 가슴에는 서로가 영원히 남아 있으리라.
▲수술이 끝난 후 환하게 웃어보이는 하니. |
▲수술을 마치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비전케어 120차 멕시코 팀 알렉스 장 팀장과 하니. |
# 프란시스코 할아버지 이야기
따바스코에서 고속도로만 3시간을 달려 병원을 찾아온 78세의 프란시스코 페레즈 모아라 할아버지. 6개월 전부터 눈이 보이지 않게 되자, 가장 답답했던 것은 ‘일을 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이 할아버지는 “다시 보게 되면 가장 먼저 무엇을 보고 싶냐”는 질문에 생뚱 맞게도 “밭에 가서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아내는 물론 자녀들에게 화만 냈다는 그는 수술을 하면 다시 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손자와 아들의 손을 잡고 비전케어 사역팀을 찾아왔다.
“다시 눈이 보이면 제일 먼저 밭에 나가 일하고 싶어. 일하는 사람이 일을 못하니까 화만 나거든. 고구마, 율, 콩, 옥수수… 평생 하던 일을 다시 하는 게 간절해.”
밭일을 해 오던 평생의 직업을 잃은 할아버지는 다시 보게 될 기쁨 만큼 다시 호미와 낫을 잡고 일터로 돌아갈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세르기오 곤잘레스 씨. |
# 곤잘레스 씨 이야기
올해로 46세인 세르기오 곤잘레스 씨가 가족으로 보이는 한 남성의 부축을 받아 진료실로 들어왔다. 촛점이 없는 그의 두 눈을 보고, 양쪽 눈이 모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바로 알아 차릴 수 있었다. 진료 결과 그의 오른쪽 눈은 백내장으로 거의 보이지 않고, 왼쪽 눈은 수정체가 제자리에서 밀려나 크게 손상된 상태라는 것을 알아냈다. 안타깝게도 왼쪽 눈은 수술이 불가하다는 판단이 내려졌지만, 백내장인 오른쪽 눈을 수술해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얼마 전 이혼하고, 현재 16살, 18살, 20살 짜리 딸이 있는 가장인 이 중년의 사나이는 표정 만으로도 삶에 지치고, 보이지 않는다는 상황에 또 한번 체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듯 했다. “눈이 안 보이게 됐을 때 기분이 어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으니, “괜찮았다”라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절망적인 상황을 체념하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현지인들의 단면이라고 현지 선교사는 후에 기자에게 설명해 주었다.
비전 케어의 도움이 없었다면, 평생 다시는 빛을 보지 못했을 세 딸의 아버지가 빛과 함께 희망을 되찾았다. 시력을 잃기 전 자동차 수리공이었다는 그는 곧 바로 직장으로 돌아갈 계획이다.
현지인들이 한달 평균 약 400~500불에 달하는 월급으로 생활하는 것을 감안할 때, 1만7천~2만 폐소(미화 1,500달러 가량)에 달하는 백내장 수술은 평범한 서민들에겐 쉽게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이다. 평생 병원을 가보지 못했거나, 가난으로 수술은 생각도 하지 못했던 주민들에게 ‘비전 케어’가 온다는 소식은 12시간의 장거리를 달려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만큼, 이미 한줄기 빛이자 희망이었다.
봉사에 참여했던 제임스 김 안과의사는 “현지인들의 백내장 중 70%는 뿌옇게 보이는 것을 넘어 손가락도 구분하지 못하는 고도로 진행된 상태였다”고 말했다.
치아빠스의 주민 90%가 의료보험 없이 살아가고, 삶이 피폐해 농약을 먹고 자살하는 경우도 빈번히 일어난다고 현지 선교사는 전했다. 평생 괄시를 받아온 인디언 부족의 후손들인 이들은 ‘어디가 아프냐?’고 한번 물어봐주는 것, 아픈 곳을 한번 더 살펴주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위로와 힘을 얻어 간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지 않은가? 당뇨병 환자의 섞어가는 발을 만지면서, 오랜 밭 일로 거칠어진 할머니의 손과 볼을 비비면서,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방인의 장벽은 어느새 무너져 있었다.
# 내가 그 실명했던 한 사람이었다면…
이번 비전케어 멕시코 캠프는 총 73명에게 백내장 수술을 제공, 사시 및 녹내장, 익상편 수술을 포함 총 91명에게 수술을 제공했다. 비전케어 간사인 김기우 장로의 말처럼 “8만명이 살고 있는 팔랑께 지역에 90명 수술과 900명 수술은 큰 차이를 만들 수 없을 지라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떻게 해 주었느냐가 문제”였다. 내과는 총 235명을 진료했다.
주일예배 때 안환 목사(버지니아 열린문장로교회 소속)가 전한 말씀의 예화가 생각났다. 모래 사장 가득 셀 수 없이 채워진 불가사리를 하나씩 바다에 던져넣는 소년의 이야기. 모래 사장의 불가사리를 모두 바다에 집어넣는 것은 불가능할 지라도, 지금 던지는 한 불가사리는 살릴 수 있다는 소년의 말. 91명의 환자는 비전케어 팀에게 91개의 불가사리였고, 그들의 가치는 숫자로 가늠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주일이란 시간 동안 하루 20여명이 훨씬 넘는 수술을 감당하면서 전력을 다한 수술팀, 그리고 수술을 가능하도록 움직여 준 소독팀, 산동팀, 외래진료팀. 한 팀원의 고백 처럼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루었던 일주일의 기간”이었다.
전세계는 볼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전세계 인구 중 5초 마다 실명자 1명이 늘어나고 있고, 1분 마다 어린이 한 명이 실명의 아픔을 겪고 있다. 이 중 80%는 예방과 치료가 가능하지만, 의료 시설이 부족하거나 돈이 없어 평생 빛을 잃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긴장감 넘치는 수술실. |
바닷가 모래 사장 속 셀 수 없는 불가사리 하나를 주워 바닷가에 던지는 소년의 심정으로 시작한, 국제 실명 구호 단체 비전케어 캠프가 올해로 벌써 120차를 맞았다. 2002년 파키스탄 캠프를 시작으로 일년에 많게는 20여개의 캠프를 소화하며, 쉬지 않고 달려온 결과다.
말로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이슬람 국가를 포함해 정기적으로 가는 지역만 28개국이다. 전세계를 4개 권역으로 나눠 고루 캠프를 진행하고 있지만, 이슬람 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있는 아프리카 지역에 캠프를 집중적으로 진행, 크리스천들의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2020년까지 쉬지 않고 비전 케어의 사역을 감당할 예정인 김동해 원장(명동성모안과)은 “이 땅에 실명자가 더 이상 없는 그 날까지 실명자의 눈을 띄워주고 현지 안과 의료진을 교육하는 이 사역을 쉬지 않을 계획”이다.
▲비전케어 제 120차 멕시코 캠프. |
# 다시 볼 때까지, 아디오스! 멕시코!
멕시코는 전체 인구 1억 1,200만명의 83%가 천주교를 믿는 천주교 국가로, 기독교는 약 10% 안팎을 차지하고 있다. 현지 선교사에 따르면, 멕시코 카톨릭은 종교 개혁 이전, 카톨릭 신앙이 극도로 부패해 있을 시기에 정착해, 카톨릭이 지역별로 존재하던 토속신앙과 결합돼 형성돼 우상숭배의 성격이 짙다. 예를 들면, 인생의 큰 문제는 큰 베드로 상에게 절하고, 작은 문제는 작은 베드로 상에게 비는 형식이다.
기독교는 천주교와 항상 마찰을 빚고 있으나, 근래에 들어와 많이 완화된 편이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교회를 태우거나 기독교인의 집을 태우는 일들이 일어났다. 하지만 현재도 지방 자치제로 인해 동네에 소재한 공립학교가 기독교인이란 이유로 학생을 받지 않는 일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멕시코 카톨릭에서는 기독교가 수호신인 마리아를 배신했다고 여기기 때문에 빚어지는 갈등들이다.
이성수 멕시코 선교사는 “비전 케어 사역을 통해 크리스천들에 대한 존경심이 생기고, 열린 마음을 갖게 된다. 또 한국인에 대한 고마움이 생겨서 현지 한인 선교사들의 사역에도 거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뿐 아니다. 비전케어 사역을 통해 현지 목회자 및 사역자들의 연합이 이뤄지고, 현지 크리스천들도 크리스천들의 선한 봉사활동을 통해 현지 신앙 생활에 자신감을 얻는 것도 큰 이점이다.
▲내과 외래 진료에서 만난 어린아이들. 사탕을 쥐어주자 해맑게 웃는다. |
내과 외래 진료에 동행했을 때, 5살 짜리 남자 아이가 어머니에게 ‘자살하고 싶다’고 말했다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됐다. 깡 말라 있는 ‘사무엘’이란 이름의 이 남자아이에게 어떻게 조금이라도 희망을 전할 수 있을까? 조용히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가만히 만져주었다. 희망을 가지자고. 조금만 더 힘을 내자고 마음 속으로 되내이고 또 되내이면서….
일주일의 헌신과 치료를 통해 그들의 눈이 뜨여진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그들의 영적인 눈도 뜨여지게 되길, 비전케어 봉사자들은 간절히 바랬다. 그들의 아픈 곳이 낫고, 보이지 않던 것이 보여 새로운 삶의 희망을 찾은 것처럼, 비교할 수 없는 치유와 회복이, 그리스도 안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도 함께 전해졌길 간절히 바래본다.
환하게 웃는 멕시코 사람들의 미소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천국에서 꼭 다시 만나게 되길…. 그 때까지 “아디오스! 멕시코!”
비전케어 웹사이트) http://www.vcs2020.org/new/
▲마지막 환자 수술을 마친 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