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교회에 있어서, 바울의 칭의의 복음이나 '오직 은혜'의 복음을 '오해'했던 자들이 분명 있었다. 바울 자신도 예상했지만, 실제로 그런 자들이 있었고, 이들은 후에 '거짓교사들'에 가까워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들의 특징은 대체로 '반율법주의'인데, 더러는 '영적 신비주의적 경향'과 결합해서 나타나기도 한다(베드로후서, 유다서). 즉,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요구와는 상관없는 교훈과 삶을 가르치면서, 더러는 자신들이 신비한 영적 경험이나 별도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교회를 현혹하던 자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신약성경에서도 그렇거니와, 바울의 칭의의 복음을 오해했던 이러한 경향에 대해 당시 신약시대의 초기 교회가 대응했던 방식이다.

그들은, '바울의 서신을 억지로 풀려는' 태도를 지양했다(벧후 3:15-16). 대신에, 바울이 잘 설명한 복음의 핵심을 그대로 받으면서, 한편으로 그것을 오해했던 자들에 대하여, 다른 주요한 사도들, 즉, 야고보, 베드로, 요한이 교회 전체를 향해 목소리를 내기로 한 것이다.

그것이 공동서신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선포한 칭의의 복음에 대하여, 교회는 그것을 오해한 자들을 위해 '바울의 새로운 해석'을 내놓은 것이 아니었다.

대신, 바울이 잘 드러내었던 복음을 보완하여 교회의 온전하고 규범적인 신앙(regular fidei)을 제시하려 했다. 즉, 바울의 칭의의 복음을 오해함으로써 반율법주의와 세속적인 타락의 길을 가던 교회를 온전히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Photo : )  ▲백석대 채영삼 교수
(Photo : ) ▲백석대 채영삼 교수

그런 노력의 결과가 지금 신약에 포함되어 있는 '공동서신'이다. 바울과 바울을 싸우게 만들지 않고, 바울 이외의 다른 중요한 사도들의 목소리를 들려주고자 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갖고 있는 '공동서신'이라는 정경 모음집 자체가, 과연 사도들이 어떻게 서로 '협력하여' 교회를 온전케 하고자 했는지, 그들이 어떻게 서로를 인정하며 '함께' 교회를 세워가고자 했는지를 보여주는, 그들의 삶과 사역의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신약신학은 '독창'(solo)이 아니라, 처음부터 '합창'(chorus)이다. 그것이 우리가 바울서신만이 아니라 공동서신들을 갖고 있는 이유이다.

어떤 것이 진짜 바울의 목소리인지 분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가 연주하는 소리가 다른 소리들과 합하여, 성령께서 교회를 위해 들려주신 그 웅장하고 장엄한 심포니(symphony)를 듣는 것은 더욱 황홀하고 놀라운 경험이다.

신약정경은,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교회를 위해 주신, 참으로 아름다운 선물이다. 부분 부분을 자세히도 읽어야 하지만, 전부를 들어야 온전히 들리는 교향곡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