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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프린스턴 두 신학자의 고민을 중심으로

프린스턴 신학의 출발

창조연대문제는 늘 진화론과 충돌을 야기한다. 그렇다면 미국의 구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았을까? 역사학자 마크 놀은 프린스턴 신학자들에 대해 미국적이며 칼빈주의를 정확한 미국의 억양으로 말한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구 프린스턴의 중심에는 아키발드 알렉산더와 찰스 핫지 그리고 벤자민 워필드 세 사람의 탁월한 신학자가 있었다. 이들 구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19세기 미국 개혁주의 신학의 주도적 위치를 유지하면서 과학과 신앙의 대면에도 활발히 관여한다. 왜냐하면 프린스턴에 있던 지리학, 지질학, 생물학 등등의 대변자들이 그들의 동료 신학자들과 같은 종교적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12년, 프린스턴 신학교의 제 1 교수 취임 연설에서 아키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1772-1851)는 자신이 과학적 결론에 개방적이고자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자연의 역사와 화학, 그리고 지질학은 성경 안에 있는 난제들을 해결하도록 성경 연구자들을 돕는 면에서, 혹은 이러한 과학의 비호 아래 만들어진 적대자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게 하는 면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윈 시대의 신학자 찰스 핫지

하지만 알렉산더는 찰스 다윈 시대의 사람은 아니었다. 진정한 다윈 시대의 프린스턴 신학자는 찰스 핫지였다. 알렉산더 후임으로 그의 제자였던 찰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는 19세기 개신교 전통주의 중심으로서의 프린스턴 신학을 미국 신학으로 보편화 시킨 사람이었다. 찰스 핫지는 과학의 문제에 있어 알렉산더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거룩한 창조의 기본 틀 안에서의 과학의 제한적 자율성을 지지하였다. 성경의 완전한 신뢰성을 바탕으로 성경에서 발견될 것으로 생각되는 결론을 미리 전제하지 않고 과학자들이 각 분야에서 적절한 귀납적 연구를 추구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성경의 연역적 결론이 과학과 갈등을 일으킬 때는 어찌할 것인가? 과학의 가르침을 수용하고 계시를 제쳐둘 경우 위험천만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핫지는 성경에서 파악된 것이든 자연에서 파악된 것이든 사실은 자명하다고 믿는 지나치게 단순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핫지에게 있어 자연은 성경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참된 계시였다. 따라서 핫지가 볼 때 우리가 성경을 과학으로 해석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다.

찰스 핫지가 본 다윈의 진화론

찰스 핫지는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이 출판된 이후 진화론에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학자 가운데 하나였다. 핫지는 1874년 ⌜다윈주의란 무엇인가?⌟(What is Darwinism?)를 통해 진화론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핫지는 진화론의 특징으로 진화 또는 모든 식물과 동물의 유기체가 하나 또는 아주 적은 수의 원시 균류(primordial living germs)로부터 생겨나고 발전했다는 가정과, 이 진화가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 또는 적자생존(the survival of the fittest)에 의해 일어났으며 결국 다윈의 이론은 자연선택이 초자연적 지성의 설계(design)없이 비지성적인 물리적 원인에 의해 수행되었다고 보았다. 핫지는 우주의 창조와 섭리 과정에서 지성적 설계를 배제하면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에 따른 창조의 가능성을 부정하므로 목적론적 설명이 배제된 다윈의 진화론은 수용할 수 없었다. 진화론의 자연선택 개념이 초자연적 설계나 목적의 원리를 방법론적으로 배제하게 되면 결국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신학과 결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핫지가 볼 때 다윈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주장한 적은 없으나 다윈의 진화론은 근본적으로 무신론적이었다. 핫지는 성경과 과학이 원칙적으로 조화를 이룬다고 보았다. 핫지는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믿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다윈의 진화론 같이 하나님의 초자연적 섭리(providence)를 무시하는 자연주의(naturalism)를 이론의 방법으로 삼는 과학의 이론은 신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것이 유물론을 철저히 비판했던 핫지의 입장이었다. 필자는 핫지의 입장에 동의한다.

벤자민 워필드의 입장

하지만 반대로 진화론을 인정하는 신학자들도 나타났다. 핫지의 뒤를 이은 프린스톤 신학의 대표 주자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는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워필드는 기독교적 시각을 개인의 죄와 칭의에 집중하는 마르틴 루터보다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다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세계관 속에서 찾으려한 칼빈의 입장을 따른 개혁주의자였다. 따라서 워필드는 핫지와 반대로 진화론을 기독교가 수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심지어 워필드는 칼빈도 자신처럼 진화론자로 보았다. 마크 놀(M. A. Noll)이 칼빈을 진화론자라고 주장한 것도 결국 워필드의 견해로부터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 앞질러 간 것으로 여겨진다. 칼빈의 시대는 진화의 시대도 아니었고 칼빈의 어떤 주석에도 진화론은 등장하지 않으며 칼빈은 두드러진 과학의 이론도 아니었던 진화론에 적응할 리가 결코 없었다. 워필드는 다윈이 기독교를 거부한 이유는 사변과 가설에 너무 편견이 동원되어 생각의 위축을 가져와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진화론은 맞되 다윈이 세련되게 그 이론을 정리하여 기독교와 충돌하지 않도록 내놓지 못했다고 본 것이다. 이런 말만을 듣고 무작정 워필드를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매도하려 드는 사람들을 보았다. 신학의 역사에 아주 무지한 사람들이다. 사실 워필드는 역사적 칼빈주의에 충실하면서 현대주의의 도전에 맞서 수많은 논문과 수천편의 글들을 통해 성경의 무오(無誤)성을 수호하고 역사적 기독교를 수호하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한 학문적이면서도 탁월한 보수적인 신학자였다.

나가면서

구 프린스턴 안에서도 중심 인물인 핫지와 워필드 두 사람이 진화론 문제에 대해 견해를 달리했다는 것은 개혁주의 안에서 진화론과 그에 따른 창조연대 문제에 있어서 일치된 견해를 도출해 낸다는 것이 쉽지 않은 논제임을 말해주고 있다. 개혁주의 안에서 지금도 치열하게 칼빈을 두고 젊은 연대 주장자인가 아니면 오랜 연대 주장자인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서로 자신의 주장에 유리하게 해석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제는 아전인수격으로 칼빈을 자신의 견해의 옹호자로 끌어드리려는 부질없는 주장은 철회했으면 한다. 초월 계시의 성경과 내재의 학문인 자연과학이 일치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부질없는 주장으로 자신의 입장을 마치 성경과 과학의 진리인 것처럼 결론을 오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창조의 사실과 창조주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한다는 점이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평택대 신학부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