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인문학자였다
설교자에게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비유법의 대가이신 예수가 인문학자였기 때문이다. 예수뿐 아니라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살아낸 바울도 인문학자였다. 인문학자였기에 베드로가 아니라 바울이 인문학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로마 제국의 전도자로 쓰임 받을 수 있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후 타락한 가톨릭의 틀을 벗어나도록 말씀의 가치를 학문적으로 정립한 칼빈도 인문학자였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자인 츠빙글리도 인문학자였다. 18세기 일어난 미국 1차 대각성 운동에 앞장섰던 탁월한 설교자 조나단 에드워즈도 인문학자였다.
우리나라에서 뭇 사람들에게 탁월한 설교자로 인정받고 있는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는 인문학자다. 최근(2018년) 아름답게 은퇴한 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기념교회 이재철 목사도 인문학에 남다른 식견이 있다.
기독교의 한 획을 그은 사람들은 인문학자이거나 인문학에 높은 식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특히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가 인문학자였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당연히 신학자인 동시에 인문학자여야 한다.
성경만으로 족하다는 설교자
설교자는 인문학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 채 평생을 목회해야 한다. 신학 서적이 대부분인 설교자의 책상에 최소한 30퍼센트는 인문학 책이 꽂혀 있어야 한다.
현실은 정반대다. 나도 그랬지만, 많은 설교자들이 인문학을 적대적으로 생각한다. 나는 매주 설교자들을 만난다. 처음 만나는 설교자들은 성경만 신학만으로 설교가 족하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니 70퍼센트 이상 인문학 책을 읽는 우리 모임(아트설교연구원)/ 네이버 '아트설교아카데미)을 사팔뜨기 눈으로 바라본다.
나는 몇 년 전 인문학에 관심을 갖는다는 이유로 이상한 목사(?)로 취급받은 적이 있었다. 공개 세미나 때였다. 몇 명의 설교자가 인문학 책을 읽는다는 소문을 듣고 작정하고 시비를 걸기 위해 참석했다. 그들은 목사는 오직 성경만 읽으면 된다고 확신하는 설교자들이었다.
약 10년 전 목회자 설교 모임에 다닌 적 있다. 그 모임을 인도한 목사는 오직 성경만 읽기를 원했다. 신학적인 책도 읽지 말라고 했다. 성경만으로 설교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신학을 한 뒤로 10년 간 영화도 보지 않았다. 결혼할 때는 텔레비전도 장만하지 않았다. 신학을 한 뒤, 10년 이상 성경과 신학 책 외에는 읽지 않았다.
부교역자 시절에는 전 교역자들이 영화를 관람할 기회가 종종 있다. 영화관에 들어서는 순간 잠만 잤다. 다른 교역자들이 그 좋은 영화를 관람하지 않고 잠만 자냐고 하면, 영화를 보면 졸린다고 핑계를 댔다.
나를 위시한 많은 설교자들이 인문학과 담을 쌓고 산다.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인문학 책 읽기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둘째, 인문학 책은 세상 책이므로 신앙의 정체성을 흔들리게 한다고 생각한다. 셋째, 세상 책을 읽으면 영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위의 예들은 나를 비롯한 많은 설교자들이 인문학을 바라보는 인식이 어떠함을 보여준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적대적인 분위는 여전히 강하다.
반면 젊은 설교자들은 인문학 필요성에 많은 동의를 한다. 내가 아트설교연구원을 시작하던 10년 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더 많이 달라져야 한다. 그럴 때 한국교회가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성경만으로 족하지 않다. 신학 책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영적 지도자이므로 성경, 신학 책, 인문학 책을 균형 있게 읽어야 한다. 설교자가 청중과 소통이 되는 설교, 들려지는 설교를 하고자 한다면 이는 더욱 더 필요하다.
설교자는 인문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설교자는 예수를 본받아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인문학자였듯, 설교자는 인문학자여야 한다. 나아가 세상에 익숙한 성도들을 상대로 설교해야 하므로 인문학자여야 한다.
예수는 세상 사람에게 인문학적인 비유를 통해 소통을 하셨다. 그렇다면 설교자도 인문학을 활용해 소통해야 한다.
소통하려면 공통점이 있어야 한다. 공통점이 없으면 대화가 단발성에 그친다. 설교자가 청중과 공통점을 찾는데 인문학만큼 좋은 것이 없다.
설교자는 성경에 익숙하고 전문가이다. 성도는 세상에 익숙하고 전문가이다. 설교자와 성도는 접촉점이 필요하다.
교회 안의 청중에는 이미 '하나님'이란 접촉점이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부족하다. 세상에 익숙한 청중에게 인문학이란 접촉점도 있어야 한다. 소통의 무기를 한 가지 더 갖는 것은 현명한 처사라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설교자와 청중이 성경만으로 접촉 가능하려면 청중들의 신앙이 좋아야 한다. 교회에서 신앙이 좋은 성도는 10% 전후다. 그럼 90% 전후의 성도들과 접촉점을 가지려면 누군가는 내려가야 한다. 그러나 청중이 내려갈 수는 없다. 내려갈 수 있는 사람은 설교자이다.
설교는 설교자가 한다. 청중과 접촉점을 가지려면 예수께서 성육신하셨듯, 설교자가 내려가는 성육신해야 가능해진다.
설교에서 청중과 접촉점을 갖는데 인간 이해와 세상을 이해하게 도와주는 인문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인문학자여야 한다.
적어도 인문학에 깊은 조예가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청중과 세상을 설교를 통해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설교자들은 우리가 전할 예수가 2,000년 전부터 인문학자라는 것을 잊지 상기하고 21세기를 목회해야 한다.
김도인 목사
아트설교연구원 대표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 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 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 CLC》, 《이기는 독서/ 바른북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