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으로 대중문화를 조망하는 '박욱주의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이번 편에서는 2년 뒤 출소한다는 조두순과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이영학 등 사법부의 잇따른 흉악범죄에 대한 관대한 판결의 배경을 드러냅니다. -편집자 주 

형벌의 공의: 인간의 존엄성 회복을 위한 죄의 현실 고찰

◈죄와 벌: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끌어내 돌로 쳐죽이라(신 17:5)

중범죄자를 처벌하는 방법에 관한 법적·윤리적·종교적 논란은 역사상 단 한 순간도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으며, 앞으로도 인류 역사의 마지막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형벌의 경중에 대한 논란에서 중요한 것은 공의의 내용과 범죄자들의 현실적 정황이다. 하루가 멀다 않고 발생하는 중범죄에 대응함에 있어 형벌 방법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우선 무엇이 공정함인지 규명해야 하고, 다음으로 이 공정함을 적용해야 할 범죄자들의 현실이 어떠한지를 살펴야 한다.

대중문화가 제시하는 형벌의 공의는 한맺힌 감정의 해소를 위한 폭력적 복수다. 영화, 드라마 등 각종 대중문화 컨텐츠는 관객과 시청자들의 마음에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 따라서 중범죄에 대한 형벌의 방법으로 참신하고 극단적인 분노와 복수심 표출, 무절제한 폭력과 사적 제재를 제시한다.

이에 부합하는 사례를 들자면 끝이 없겠지만, 가장 극단적인 예를 들면 연쇄살인을 연쇄살인으로 응징하는 복수극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2013년 미국에서 인기리에 종영된 연쇄살인범 이야기 <덱스터>(Dexter, 2006-2013)나 작년 개봉한 국내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2017) 등이 이에 속한다.

최근 국내에서 연재되고 있는 웹툰 <비질란테> 역시 흉악범들을 골라 연쇄적으로 살해하는 연쇄살인범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위의 두 작품과 유사한 모티프를 공유하고 있다.

이처럼 복수를 공의의 내용으로 제시하는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중범죄 형벌의 방법은 사형이다. 국가가 제대로 벌하지 못하는 죄인들을 통쾌하게 살해하는 것이 정의 구현의 방편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복수의 공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장스러울 정도로 생생하게 범죄자의 구체적인 현실을 파헤친다.

여기서 범죄자들은 죄를 즐기는 이들이거나 피해자에 대해 아무 양심의 가책이 없는 이들이다. 이런 작품들 속에 묘사되는 중범죄자들의 행태는 상당한 수준의 분노를 유발하는데, 서글프게도 이런 묘사는 대부분 현실의 중범죄자들을 제법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흉악범죄
▲연쇄살인마가 연쇄살인마를 응징하고 처단하는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성서에는 중범죄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다수 기록되어 있다. 살인, 간음, 우상숭배는 이들 중범죄자들이 저지르는 범죄의 대표적인 양상이다. 그런데 성서 속 중범죄자들이 심판과 형벌을 받는 방식은 획일적이지 않다.

그래서 때로 양면적인 듯하지만, 거기에는 분명 어떤 일관성이 존재한다. 국내 기독교윤리학 권위자 가운데 한 사람인 박충구 교수는 '기독교 윤리학적 관점에서 본 사형제도(2010)'라는 논문에서 성서 속 사형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사형에 관한 성서적 언급은 신정정치적 이상을 담고 있는 구약성서에 나온다. 사형은 실정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준행되어야 한다.

여기서 적용되는 가장 기본적인 규범은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쳐 죽일 것(출 21:12)'을 명하고 있고, '무릇 사람이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 9:6)'고 하여 사람의 생명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지 않는 행위와 동기를 엄금하는 정신이다.

... 여기에 적용되는 것은 보복의 법(law of retaliation)이다. ... 거룩한 질서를 훼손하는 행위, 즉 거룩한 회중을 거룩하지 못하게 하는 죄에 대해서 구약성서는 서슴치 않고 사형을 선언한다."

이어지는 그의 진술에 의하면, 보수 신학을 옹호하는 교회 지도자들 대부분은 구약성서에 기록된 사형의 명령에 입각해 사형존치론을 옹호한다. 그런데 성서 곳곳에는 율법이 정한 사형 집행 명령에 대한 예외 사례들이 확인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시기심으로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의 사례다(창 4:1-16). 그 밖에 신하의 아내를 보고 간음의 죄를 저지른 다윗도 죽음의 형벌을 면했고, 신약성서에서는 현장에서 붙잡힌 간음한 여인이 정죄를 받지 않은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박충구 교수는 이런 예외 사례들 속에서 확인되는 심판과 형벌 방식의 변화가 역사와 문화적 정황 변화에 따른 것이라 밝히고, 상황윤리(윤리는 상황에 따라 상대적이고 가변적이라는 사고관)에 입각해 사형폐지론을 옹호한다.

그런데 성서에 기록된 사형 면제 사례들은, 상황윤리적 측면과 함께 규범윤리(구체적 상황과 무관하게 일관된 도덕적 법칙과 원리가 존재한다는 사고관)적 측면도 내포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듯 하다.

성서를 계시로 믿는 관점에서는 성서 속에 담긴 모든 명령이 규범적인 것으로 성격규정될 수밖에 없다. 공의의 심판과 형벌에 관한 명령도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흉악범죄
▲성서는 살인, 간음, 우상숭배에 대해 사형을 내릴 것을 엄중히 명하고 있지만, 여러 예외사례들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존엄성의 회복: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칸트는 근대 규범윤리의 대가다. 그는 저서인 <실천이성비판>에서 '정언명령(der kategorische Imperativ)'이라는 말을 남겼다. 정언명령이란 이 명령을 수행한 결과에 대한 이해타산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지켜야 할 명령으로서, "타인을 수단으로만 여기지 말고 목적으로 대우하라"라는 문장으로 압축된다.

칸트는 이와 같은 의미를 담은 명령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밝힌다. 그것은 "온 힘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칸트는 인간이 이 명령을 무조건적으로 지켜야 할 당위적 근거로 두 가지를 지목했다. 하나는 정언명령을 찾아낼 만한 논리적 이성(순수사변이성)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 이익을 물리칠 만한 자유의지(순수실천이성)다.

인간이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한, 인간은 반드시 그 격에 맞는 도덕 법칙을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칸트가 제시한 정언명령의 당위성이다. 그는 인간이 이렇게 이성과 의지로 정언명령을 지켜낼 때 비로소 인간의 존엄성을 갖춘 자,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자로 인정했다.

그러면 칸트는 인간의 격을 저버린 중범죄에 대해 사형 혹은 중형을 내리는 것이 옳다고 여겼을까? 그렇다. 그는 사형존치론자였다. 칸트가 사형제의 당위성을 인정했다는 사실이 의아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왜냐면 통상 칸트의 윤리학을 배울 때, 그가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 개념을 정립한 대표 계몽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배우기 때문이다.

그가 여타의 계몽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지적∙도덕적 진보에 대한 확신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성서를 통해 종교적 규범과 윤리적 규범의 준엄함, 그리고 인간의 죄성이 가진 파괴적 본질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칸트 본인은 그의 조부인 한스 칸트(Hans Kant)가 스코틀랜드의 독실한 청교도 출신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칸트는 조부 한스에 의해 집안에 조성된 청교도적 분위기, 그리고 칸트의 부모가 받아들인 경건주의 신앙의 영향 가운데 자랐고, 어려서부터 철두철미한 성서교육을 받았다.

훗날 칸트는 정통 기독교 신앙에서 멀어졌지만, 그의 사상 가운데는 어린 시절 배운 성서의 영향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특히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그는 다분히 기독교적인 시각을 가졌다.

칸트는 감성의 쾌락에 휘둘리지 않고 도덕 법칙을 굳건히 지키는 의지의 실천을 인간의 자유로 정의했다. 즉 그는 인간이 누구나 자기의 의지로 쾌락에 휘둘려 죄를 짓는 심성을 거부하고 극복할 힘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여기에는 계몽주의자 특유의 인간에 대한 낙관론도 반영되어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성서에 기록된 자유로운 인간에 대한 규정 또한 반영되어 있었다. 이런 인간규정은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내린 명령,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에 명시되어 있다.

흉악범죄
▲야코포 팔마(Jacopo Palma)의 작품, 아벨을 살해하는 가인(1590년).

칸트는 이 명령을 통해 인간이 비록 타락한 심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자신의 의지로 죄를 행치 않을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듯하다. 그래서 칸트는 중대범죄에 대해 사형을 비롯한 중형을 내리는 것이 적법하다고 보았다.

이는 단순히 해당 범죄자에 대한 감정적 보복을 위해서라거나, 예비 범죄자들에 대한 시범적 경고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칸트는 중범죄자들이 범하지 않을 수 있는 죄를 범하였고, 이로써 타인의 인간적 존엄성뿐 아니라 스스로의 인간적 존엄성마저 포기하였기 때문에, 존엄성이라는 공의를 의도적으로 해친 당위적인 결과로서 중형을 받아 마땅하다고 판단했다.

이제 성서의 규범윤리와 사형 면제 사례, 그리고 범죄자들의 정확적 현실이라는 주제로 돌아와 보자. 왜 성서 속 하나님께서는 어떤 범죄자들에게는 엄준한 형벌을 내리고, 어떤 이들에게는 형벌을 면제해 주셨을까?

이는 성서 속의 윤리적 규범, 즉 하나님의 공의가 무조건 죄에 대한 보복 조치를 단행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인간을 회심과 회개로 이끌어내는 데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는 중범죄를 저지른 이라 하더라도 극심한 양심의 가책과 죄의식을 느낀다면 형벌을 경감하고 면제해 줄 당위성이 확보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에 기록된 중대범죄들에 대한 형벌은 조건부로 단행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자긍하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죄책감에 애통해하고 고뇌하는 세리의 기도의 예화(눅 18:9-14)에서도 확인되는 바다.

그렇다면 오늘날 중범죄자들의 현실은 어떠한가? 범죄 자체도 문제지만, 범죄한 이후의 태도가 더 문제다. 오늘날 대다수의 중범죄자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책임이나 죄책감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10여년 전 개봉된 영화 <밀양>(2007)에서는 유괴살인범이 하나님께 회개했기 때문에 피해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죄책감 느낄 것이 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관객들에게 상당한 충격과 회의감을 선사한 바 있다.

흉악범죄 밀양
▲영화 <밀양>의 교도소 장면. 회심과 신앙을 변명삼아 피해자에 대한 죄책감을 무가치한 것처럼 여기는 유괴살인범의 태도는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충격과 회의감을 선사한 바 있다.

그런데 10여년이 지난 오늘날의 중범죄자들은 깊은 반성과 회심을 핑계삼는 파렴치함조차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다반사다. 반성과 후회의 모습은커녕, 운이 없어 죄가 발각됐다는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흔히 발견된다. 형벌의 경감을 위해 온갖 득실을 따지는 약삭 빠른 중범죄자들의 모습 앞에서 국민들이 느끼는 분노, 그리고 그런 범죄자들이 비웃을 만한 형편없는 양형 수준 때문에 국민들이 느끼는 좌절감은 상당하다.

앞서 제안한 성서적 기준으로 본다면, 중범죄에 대한 양형은 원칙적으로 회심을 유도할 만한 수준에서 제한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범죄자들의 현실 상황은 공의의 다른 측면을 청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보복이 아닌 공의를 위해서라도, 즉 인간의 참된 존엄성 수호와 회복을 위해서라도, 죄의 무게를 짊어지려 하지 않고 부당하게 회피할 뿐 아니라 피해자를 멸시하고 조롱하기에 이르는 범죄자들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엄중한 형벌의 단행이 요청되는 듯하다.

이런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판관들의 현명한 판단과 사법체계의 구조적 개혁이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중대 범죄자의 행태를 주의깊게 바라보고 공의의식을 가지고 형량을 판결하는 판관 개개인의 결단과, 인본주의에 경도된 기존의 일부 무기력한 판례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영미법적 사법체계 개선이 병행된다면, 법과 인권, 그리고 피해자들이 중범죄자들에 의해 농락당하는 일이 현저히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전망해 본다.

또한 여기에는 규범과 현실이 조화를 이루는 성서적인 형벌의 공의가 하나의 소중한 모범으로 제시될 수 있다고 믿는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