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내 생애 최고의 예수 설명서"
시대의 지성 김형석 교수의 역작!
"나는 80여 년을 책과 더불어 살았다.
그리고 80여 년이 넘는 세월동안, 나는 예수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위 고백은 70년대, 청춘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며 당시 젊은이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베스트셀러 저자이자 대한민국 1세대 철학자,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널리 알려진 김형석 연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의 책『예수 : 성경 행간에 숨어있던 그를 만나다』의 한 구절이다.
그는 이 책의 집필동기를 "만일 나와 내 친구들이 젊었을 때 성경 직접 읽지 않아도 '예수가 누구인지', '우리와 상관이 있는지' 묻는다면 권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왜 예수에게는 그의 인간다움을 넘어 종교와 신앙적 질의에 해답을 주는 뜻이 잠재해 있는가를 찾아보고 싶었다. 왜 그가 우리에게 그리스도, 즉 신앙적 구원과 관련되는 가능성이 있는가를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를 알기 위해 성경 4복음서를 다 읽는 것도 부담이 되거니와 4복음서 안에 상치되는 부분도 적지 않고, 또 경전으로서는 상징적 의미가 있어서 고전 및 역사적으로 해석하기도 쉽지 않다. 이런 이들을 위해 4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고 알기 쉽게 기술했다."로 설명했다.
이 책은 그의 설명대로 4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를 기록된 내용대로 살펴 본 책이다. 이야기는 예수가 세례자 요한을 만나기 위해 떠나는 장면을 시작으로 시간 순차대로 전개되고 있지만 저자는 4복음서를 단지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수의 말 한 마디, 몸짓 하나 하나에 스며든 뜻을 세밀하게 건져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고 긴 시간이 지난 뒤,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쳤다. 몇 사람이 그 말을 듣고, "보라, 엘리야를 부르고 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해 줄 수 있을까"라면서 의아심을 품었다고 전해 준다.
그러나 예수가 외친 이 말은 「시편」 22편 첫머리에 나오는 것이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다. -중략- 왜 예수는 「시편」 22편의 첫머리를 외쳐 불렀을까. 전반 부분이 예수가 당하는 고통을 묘사해 주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예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어 가질 것이라는 내용까지 들어가 있을 정도였다. 22편 중간에는 그래도 모태 때부터 나를 경륜해 주신 하느님에 대한 충성과 믿음에는 변함이 있을 수 없다는 뼈저린 신앙 고백이 들어가 있다. 끝 부분에는 온 무리들 가운데 이 사건이 전해질 것이며, 하느님의 뜻은 영원하다는 찬양을 포함하고 있다. 예수는 이 찬양의 첫 부분을 죽음을 앞에 둔 고통 속에서 불렀던 것이다. 뜻이 있는 사람들은 깨달았을 것이며, 믿음이 있는 사람은 뉘우칠 수 있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다짐하는 뜻에서도.
그러나 한편, 이 고백은 모든 사태를 지켜보면서 남긴 인간과 역사에 관한 지극한 사랑의 발로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큰아들이 간질병으로 폐인이 되었는데 둘째 아들마저 또 간질 발작을 하는 것을 본 그 아이의 어머니가, "오오 하느님, 왜 저를 버리십니까!"라고 호소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나라가 불운해지고 민족이 파국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나의 하느님, 어째서 저를 버리십니까?"라고 외치던 애국자를 회상해 보는 때가 있다. 그 어머니는 두 아들의 생명이 자신의 생명을 합친 것보다 몇 배로 귀했던 것이다. 애국자의 심정에서 본다면 민족의 비운은 개인의 생명과는 바꿀 수 없이 소중한 것이다.
십자가에서 모든 상황을 보고 겪은 예수는 「시편」 22편의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들, 특히 자신을 박해하고 있는 사람들과 이스라엘 장래를 위한 애절한 기도였다. 예수는 그런 충정을 안고 십자가에 달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은 예수의 일생을 통해 극히 자연스러우면서도 타당한 것이다.
누가는 복음서에서, 예수의 이러한 뜻을 예수의 기도로 재현시키고 있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고 얼마 후에,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라는 기도를 드렸다.
그것은 예수 자신이나 고소인들에 대한 적개심에서 나온 기도는 아니다. 하느님의 뜻을 어기며 민족의 비운을 자초하고 있는 저들이 용서함을 받기 위해 예수 자신이 왔는데, 역사적인 속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 했을 때 호소할 수밖에 없는 기도였던 것이다. 사랑 안에는 원수가 없고, 완전한 사랑은 인류를 위한 고통의 짐을 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예수의 뜻을 따르게 되는가. 그의 가르침이 이천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대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의 답은 예수의 말과 행동 속에 들어있다. "예수가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말한 것은 비유로서의 설화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내용과 뜻을 깨달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김형석 교수는 이천년 전 예수의 교훈과 이 시대 상황을 절묘하게 접붙여,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예수의 참 뜻을 성경에 있는 그대로 되짚어보면서 의미를 깨우치고 싶지만 성경의 방대한 양 때문에 쉽사리 도전하지 못하고 있는 이가 있다면, 나에게 있어 예수가 정말 그리스도인지 신앙을 점검해보고 싶은 이가 있다면 자신 있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진리는 언제나 단순하며, 깊다. 우리는 그것을 언제나 먼 곳에서 찾으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김형석 교수는 고백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예수를 잊거나 떠난 때가 있었어도 예수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그 예수는 지금, 우리의 곁에도 동일하게 존재하고 있다.
저자소개
김형석(金亨錫)
1920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났다. 일본 조치(上智)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 시카고·하버드 대학교 연구교수를 역임했다.
대한민국 1세대 철학자로 철학 연구에 대한 깊은 열정으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으며, 끊임없는 학문 연구와 집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60~70년대에는 사색적이고 서정적인 문체로 「고독이라는 병」, 「영원과 사랑의 대화」외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집필했으며, 당시 피천득의 수필집 다음으로 잘 팔렸다는 한 해 60만 부 판매 기록은 이후에도 출판계 판매기록으로 회자되고 있다.
현재는 연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로 96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방송과 강연, 집필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책 속에서
예수는 또 가르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겠느냐. 아무 데도 쓸데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어 사람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그 목숨을 보전할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일련의 교훈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이러한 뜻은 예수를 통한 기독교의 정신인 동시에 세상 모든 사람에게도 많은 뜻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 교훈들이 우리에게 주는 뜻은 자기 보존과 자기희생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다. 자신의 욕망과 소유를 위해 스스로를 보존하려고 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을 잃게 되나, 영원한 것과 하늘나라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사람은 영원한 삶을 얻는다는 교훈이다. 소금은 스스로를 녹여 없이했을 때 그 소임을 다한다. 여기에 한 자루의 초가 있다고 하자. 그 초는 불타서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그동안에 아무 소용도 없었던 초는 빛으로 바뀌어 이 우주에 영원히 머문다. 과학자들은 그 사실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예수는 인생의 진리도 그런 것임을 알려 주며, 그런 선택을 하도록 요청한다.
생각해 보면 모든 도덕과 종교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최초의 선택이 무엇인가.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욕망과 소유를 위해 살 것인가, 아니면 이웃과 사회를 위해 자신을 주어야 하는가 함이다. 만일 우리들이 전자에 붙잡혀 정신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면 모든 비참과 파괴가 그에 따른다. 후진 사회의 정치적 비극이 어디서 오는가. 집권자들은 정권을 국민과 사회를 위해 위임받은 책임으로 생각지 못하고 그것을 개인이나 집단이 소유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 때문에 본인과 사회가 치러야 하는 불행과 비참이 얼마나 큰가. 공산 사회와 후진 사회의 과오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는 이 교훈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기 위해, 살려는 자가 죽고 죽으려는 자가 살게 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적극적인 선택이며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뚜렷하다. P.92-93
그때 유다의 머릿속에 한 생각이 떠올랐다. '죽어야 하겠다.' 이 비참함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죽는 길밖에 더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한참 달리던 유다는 길가 으슥한 곳에 있는 한 높은 나무를 발견했다. '목을 매달면 될 것이다.'라는 생각이 번개같이 스쳐 갔다. 그 착상에 이르자 유다는 오히려 침착해졌다. 스승보다 내가 먼저 죽어야 하며, 그것이 안식의 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다는 그 나무에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 잠시 동안 심한 고통이 스쳐갔다. 그리고는 의식을 잃었다. 아직도 금요일 이른 아침이었다.
「사도행전」에는, 유다는 그 뒤 나무에서 떨어져 창자가 쏟아져 나오는, 누구보다도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사실은 알 수 없으나 유다의 시체는 나무에서 내려질 때 돌보아 주는 사람도 없이 땅에 떨어졌을 것이다. 유월절을 앞두고 시신을 저주스럽게 그대로 방치해 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대제사장은 몇 사람과 상의한 끝에 성소에 버려진 은 삼십 개를 모아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다고 성경은 알려 주고 있다. 핏값에 해당하는 돈을 헌금 궤에 넣을 수도 없거니와 누구도 그 돈을 가지려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피 밭의 유래가 되었다는 기록이다. 마태는 이 사실을 스가랴의 묵시적인 예언과 일치된 것이라고 부언해 말하고 있다. 어둡고 비참한 역사의 기록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상상해 보자. 만일, 그 날 낮이나 오후에 유다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십자가에 달려 있는 스승 예수를 찾아가, "주님, 제가 어쩌다가 이렇게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을 범한 것입니까?"라며 용서를 빌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길은 얼마든지 열려 있었다. 그러나 유다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내 일은 내가 책임 져야지!"라는 폐쇄된 생각이 마침내 그를 자살의 길로 이끌어가 더 큰 죄악을 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베드로에게는 뉘우침의 눈물이 있었지만, 유다에게는 눈을 감을 때까지 닫혀진 자아가 있었을 뿐이다. P.246-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