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효 목사
(Photo : ) 장재효 목사

본문 요한계시록 2:18-29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19 내가 네게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 이기는 자와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버가모 교회에서 동북쪽으로 180리 정도가면 두아디라 성이 있습니다. 이 성은 지금도 옛날처럼 구리를 많이 캐내어 여러 가지 생활 기구를 만들어 전 세계 시장으로 수출해서 돈을 벌기도합니다. 그 시대에는 옷감을 물들이는 염료가 세계에서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면서 무역으로 산업과 상업의 중심도시였습니다.

사도행전 16:14에 보면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함으로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 루디아의 친정 고향이 두아디라였습니다.

지금의 불가리아인 항구도시가 빌립보인데 루디아는 두아디라에 가서 물들인 옷감을 구해 행상을 하다가 사도 바울을 만나 그리스도인이 되고 바울의 선교에 적극 참여하게 됨으로 빌립보 교회를 세우는 공로자가 됩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통하여 그 시대에 많은 영혼이 구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의 세계 선교 후원에 적극적으로 힘써 하나님 앞에 크게 영광 돌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친정인 두아디라에서도 교회를 세웠는데 그곳이 두아디라 교회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두 눈이 불꽃같다는 것은 두아디라 교회의 실질적인 상황을 살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주석은 뜨거운 불로 연단하여 만든 것인데 예수님도 세상을 사시는 동안 엄청난 환란과 행패,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까지 엄청난 연단 가운데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6:33 하반절에 보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불의와 타협하거나 굴복하신 일이 없고 어떤 행패와 고통을 당하셔도 다 이겨내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발이 빛난 주석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 19절에서 사업을 그 서두에 말씀하시고 두 번째로 사랑을, 그리고 믿음, 섬김, 인내를 말하고 있는 것은 두아디라 교회 사람들이 영적인 내세소망을 바라보는 믿음보다 육신이 세상사는 날 돈 더 많이 벌어서 잘 사는 것이 이들의 첫째 목적이었다는 것과 이들의 사랑은 진리의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9절에 사업이라는 것은 두아디라 교인들이 하고 있는 두 가지 일로 구리로 생활용품을 만드는 것과 옷감을 물들여 파는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에베소 교회와는 달리 진리 정통한 교리적 신앙이 바로서지 못했습니다. 사는 목적이 돈 벌기 위한 사업이 우선이었고 섬김도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체면과 명분을 앞세운 것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정통한 신앙이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로 인해 믿음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이단은 많은 영혼을 노략질하고 교회의 지도급 사람들까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저버리게 하고 영적인 음행과 육적인 음행도 범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교리에 입각하여 아무리 힘들고 부담스러워도 믿음의 정절과 줏대를 지켜 살았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열왕기하 9:6-37사이에 이세벨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이스라엘 왕 아합이 시돈왕의 딸 이세벨과 결혼한 것이 잘못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세벨이 이스라엘로 시집오면서 바알(풍요의 신)과 아세라(다산의 신)라는 우상을 함께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왕의 권력을 이용해서 궁 안에 신상을 놓고는 믿음을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신을 섬기는 숫자는 늘어갔고 하나님의 벌로 긴 가뭄이 있고 엘리야 선지자를 통한 기도응답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진실로 참된 하나님이었음을 증명하는 사건을 맞이하게 됩니다.

20절에 이세벨이라고 지칭하신 것은 아합 왕 때의 이세벨이 했던 역할과 같이 두아디라 교회에서 어떤 여자가 이단을 끌고 들어와서 악행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21절은 이 이단을 추종하는 영적으로 음란한 사람들과 이 여자와 육체적으로 음행한 사람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회개할 기회를 주셨지만 그들의 양심은 화인 맞은 자들처럼 회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침상에 던지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병으로 드러눕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큰 환란 가운데 던지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핏줄의 씨도 없애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모든 교회가 하나님이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아보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에서도 이런 이단에 휩쓸리지 않고 육체적 음행과 영적 음행으로 범죄하지 않고 믿음의 정절을 지킨 사람들,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다른 것으로 너희에게 지울 짐이 없다”하셨습니다. 엄청난 유혹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순결을 지키며 이겨냈기 때문에 참으로 보배로운 믿음이라 하십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들에게 다른 교훈으로 덧붙일 말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부하시는 말씀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그 순결한 믿음을 굳게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기는 자와 교회에서 직책과 직분에 따라 맡겨진 예수님의 일들을 끝까지 감당하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실뿐 아니라 쇠 막대기로 질그릇을 깨뜨리는 것과 같은 심판의 권세를 가지고 심판의 자리에 예수님과 함께 앉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28절의 ‘새벽별’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이 새벽별을 준다는 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부활해서 예수님 만나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에 영광스러운 주인공으로 들어가 함께 살게 된다는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진리와 교리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죄를 감싸주는 결과로 인해 오히려 회개의 길을 막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결국은 지옥으로 가는 일을 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교회의 신앙은 예수님이 기대하실 기준이 없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은혜가 믿어져서 받은 은혜가 감읍하여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다른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은혜 분위기를 힘쓰고 전도도 하고 구제도 하는 것은 믿어지는 믿음을 바탕으로 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1에 언급하고 있는 에베소 교회는 상당히 진리 정통한 믿음을 가르치고 훈련시켜 교리를 중점적으로 강조하다보니 그들도 모르게 처음 사랑이 식어버렸습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이런 것들을 잘 균형 잡아 믿음 생활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정통하고 성령이 충만해서 교리가 올바르게 자리 잡아 믿어지는 믿음이 확실한 바탕을 이루었을 때 우러나는 사랑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고 더 잘 섬기고 사람을 사랑하고 구제하는 것이 가장 균형 잡힌 교회의 올바른 성장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