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이단 대책, 올바른 실천(ortho-praxis)으로부터
드라마 <구해줘>는 그간 한국 사회에서 물의를 일으킨 기독교 계열 이단 교주 및 정통교단 성직자들의 본 모습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한국 사회가 기독교 계열 이단을 바라보는 시선이 여실하게 반영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중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종교 및 이단과 관련해 가장 문제가 되는 사안은 교의가 아닌 도덕성이다. 이 점에 있어 진정으로 다행스럽게 여겨지는 점은, 한국 기독교 계열 이단들 대부분이 도덕성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는 점이다. 교주와 일부 측근들이 자행한 심각한 부정과 비리, 교인 착취, 그리고 성적 타락 등이 한국형 이단들이 드러낸 부도덕성의 대표적 양상들이다.
만일 이단들 가운데 도덕성에 별 문제가 없는 집단이 있다면? 정통 교단들의 입장에서는 문제의 심각성이 가중된다. 정통 교단이 경계하는 바와는 별개로, 대중은 해당 집단을 그저 하나의 무해한 신흥종교로 여길 것이다. 그 상태로 시간이 더 지나고 해당 집단의 교세가 확장되면, 대중은 과거 정통 교단들에 의해 이단시되었던 이 신흥종교를 아예 정식 고등종교의 하나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단과 정통: 이단이 정통이 되는 종교사(史)
이는 단순한 예상이 아니라 실제 종교사에서 비일비재하게 발생했던 일이다. 시간 순서대로 살펴보자. 네팔 남부 룸비니(Lumbini)에서 불교가 처음 창시되어 교세를 확장해 가자(주전 5세기), 힌두교 지도자들은 불교를 이단(नास्तिक, nastika)으로 규정했다. 팔레스타인의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언약을 믿는 기독교인의 수가 증가하자(주후 1세기), 유대교 지도자들은 기독교를 이단(מין, min)으로 규정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단 창시자로 여겨 십자가형에 처하게 만들었다. |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도가(道家) 사상이 중국 황하 하류 지역에서 태평도(太平道)라는 이름의 대중종교로 발전했을 때(주후 3세기), 한(漢) 제국 위정자들과 학자들은 이를 혹세무민의 사교(邪敎)로 규정했다. 물론 태평도 교조 장각(長角)이 민중봉기를 일으킨 게 가장 큰 원인이긴 했으나, 중요한 사실은 이 태평도가 훗날 도교(道敎)의 기원이 된다는 점이다. 도교는 이후 수(隋), 당(唐), 송(宋) 제국 시기에 불교와 함께 중국의 대표적 종교로 자리잡는다.
예언자 무함마드(Muhammad)가 이슬람을 창시해 아라비아의 메카와 메디나를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할 당시(주후 7세기), 유대교와 기독교 지도자들 모두 이슬람을 이단(haeresis)으로 규정했다. 고려 시대 한국에서는 불교 종파 중 교종(敎宗)이 호국 불교로서 국가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므로, 통일신라 시대에 국내에 전수돼 교세를 확장하고 있던 선종(禪宗)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정돼 심한 제재를 받았다(주후 11-12세기). 특히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앞장서 선종 승려들을 교종으로 개종시켜 선종의 발전을 원천적으로 가로막았다. 그러나 오늘날 남아있는 한국의 대표 불교 종파는 선종의 일파인 조계종(曹溪宗)이다.
독일 작센 공국의 비텐베르크에서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발발하고 개신교가 등장하자(주후 16세기), 가톨릭 교회는 개신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유럽 각지에서 박해를 가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교세를 유지하고 있는 세계의 고등종교 대부분은 최초 창시될 당시 기존 종교 및 종파들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된 역사를 갖고 있다.
이처럼 이단이라는 말은 중의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일차적 의미로는 기존에 존재하던 특정 종교의 가르침을 왜곡해 사람들을 미혹하는 신흥종교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례들을 근거로 본다면, 이단이란 제도화된 기존 종교집단이 새로 등장한 믿음의 체계를 받아들이지 못해 나오게 된 종교 간 세력다툼의 산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이 둘을 가르는 경계선은 무엇인가? 대중의 시선으로 보면 결국 교의가 아닌 도덕성, 그리고 공익성이다. 이는 한국교회의 이단 대책이 갖는 최대 약점 중 하나다. 정통과 이단이 도덕성 측면에서 차별점을 보이지 못할 때, 혹은 오히려 정통보다 이단이 더 도덕성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때, 대중은 정통보다 이단의 편을 들게 되기 때문이다.
▲<구해줘>에 등장하는 사이비 종교집단 구선원은 겉으로 보기에는 기존 교회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다. 어떤 면으로는 기존의 교회들보다 더 사회적 효용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구선원은 이로 인해 무지군 지역사회에서 여느 정통교회 이상의 대접을 받는다. |
◈이단과 사회적 효용: '트레스케이아(θρησκεία)'와 '렐리기오(religio)'
사회적 관점에서 하나의 종교가 갖는 가치는 해당 종교 본래의 내적 가치와는 여러 방면에서 구별되는 경우가 많다. 종교(religion)이라는 말의 서구적 어원을 살펴보면 이 점이 보다 명확하게 확인된다.
고대 그리스 시대, 종교라는 의미로 사용되던 용어는 '트레스케이아(θρησκεία, threskeia)'다. 직역하면 신들에 대한 경외(awe) 혹은 그 경외심의 발로로 드리는 경배(worship)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고대 그리스 종교가 신-인 관계(Divine-human relationship), 즉 신과 사람 사이의 수직적 관계를 중시했다는 사실이 '트레스케이아'라는 용어를 통해 드러난다.
이 용어는 훗날 라틴어로 넘어오면서 '렐리기오(religio)'라는 용어로 번역된다. 직역하면 '신에 의해 강화된 연대, 유대, 통합'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즉 로마인들은 종교를 볼 때 신과 사람 사이의 수직적 관계 자체보다, 이 수직적 관계를 통해 확보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안정적인 수평적 관계를 더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종교의 가치에 대한 고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 사이의 견해차가 확인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신과 초월적 존재에 대해 매우 의존적인 태도로 종교를 바라봤다면, 로마인들은 사회적 효용의 측면에서 종교를 바라봤다. 기독교가 콘스탄티누스 이전까지 박해를 받았던 이유도 이 사회적 유대감 고양이라는 효용에 저해되는 종교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의 종교에 대한 용어 정의는 종교가 가진 두 가지 대표적 특성을 확인시켜 준다. 종교는 신을 향한 초월을 지향하는 수직적 방향성, 그리고 사회 구성원의 정신적 유대관계와 통합을 지향하는 수평적 방향성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세속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에는 '렐리기오'로서의 종교라는 개념 정의가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부각되고 있는 듯하다. 유물론적 무신론이나 실존철학이 대표적 시대정신으로 등극하기 전까지는 거의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이 종교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트레스케이아'로서의 종교가 갖는 가치, 즉 신-인 관계 속에 부여되는 영감, 깨달음, 계시 등이 종교의 본질적인 가치로 여겨졌다. 그러던 것이 현대에 들어와서는 세속화 및 실존철학적 사고방식의 득세로 인해 종교의 초월적 가치는 간과되고 그 사회적 효용만이 강조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현대 사회에서 종교의 본질은 '올바른 가르침'을 의미하는 정통(正統, ortho-doxy)이 아니라 '올바른 실천'을 의미하는 정행(正行, ortho-praxis)으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이제 대중은 종교를 평가함에 있어 내적 교의보다 외적인 행위를 더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는 오늘날 기독교의 정통 교단들이 이단에 대처하며 갖게 되는 고민을 배가시키고 있다. 과거에는 기존 정통 교단에 일부 도덕적인 흠결이 있더라도, 올바른 교의를 기준 삼아 이단 판정을 내릴 수 있었고, 또 그렇게 내려진 이단 판정이 대중에게 일정한 권위를 가졌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더 이상 교의적 측면에 치중한 정통과 이단의 구별이 일반 대중뿐 아니라 교인들에게조차 권위를 잃어가고 있다. 이단 판정을 내리는 정통 교단이나, 이단 판정을 받는 사이비 단체나, 양측 모두에서 정행(ortho-praxis)이라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인식이 널리 확산돼 있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정통 판별의 기준은 성경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정통과 이단의 구별에 있어서 올바른 실천(ortho-praxis) 여부가 성경의 권위를 넘어서는 세태를 보이고 있다. |
◈이단과 교의: 어거스틴 대 마니교(Manichaeism)
기독교 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은 평생 세 가지 이단을 경계했다. 첫째는 마니교(Manichaeism), 둘째는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 셋째는 도나투스주의(Donatism)다. 이 가운데서 어거스틴이 청장년 시절 주로 대립했던 이단은 마니교였다.
마니교는 주후 3세기경 페르시아의 예언자 마니(Mani, 216-276)가 창시한 종교다. 마니교는 유대교, 조로아스터교, 불교, 기독교의 교의가 절묘하게 혼합돼 있는 종교로, 주후 4세기경 페르시아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 전역에도 전파된 국제 종교였다. 어거스틴은 <고백록>(Confessionum)에서 젊은 시절 약 9년 동안 마니교의 가르침을 추종했다고 소회한 바 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한 사람이자, 탁월한 이단 비판가였던 어거스틴. 회심 이후 어거스틴의 생애는 참된 헌신과 고결한 도덕적 실천의 연속이었다. |
어거스틴의 마니교 비판은 주로 마니교의 잘못된 신론 및 기독론에 집중돼 있다. 교의적 측면으로 볼 때 어거스틴의 마니교 비판은 대단히 신랄하다. 그러나 윤리적 측면에서 어거스틴이 마니교에 대해 특별히 비판적 입장을 보인 바 없다. 오히려 어거스틴 본인이 직접 만나서 토론한 바 있는 마니교의 유명한 감독 파우스투스(Faustus of Milevis)에 대해서는 그 인품과 겸손한 학문적 자세로 인해 간략하게나마 칭찬의 말을 남겼을 정도다.
이런 점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어거스틴 당시의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엄격한 금욕적 생활과 청빈으로 도덕적 측면에서 대중의 칭송을 받는 이들이었다. 다만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사람의 자유의지 측면을 과도하게 신뢰한 나머지 원죄의 존재를 부정하고 구원에 있어 은총의 역할을 심각하게 축소했으며, 이로 인해 어거스틴의 지탄을 받았다. 이처럼 마니교와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한 어거스틴의 투쟁은 거의 전적으로 올바른 가르침, 즉 정통(orthodoxy)에 관한 것이었다.
대표적 사례로 어거스틴이 비판했던 마니교와 펠라기우스주의의 예를 들기는 했지만, 그 외에도 고대의 기독교 계열 이단들 대부분은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 계열 이단들처럼 도덕적 행실에 문제가 있는 사교(邪敎) 집단은 아니었다. 2-3세기 기독교회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었던 기독교 영지주의(Christian Gnosticism) 이단 지도자들도 대부분 도덕적인 차원에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대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처럼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유지하던 종교집단이라 하더라도, 성서 계시에 벗어나는 가르침을 통해 영혼을 멸망시킨다고 판단되는 경우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비판은 교회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상당한 공신력을 가졌다. 이는 고대인들 대부분이 영혼의 존재에 대해 확고하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단을 비판하던 교회 지도자들의 삶과 행실이 당시의 이단들 못지 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고결했던 덕분이기도 하다.
▲마니교의 가르침을 표현한 고대의 그림. 기독교, 불교, 조로아스터교의 요소들이 절묘하게 혼합되어 있다. |
고대 기독교 지도자들의 이단 대응 방식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이단 대책 수립에 중요한 교훈을 전달해 준다. 정통을 기반으로 이단들을 분별하고 경계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실천이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현재 한국교회가 상대하고 있는 이단들의 대응 난이도는 고대 교회에 비해 상당히 낮은 편이다. 고대 교회가 직면하고 있던 이단들은 올바른 실천만을 기준으로 놓고 본다면 정통과 분별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반면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 계열 이단들은, 드라마 <구해줘>가 묘사하는 것처럼, 전형적인 사교(邪敎)집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기독교인들이 느끼기에, 그리고 교회 밖 일반 대중의 관점으로 볼 때, 기독교의 이단판정이 갈수록 설득력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 일단 한국 정통 기독교회의 여러 불의한 모습들이 혹세무민을 자행하는 이단들의 부도덕한 행태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 하나의 큰 원인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단판정 기준에 일관성이 없었던 것도 주된 원인으로 지목될 수 있다.
◈이단과 근본주의(fundamentalism): 미국의 신학적 동향에 과도하게 종속됐던 한국교회 이단판정사(史)
한국교회의 이단 판정 방식에 사회 전반이 의구심을 갖게 된 주된 원인 중 하나는 심각한 일관성 결여 때문이다. 1970-1980년대 발생했던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이단 논쟁은 그 대표적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 내막을 잘 모르는 이들은 단지 오순절 교단들의 교세가 급격히 확장되면서 교세 때문에 이단 해지가 된 것으로 인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여기에는 보다 복잡한 사연이 얽혀 있다.
한국교회 이단 논쟁의 본격적 시초는, 본 칼럼 상편에서 밝힌 바 있듯 원산파 사건이라 볼 수 있다. 사실 원산파 및 그로부터 파생된 여러 기독교 계열 이단들에 대한 판정은 비교적 적절했다. 원산파 및 그 파생 집단들의 교의적, 윤리적 문제가 워낙 뚜렷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원산파 이단판정과는 다른 편에서 벌어진 이단 논쟁에 있었다. 바로 박형룡 대 김재준으로 대표되는 근본주의-자유주의 논쟁이다. 이 이단 논쟁은 1930년대 발발했는데, 이 때는 미국에서도 구(舊)프린스턴 학파(Old Princeton School of theology)의 마지막 대표주자 존 그레샴 메이첸(John Gresham Machen, 1881-1937)이 한창 근본주의-자유주의 논쟁을 주도하고 있을 때였다. 박형룡 박사는 메이첸 박사의 직계 제자로서 프린스턴 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구프린스턴 학파의 근본주의 신학을 그대로 전수받은 인물이다.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의 거두 존 메이첸(왼쪽)과 그의 제자 박형룡 박사. |
메이첸이 주도하던 근본주의 운동은 메이첸의 스승이자 메이첸 이전 구프린스턴 학파의 거두였던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가 이끌던 근본주의 운동과는 성격이 달랐다. 메이첸의 근본주의는 워필드보다 훨씬 전투적이고 분리주의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메이첸과 그의 동료들은 성경의 축자영감설(verbal inspiration), 무오설(inerrancy), 그리고 문자적 해석(literal interpretation)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고, 교단 및 신학교 운영에 있어 자유주의 신학자들과의 협력 및 타협을 절대적으로 배제했다. 그들은 동료 복음주의자들 중 약간이라도 자유주의 신학의 학문성을 인정하는 이가 있다면 과감히 교제를 단절하고 배교자로 지목했다.
그리고 장로교 신학 전통과는 상이한 모습을 보이던 성결-오순절(Holiness-Pentecostal) 교단의 신학 역시 이단적인 것으로 판정하고 경계했다. 박형룡 박사는 스승 메이첸의 공격적인 근본주의 성향을 그대로 전수받아 한국 장로교 신학계에 이식했다.
한국 복음주의 신학 정립에 있어 메이첸-박형룡의 업적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들의 활동이 남긴 부작용, 특히 한국 신학계의 심각한 분열과 이단 판정 기준 관련 문제 역시 간과할 수 있을만한 수준의 것은 아니었다. 한국 복음주의 신학계는 구프린스턴 학파의 신학적 DNA를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여겼지만, 실상 미국 복음주의 진영은 이미 1940년대 들어 메이첸을 비롯해 존 라이스(John R. Rice), 밥 존스(Bob Jones), 칼 맥킨타이어(Carl McIntire) 등이 주장하던 전투적-분리주의적 근본주의에 큰 회의감을 갖기 시작했다.
▲전미복음주의협회(NAE)의 창설자 오켄가 목사(왼쪽)와 대표주자 빌리 그래함 목사. |
메이첸으로부터 이어지는 전투적 근본주의 신학의 계보는 제리 폴웰(Jerry Falwell) 목사를 통해 계속 이어지긴 했지만, 미국 복음주의 신학의 대세는 1942년 해럴드 오켄가(Harold John Ockenga) 목사가 설립한 전미복음주의협회(th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로 넘어왔다고 볼 수 있다. 전미복음주의협회는 보다 온건하고 학문적으로 개방적인 자세를 유지하되, 복음주의 신앙의 기초 정신을 수호하는 데 동의하는 교단들로 구성돼 있다. 여기에는 미국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뿐 아니라 성결교 및 오순절 교단들도 속해 있다. 전미복음주의협회의 대표주자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목사다.
한국교회는 미국 복음주의 진영의 흐름에 한발 늦게 대응했다. 특유의 폐쇄적 구조 때문에 1970-1980년대까지도 구프린스턴 신학으로 알려진 극보수적 근본주의를 신봉하다, 1990년대 들어 비로소 미국과 마찬가지로 보다 온건하고 개방적인 복음주의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국 내 오순절 교단들에 대한 이단해지도 바로 이런 흐름에 편승해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의 급격한 교세확장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을 것이다.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기하성) 대표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 과거 기하성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이단논쟁은 한국 기독교 정통교단들의 이단 대책의 문제점을 여실하게 드러낸 사례 중 하나로 지목된다. |
정통의 기준이 역사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으나, 한국교회의 경우 미국 신학계의 흐름, 그것도 한시적으로 위세를 떨쳤던 특정 학파의 조류에 과도하게 종속된 나머지 이단판정 방식에 있어 이유를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 일관성 없는 모습을 보여왔던 것이 사실이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올바른 실천 측면에서 여러모로 대중으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데다, 정통으로서 보유하고 있어야 할 올바른 가르침의 권위도 의심받고 있는 듯하다. 이단 대책 수립에 있어서 이중고를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단과 실천: 한국교회 이단 대책의 정상화는 올바른 실천으로부터
드라마 <구해줘>가 보여주는 한국 기독교 계열 이단의 부정적인 모습들은 분명히 한국 정통 기독교회 내부의 여러 불의한 모습과도 일치한다. 이단의 문제는 오직 친구의 위험을 돌아보는 개인의 의협심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 <구해줘>가 전하는 메시지다.
극적 요소의 측면으로만 본다면 통쾌함이 느껴지는 결론이지만, 기독교인 입장에서 볼 때는 다소 씁쓸한 것이 사실이다. 어느덧 우리 사회가 이단 문제 대처에 있어 정통 교회에 문의하기보다 세속적인 자구책 마련에 힘쓰는 것을 더 적절한 방안으로 여긴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단 문제 파악에 있어 정통교회의 분석보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의 보도를 더 신뢰하는 모습이 이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만큼 교회들이 이단 대처에 있어 무능하다고 인식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퀴어신학을 주장하는 기장 측 목회자에 대해 예장 측이 내놓은 대응방식 역시 사회 전반에서 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미 사회 곳곳에 전파된 동성애 차별금지 분위기에 더해, 기독교 정통 교단 측의 이단판정 기준에 대한 고질적 회의감이 함께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근본주의 신학을 표방해 온 예장 측의 올바른 실천, 즉 사회적 효용이 자유주의 및 민중신학을 표방해 온 기장 측의 올바른 실천에 미치지 못한다는 대중의 판단 또한 반영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결국 한국 기독교 정통 교단들의 이단 대책 정상화는 질적 성장을 위한 교회개혁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단순히 '머리(head)'로만, 즉 교의의 지적 정통성 여부를 분별하는 방식으로만 이단에 대응하려는 시도는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구해줘>의 사악한 이단 교주 백정기. 시청자들은 이 배역을 통해 단지 이단 교주들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정통교단 목회자들의 모습도 떠올리게 된다. |
정통 교단들이 각각 수호하고 있는 믿음의 내용을 진정한 정통으로 입증하려면, '중심(heart)'과 '삶(life)' 전체가 그 믿음의 내용에 합치되어야 한다. 내세보다 현세를 수긍하는 것이 지배적 시대정신이 된 오늘날에는 올바른 실천의 필요성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강조될 수밖에 없다.
<구해줘>의 사악한 교주 백정기를 보면서, 도덕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바 있는 개신교 정통 교단 측 목회자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지 않은 시청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올바른 실천, 즉 'ortho-praxis'의 회복과 갱신 없는 'ortho-doxy'의 수호 노력은 결국 겉도는 방안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신 분들은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