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의 깊은 산 속에서 행복한 전원생활을 함께 나누는 시골소녀 미자와 슈퍼돼지 옥자.
(Photo : ) ▲강원도의 깊은 산 속에서 행복한 전원생활을 함께 나누는 시골소녀 미자와 슈퍼돼지 옥자.

 

 

※이 칼럼에는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반려동물, 사람과 평등하게 교감할 수 있는가?

신라의 위대한 장군이었던 김유신은 화랑 시절 아끼던 말의 목을 베어버렸다. 자신이 말등에서 조는 사이에 말이 천관녀(天官女)의 집 앞에 찾아갔기 때문이다. 무관이 되기 위해 수양에 전념하던 그에게 말이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서로의 목숨을 돌봐주어야 할 전우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뜻에 어긋나게 행동한 말의 목을 가차없이 베었고, 이는 두고두고 한국 사람들의 마음에 위대한 결단을 대변하는 행동으로 전해져 왔다.

오늘날은 시대가 달라졌다. 반려동물 문화가 일상화된 오늘날, 동료와도 같은 말의 목을 베었다고 하면 무자비한 성격파탄자 쯤으로 보일 가능성이 크다. 미디어는 갈수록 이런 사고방식을 강화해서 전달하고 있다. 그 결실로 등장한 것이 영화 <옥자>라고 볼 수 있다.

봉준호 감독은 한국에 몇 안 되는 뛰어난 연출력을 지닌 감독이다. 평범한 스토리라도 그의 손길을 거치면 수작으로 거듭난다. 그래서 매번 그의 작품이 개봉될 때마다 많은 이들이 기대감을 갖고 영화를 관람한다. 이번에도 그는 관객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평단과 관객 모두 지난 목요일 개봉한 <옥자>의 내용에 흡족해 하는 듯하다.

<설국열차(2013)> 이후 봉준호 감독이 4년 만에 선보인 작품 <옥자>는 그의 전작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회비판적 태도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봉준호 영화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를 한풀 벗겨낸 밝고 전원적인 분위기가 서사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는 점에서 이전 작품들과 큰 차이를 보인다.

이는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 투자사는 미국의 유명 스트리밍 서비스 기업인 넷플릭스(Netflix)이고, 작품의 주제는 많은 미국인들이 변함없이 사랑하는 '사람과 동물 사이의 애정과 정서적 교감'이다. 작품의 태생 자체가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분위기로만 일관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인지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 <마더(2009)>, <설국열차>처럼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비관적 정서가 존재하기는 하나, 결국 서사의 결말은 행복으로 마감된다.

◈사람과 동물: 금수(禽獸)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사람

한국 영화에서 사람과 동물 사이의 애정과 교감을 주제로 삼는 일은 거의 시도된 적이 없다. 반면 할리우드 영화계에서는 잊혀질 만하면 다시 반복해서 다뤄지는 대단히 친숙한 주제다. 'Free Willy(1993, 소년과 돌고래의 우정)', 'Grizzly Man(2005, 사람과 회색곰의 교감)', 'Hachiko: A Dog's Story(죽은 주인이 돌아오기를 9년 동안 기다린 개)', 'War Horse(2011,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마로 징집된 말과 소년의 애정)' 등이 대표적이다.

<옥자>와 동류라고 볼 수 있는 이 작품들이 전달하는 공통적인 메시지는 "사람과 동물 사이에 서로 평등한 사랑과 우정의 유대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사람보다 동물과 나누는 사랑과 우정이 더 순전하고 희생적이다"는 견해도 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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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란도 사에 수거된 옥자를 도축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도주하는 미자.

 

<옥자>의 경우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슈퍼돼지 옥자는 유전자 조작에 의해 실험실에서 태어난 생물이다. 그러나 육류 회사 미란도(Mirando)는 유전자 조작 식품에 반감을 가진 소비자들을 속이기 위해 이 종(種)을 칠레의 한 농가에서 새로 발견된 돈종(豚種)이라고 홍보한다. 그리고 이 새끼 돼지들을 세계 26개국 우수 농민들에게 분양한다.

 

10년이 지나 미란도 사는 이 돼지들을 수거해 실험용 및 홍보용으로 활용한 뒤 도축하려 한다. 유전자 조작 돼지를 자연친화적 식품으로 둔갑시키는 미란도 사의 기만적 마케팅 일환으로 옥자는 미자네 집에 분양된다.

미란도 사에게 이 돼지들은 순전히 상품일 뿐이다. 그러나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뒤 산 속에서 조부와 단 둘이 살며 4살 때부터 옥자를 맡아 기른 미자에게, 옥자는 단순한 가축이나 애완동물이 아니다. 그녀에게 옥자는 그녀를 길러 준 조부조차 대체하지 못할 친구이자 가족이며 삶의 동반자다.

영화 초반 약 15분 정도는 미자와 옥자의 친밀한 관계를 집중 조명하는 데 할애되고 있다. 미자는 옥자와 함께 산 속을 거닐며, 감을 따고, 같은 자리에서 잠을 자며 목가적인 삶을 함께 나눈다. 이 15분의 장면들이 없었으면 미란도 사에 의해 수거된 옥자를 되찾으려는 미자의 처절한 모험은 잘 납득이 되지 않는 이야기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영화 속에서는 급진적 동물애호단체인 ALF(Animal Liberation Front, 동물해방전선) 멤버들이 등장, 미자가 옥자를 찾는 일을 돕는다. 이들은 가혹한 유전자 조작과 학대에 가까운 동물실험, 그리고 무자비한 도축 위기에 노출된 유전자 조작 생물인 옥자와 슈퍼돼지들을 돕기 위해 과감한 행동에 나선다.

그렇지만 이들의 이념도 미자와 옥자 사이의 순전한 우정 앞에서는 자기만족을 위한 비틀린 이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 결국 이들은 숭고한 이상을 따른다는 명분을 앞세워 미자와 옥자를 이용하고 난관에 처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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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와 옥자를 도우러 온 ALF(동물해방전선) 멤버들. 순수한 이상으로 움직이는 듯하나 미자와 옥자 사이를 위협하는 장애물로 작용하기도 한다. 결국 미자에게 있어서 사람과의 관계는 옥자와의 관계보다 저급한 것으로 드러난다.

 

그만큼 미자와 옥자 사이에 형성된 사랑과 우정의 관계는 영화 속에서 최고로 빛나는 가치로 부각된다. 영화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얽힌 관계는 모두 어딘가 '비틀려' 있다. 손녀를 끔찍히 아끼는 조부의 마음마저도 옥자를 미자로부터 떼어놓으려는 음모의 한 줄기로 편입될 정도다.

 

미자에게는 오직 동물인 옥자와의 관계만이 진실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둘 사이의 관계는 단지 '평등할'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는 대체할 수 없는 '지고지순한' 아름다움을 담아내고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

미자와 옥자 사이의 애정어린 배려 속에 전해지는 이 두 가지 견해는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언뜻 수긍할 수는 있으나, 수용되기는 어렵다. 사람과 동물의 유대관계가 사람 사이에 형성되는 관계보다 더 헌신적이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결코 바람직하다거나 권장할 만한 것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여기에는 동물에 관련된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이해가 결부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동물: 유물론적 영혼 이해의 선구자

기독교 신학은 전통적으로 동물에 대한 연구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애완동물을 친구이자 가족처럼 아끼는 서구 문화가 기독교 문화로부터 유래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대체 사람과 동물 사이의 애정과 교감을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는 어디서부터 나온 것인가?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무엇보다 명백해 보이는 시초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384-322 BCE)라고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인 플라톤의 뒤를 이어 그리스 자연학과 인간학의 맥을 잇는 형이상학을 정립한 대학자로서 서구의 철학 및 자연과학 발전의 최고 공로자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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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인 스타기라(Stagira)에 위치한 아리스토텔레스 공원. 뒤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석상이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애초에 동물 연구에 관심을 가지기 적합한 환경에서 태어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 니코마코스(Nicomachus)는 마케도니아 국왕 아민타스 3세(Amyntas III)의 주치의로서, 당대 최고 지식인 중 하나에 속했다. 부와 학식을 모두 갖춘 명문가 집안 자제로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의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자연과학, 특히 생물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동식물에 대한 그의 관심은 17세에 이르렀을 무렵 아테네에 있는 플라톤(Plato, 428-348 BCE)의 아카데미아(Ἀκαδημία, Academia)로 유학을 갔을 때도 변함없이 이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론과 질료형상론(hylomorphism)은 통상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생물학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가운데 <영혼론(Περὶ Ψυχῆς, Peri psyches)>은 사람, 동물, 그리고 식물의 형상, 즉 '모르페(μορφή, morphe, 주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시적 모양을 의미)'에 대한 논의를 주로 다루고 있다.

그리스 신화의 물활론(hylozoism, 모든 사물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사상) 전통을 계승한 그의 스승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스로 성장하거나 움직일 수 있는 '생물'만이 영혼, 곧 '프시케(Ψυχή, psyche)'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생물의 형상이 곧 영혼이라고 규정하고 사람, 동물, 그리고 식물이 가진 영혼의 '가능태(δύναμις, dunamis, 고유한 완성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힘)'가 무엇인지를 탐구하였다.

그는 생물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바탕으로 영혼의 종류를 모두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첫째는 식물의 영혼(vegetative soul)으로서 섭생(vegetation), 성장(growth), 그리고 생산(reproduction)의 가능태를 갖고 있다. 둘째는 동물의 영혼(sensitive soul)으로서 식물의 영혼이 가진 모든 가능태에 더해서 외적 감각(outer sense, 오감)과 내적 감각(inner sense, 낮은 수준의 기억력과 상상력)을 갖는다.

셋째는 사람의 영혼(rational soul)으로서 식물의 영혼과 동물의 영혼이 가진 모든 가능태에 더해 합리적(rational) 판단능력과 덕(virtue)을 수행할 수 있는 도덕적 의지를 갖는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해명한 영혼의 종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이란 질료(matter, 몸의 물질적 구성요소)와 함께할 때에만 존속하고 운동(성장)할 수 있다고 보았으므로, 사람을 포함한 어떤 생물이든 간에 죽은 후에는 영혼이 사라진다고 믿었다. 즉 그는 내세나 부활, 영생을 믿지 않았다.

유물론적 인간 이해와 흡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대한 이론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플라톤주의의 위엄에 가려 거의 사장돼 있다, 중세 후반 12-13세기에 이르러 기독교 신학의 집중적 관심을 받고 부활한다.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스콜라 신학을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다.

◈아퀴나스와 동물: 동물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목적(τέλος, telos)

아퀴나스 이전까지 기독교 신학에서 동물을 주제로 삼는 연구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이는 아퀴나스의 백과사전적 연구에서 다뤄진 주제들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에 내포된 기본 골자들(생물의 세 가지 종류 및 각각에게 고유한 가능태)을 대부분 그대로 계승하는 가운데, 동물이 지닌 특정한 가능태인 낮은 수준의 기억과 상상력에 주목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본적으로 무신론에 가까운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그는 만물의 최초 운동원인이자 만물이 운동(성장)해야 할 종착점인 '텔로스(τέλος, 목적)'를 부여하는 초월적인 존재, 이른바 부동의 동자(ὃ οὐ κινούμενος κινεῖ, the Unmoved Mover)가 존재한다고 확신했으나, 이 부동의 동자가 인격적 존재라고 믿지는 않았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추론한 부동의 동자가 실은 하나님을 가리키므로 이 부동의 동자를 확고부동한 인격적 존재로 보아야 한다고 재해석했다.

아퀴나스는 묻는다. 하나님께서는 왜 동물을 창조하셨을까? 그리고 왜 동물에게 사람과 교감할 수 있는 가능태를 부여하셨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찰대로 동물들은 비록 낮은 수준이긴 하지만 기억과 상상이 가능한 존재자로 창조됐다. 동물이 단지 먹거리로 주어졌을 뿐이라면, 이런 능력은 일종의 잉여적 가능태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분의 능력을 무의미하게 낭비하셨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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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동산 상상도. 아담과 하와에게 동물들은 식량이 아니라 보호하고 다스릴 대상이었다.

 

아퀴나스의 대답은 단호하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그 모양(형상, 즉 모르페)대로 창조하실 때에는 각각에게 합당한 목적이 있을 뿐, 낭비란 존재할 수 없다고 그는 답한다. 더구나 성서는 동물들이 처음부터 식량으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명시한다. 아담과 하와의 후예들은 노아의 홍수 이후에야 동물을 먹이로 삼을 수 있게 허락받았다. 동물에 부여된 가능태 및 성서기사를 토대로 아퀴나스는 동물이 단순한 식량 이상의 존재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 해서 아퀴나스가 각 동물에 부여된 하나님의 목적을 일일이 캐묻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그의 신학적 관심은 단지 동물에게도 하나님의 섭리가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 정도에서 그친다. 그러나 동물의 가능태에 관련된 아퀴나스의 신학적 논의는 현대에 들어와서 동물보호를 주창하는 생태신학적 논의들의 한 주된 근거로 받아들여져 왔다.

오늘날 기독교적 관점에서 동물에 관련된 윤리적 책임을 주장하는 대표주자들 중 한 사람으로 앤드류 린지(Andrew Linzey)라는 영국 성공회 목사가 있다. <동물 신학(Animal Theology, 1994)>의 저자로도 유명한 린지는 기독교적 가르침을 토대로 동물을 보호하고 배려하는 윤리적 책임을 촉구하는 활동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린지 목사가 '동물 신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1976년경 그는 영국 도버(Dover, 도버 해협이 위치한 곳)에서 교구 부목사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도버는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동물 운송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문제의 심각성을 느낀 린지 목사는 이 시기부터 기독교적 관점에서 동물이 가진 윤리적 권리를 정당화하는 데 힘써 왔다.

린지 목사의 주장은 오늘날 많은 생태여성신학자들(eco-feminist theologians)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그는 동물들의 처분을 주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사람은 '선한 청지기(good steward)'로서 동물을 '다스리는' 자이지 욕망에 따라 임의대로 처분할 수 있는 주관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린지 목사는 이를 동물에게 부여된 '신권(theos-rights)'이라고 규정하는 가운데 동물을 도살하고 식량으로 삼는 행위를 중단하고 채식주의를 따를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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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를 찾기 위해 미국 뉴욕으로 건너온 미자. 미란도 사는 결국 옥자를 식용으로 도축하려고 한다.

 

린지는 아퀴나스의 신학적 동물이해에 비판적인 계승의 입장을 취한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사람의 영혼에 내재된 가능태와 동물에게 수여된 가능태를 질적으로 구분한다. 즉 사람을 우등한 존재로, 그리고 동물을 열등한 존재로 여긴다. 여기에 대해 린지 목사는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한다. 그러나 각 동물의 존재와 그 속에 내재된 가능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개별적이고 고유한 목적이 존재한다는 가르침은 적극 수용한다.

 

린지 목사는 이 사상을 신권의 개념으로 재해석하는 것으로 보인다. 도축과 동물학대는 곧 하나님이 그 동물에 대해서 갖고 계신 목적을 침해하는 것으로서 단순히 동물에 대한 월권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대한 월권이라는 것을 린지 목사는 강조한다.

◈기독교와 동물: 지적인 주체성(subjectivity)을 가진 동물

성서는 사람과 동물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지만, 사람과 동물 사이의 교감이나 대화 가능성 또한 인정한다. 구약 성서학자로서 미국 루터신학교(Luther Seminary) 구약학 교수로 재직 중인 캐머론 하워드(Cameron B. R. Howard)는 연구논문 '창세기 3장과 민수기 22장에 등장한 계시로서 동물의 말(Animal Speech as Revelation in Genesis 3 and Numbers 22)'에서 다음과 같은 논지를 전개한다.

우선 히브리 구약성서는 두 지점에서 동물이 사람과 명료한 언어로 대화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첫째는 에덴 동산에서 하와와 이야기를 나눈 뱀이고, 둘째는 발람이 타고 가던 나귀이다. 그러나 성서학의 지배적인 동향은 이 기사를 단순한 문학적 수사로 치부하는 것이었다.

이 기사가 사실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것은 신앙의 문제겠지만, 중요한 사실은 사람과 동물의 '온전한' 대화가 이뤄졌다는 성서의 기사를 한결같이 수사적 표현으로만 이해하려는 성서주석가들의 태도 때문에, 이 성서기사들이 전달하는 중요한 메시지가 은폐돼 왔다는 것. 바로 동물도 확고한 자기의식을 가진 지적 주체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워드는 그 자신도 하와와 뱀의 대화, 그리고 발람과 나귀의 대화가 완전한 사람의 언어로 이루어졌다고 믿지는 않으며, 이 기사들이 문학적 기술에 의존해 작성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밝힌다. 그러나 사람과 동물이 각기 평등한 주체성(subjectivity)을 가진 존재로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성서의 메시지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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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의 도살장 장면과 <쉰들러 리스트>에 나온 아우슈비츠.

영화 <옥자>로 돌아가 보자. 이미 다수의 평론가들에 의해 논의된 바이지만, 미자와 옥자는 그들 외에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방식으로 서로에게 귓속말을 주고받는다. 비교적 짧은 대화임에도 불구하고, 봉준호 감독은 서로 간에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이 귓속말 장면에 카메라를 고정시킨다. 이는 동물도 사람과 동일하게 자기의식을 가진 지성체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의도는 영화 곳곳에서 확인된다. 특히 서사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도축장 장면에서 이 의도는 명확해진다. 미자는 조부가 선물로 준 순금돼지로 미란도 사의 주인으로부터 옥자를 '사들인다.' 거래가 성립되고, 미자와 옥자는 도축장의 슈퍼돼지 수용소를 힘없이 걸어나온다. 전기 철망이 둘러진 수용소 안에는 수천 마리가 넘어 보이는 슈퍼돼지들이 암울하게 도축을 기다리고 있다. 부부로 보이는 한 쌍의 돼지는 자기들의 새끼돼지를 옥자의 입에 감춰 탈출시킨다.

이 장면은 나치 독일 유대인 수용소 내의 참상을 가감없이 보여준 <쉰들러 리스트(1993)>의 한 장면에 대한 오마주로 보인다. 잿빛 톤의 어두운 색조, 철망이 둘려진 수용소에서 오직 옥자 하나만 미자 덕에 어렵게 구출되는 모습, 삶과 죽음의 운명이 나뉜 옥자와 다른 포로 돼지들 사이의 시선 교류, 새끼 돼지를 살리려는 돼지 부부의 눈물겨운 시도는 모두 <쉰들러 리스트>의 중후반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자신의 직원 유대인들을 빼내는 데 성공한 쉰들러의 모습을 재현한 듯하다.

영화 <옥자>는 지적 주체성을 가진 동물을 도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죄악시하고 있는데, 이는 생태신학자들이나 동물신학자들이 동물의 생존권에 대해 주장하는 바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이로써 따뜻한 휴머니즘을 사람과 동물 사이의 관계에 투사하고, 그로부터 관객에게 감동을 선사하려 한다.

영화적 관점으로야 훌륭한 연출이지만, 과연 기독교적 관점에서도 바람직한 내용인지는 아직 미지수다. 생태신학자나 동물신학자들의 입장이 기독교계의 동물이해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장에 담긴 학문적 참신성은 인정받을 만하나, 동물을 사람과 평등한 주체적 존재로 보는 견해는 기독교계 내에서 명백한 소수의견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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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모험을 마치고 강원도 산 속의 행복한 일상으로 다시 돌아온 미자와 옥자. 옥자가 미자에게 건네는 귓속말 장면이 인상적이다.

◈도축과 동물: 답변되지 못한 문제들

 

에딘버러대학(The University of Edinburgh)에서 기독교 윤리학과 실천신학을 가르치는 데이빗 그루멧(David Grumett)은 동물신학을 비롯해 동물을 사람과 평등한 존재로 대우하고자 하는 오늘날 각종 미디어의 성향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시한다.

성서는 동물을 식량으로 사용하도록 허용했으며, 동물을 도축하는 희생제사는 유대교와 이슬람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들에서 대단히 중시하는 제의이다. 만일 동물의 권리 보장을 주장하는 동물신학과 미디어 콘텐츠들이 동물을 식량자원으로 대해야 하는 실존적 현실에 대한 대안이나 해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그들의 주장은 한낱 공허한 이상 취급밖에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옥자>를 비롯해 사람과 동물 사이의 사랑을 강조하는 미디어 콘텐츠들은 일시적인 감정적 만족은 부여할 수 있겠으나, 동물이 도축의 대상으로 취급되는 현실 앞에서는 공허한 외침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도축 자체가 부도덕하다는 근거 자체도 희박하다.

당장 영화 안에서도 이런 문제가 그대로 드러난다. 봉준호 감독이 명백하게 의도한 바였겠지만, 옥자를 도축에서 지켜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미자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닭백숙이다. 그러면 닭백숙을 위해 도축당하는 닭에 대한 윤리적 책임은 어떻게 되는가? 이는 실제로 영화를 본 많은 관객들이 감상평을 통해 던진 질문이다.

동물과 관련된 문제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소소한 문제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옥자>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영화이고, 따라서 이 작품이 제시하는 물음에 대해 분명한 기독교적 답변을 제시해 줄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반려동물을 키우는 문화가 일상화되고 있는 가운데 이런 문화를 기독교 신앙이나 목회적 관점에서 어떻게 진단해야 할 것인지 기준을 세울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단 다음 칼럼에서 이 영화가 제기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 전반을 공개할 생각이지만, 미리 간단하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진술이 기독교적 입장에서 타당할 것이라고 믿는다.

식량자원 확보를 위한 도축은 기독교 입장에서 전혀 죄가 되지 않는다. 또 동물이 사람과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자로 취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향후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 동물이 더 이상 식량이 아닌 우리 삶의 동반자로 회복될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이 기대감에 근거하면, 필요 이상으로 가혹한 도축 방식이나 동물 학대는 신앙에 덕이 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신 분들은 쉽게 공감할 것이다.

이처럼 어떤 의미로든 자기 삶에 연관된 모든 감각적이고 관념적인 재료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격식 없이 조합하여 하나의 멋진 작품을 만드는 일을 브리콜라주라고 한다. 이 기법은 오늘날 광고나 뮤직비디오, 조형예술, 팝아트(pop art) 등에 자주 동원되며 영화에서도 빈번하게 활용된다.

오늘날의 영화는 삶의 모든 관심사들을 매혹적인 방식으로 조합하여 그려내고 있다. 그 안에는 기독교인들이 환영할 만한 요소와 불편해할 만한 요소들이 정교하고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본 칼럼은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받은 영화들 속에 뒤섞여있는 아이디어들을 헤아려 보고, 이를 기독교적 입장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할 것인지 고민하는 기회를 만들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