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성옥은 1930년 감리교 선교사로 만주 하얼빈으로 파송되었다. 그가 하얼빈 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던 1935년까지 5년이 그의 1차 선교 사역이다.
변성옥의 2차 선교 사역은 1935년 이후 1945년까지 10년간이다. 북만주지방 감리사 현성원을 비롯한 한동규, 우인철, 박세평, 김병택 등의 목사들과 함께 변성옥은 1935년 조선 감리교 총리원을 탈퇴하고 그 해 1월 28일에 초교파적인 조선기독교회를 창립하였다. 효과적인 만주 선교를 목적할 때 교파주의 극복, 외국 선교사로부터의 재정적 자립, 부패한 기성교회로부터 격리, 그리고 장로교, 감리교, 동아기독교, 성결교회, 심지어는 국내의 이용도와 김장호 등 혁신세력을 총망라한 초교파적 연합이 선결 과제로 그가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신경, 길림, 하얼빈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기독교회는 1년 만에 1,500여명의 신도와 10개 지방 교회 설립을 달성했다.
변성옥은 1936년 3월 18일 길림성에 한동규와 현성원 등과 함께 3년제 길림학원을 개교하고 교역자 양성을 꾀하던 중 1937년 2월에 길림성 경도선 강밀봉에 길림 신학교를 세우고 교장으로 취임하여 자작자급의 정신으로 농촌교회를 지도할 교역자 양성에 주력했다. 그러므로 그는 집단농장 형식을 취하여 여름에는 농사를 지어 1년 학비를 충당하여 자급자족의 기틀을 다지고 농한기인 겨울에 집중적인 교육을 실시했던 것이다. 1990년 제1회 한국 기독교 선교대상을 수상한 경북 청도가 고향인 박용묵 목사가 본 신학교 1회 졸업생이다.
조국의 독립을 염원한 변성옥은 만주 항일 독립 운동가들을 후원하다가 일경에 의해 길림성에서 체포되어 해방을 맞기까지 2년간 옥고를 치름으로 선교의 문화 명령을 몸소 수행했던 총체적 선교에 몰입했다.
변성옥은 1891년 6월 5일 평안남도 평양 수옥리 303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광성 학교를 거쳐 1909년 채필근 등과 함께 숭실학교를 제6회로 졸업한 후 평양 숭실 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13년 본교를 졸업하였다. 평양 남산현 일요학교와 경성 배당학당에서 교편을 잡으면서도 전도사로 활동하던 중 그는 1916년에 미국으로 유학의 길을 선택했다. 그 해 12월에 친구의 담보 상륙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입항한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퍼시픽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후 일리노이스 주 에반스톤의 노스 웨스턴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1920년 7월에 신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1921년 8월 11일에 귀국했다. 게재한 사진은 동아일보에 게재된 귀국한 때의 신장 5척 3부의 긴 얼굴에 검은 피부색을 띈 변성옥이다.
1923년에 목사 안수를 받은 변성옥은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 연희전문학교 교수, 케이블 선교사가 교장으로 있던 협성신학교 교사와 교감, 함경북도 길주 신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면서 기독교 교육에 투신했다. 그가 평남 감리교 지방회가 1923년 6월에 신흥리 감리교회에서 개최했을 때 그 달 7일에 주일학교에 대한 강연을 하여 교회 교육에도 큰 관심을 보였고, 1929년 10월에 개최한 전조선 주일학교대회 중 그 달 9일에 ‘예수와 청년문제’라는 제하의 강연을 하였던 것은 그가 기독교 교육에 투신한 일례에 불과하다.
미국 남북 감리교회가 1930년 통합함에 따라 조선감리교회를 창립할 때 신흥우 등과 함께 북 감리회 전권위원, 제5부 교회 규칙 위원장 등으로 피선된 변성옥에게서 하나된 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엿볼 수 있다. 조선 감리교회가 재건파와 부흥파로 양분된 상황에서 변성옥이 1949년 4월 기독교대한감리회로 통합시키는 데 공헌하였던 것도 에큐메니칼 정신에서 가능했다.
시사구락부가 1925년 2월에 조직되었을 때 변성옥이 이창제, 이갑성, 현신덕, 조철호, 배 집 등과 함께 전 민중의 도덕적 자각 촉구 및 반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듦으로써 그의 사회 변혁에도 뜻을 두었음을 알게 된다. 그의 사회 운동은 8•15광복 후에도 계속되었다. 월남한 변성옥은 정계에 투신하여 대한독립 촉성국민회 청년부장과 조선 적십자사 비서장으로 피선되었고, 1946년 미국 군정 하에서 민선 입법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47년에는 법제사법위원과 민주 의원의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1946년 5월에 YMCA 무보수 총무로 피선되어 이호빈 목사와 김우현 목사 등과 함께 Y 재건 사업에 착수하던 변성옥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정계에서 떠난 후 YMCA에 온전히 헌신했다. 그는 Y의 협동 총무였던 죠지 A. 피취 선교사와 함께 전국을 순방하면서 지방 Y 재건과 간사 양성을 통한 지도력 개발에 주력하였다. 미국 우스터 대학과 유니온 신학교를 차례로 졸업한 피취 선교사는 1910년에 중국 YMCA 선교사로 파송되어 사역하던 중 김 구등 대한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친한파였다.
변성옥은 이호빈 목사가 1946년에 세운 초교파적인 중앙신학교에서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초대 교장을 역임하였는데 만주 길림 신학교의 초교파 교역자 양성의 꿈을 버리지 않았음을 읽을 수 있다. 그 밖에도 그는 조선 기독교 연합회 이사를 역임하였다.
청주 YMCA 창립 2주년 기념식에 참석코자 출장을 떠난 변성옥은 1950년 3월 5일에 59세를 일기로 급성췌장염으로 순직하였다. 1950년 3월 10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장례식은 그 달 9일 오전 11시에 종로 YMCA 강당에서 양주삼과 정일형 등 사회 유지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엄숙히 집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