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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메시아 사역

기독일보

입력 Apr 10, 2014 11:15 AM P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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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83] theBibleland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메시아 사역
(Photo : 기독일보)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메시아 사역

1. 예루살렘의 동쪽 베다니 마을에 도착하심 (요 11:55-12:1,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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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강 동편, 베뢰아 지역을 떠나신 예수님은 여리고1를 거쳐 메시아의 마지막 사역을 완성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의 동쪽에 위치한 베다니 마을에 도착하셨다. 때는 많은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때였다. 예수님께서도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도착하셨다. 이곳은 현재 엘 아자리야 (el Azariya)라는 아랍 마을로써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마을이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던 길은, 데이빗 도르시 (D. Dorsey)에 따르면 아둠밈 비탈 (Mishor Adummim) - 와디 호드 (Wadi el Hod) – 에인 호드 (Ein el Hod) – 아자리야 (el Azariya)를 지나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다. 이 길은 여호수아 15:7-9절과 18:16-17절에 기록된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선과 일치한다. 예수님은 이 길을 이용하여 감람산 동쪽에 위치한 베다니 마을에 도착하셨다.

절기가 임박하면 더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였다. 1세기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
플라비우스는 유월절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된 양의 수를 256,500마리로 기록한 예가 있다. 만약 이 숫자가 옳다면, 양 한 마리 당 10명이 나누어 먹을 경우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 수는 약 2백만 명이 넘었을 것이다. 요세푸스의 또 다른 기록에는 유월절 예루살렘에 모인 순례자들의 수는 약 2,700,000명이라 기록하기도 했다 (JW II, 14:3).

다윗성에서 바라본 동쪽 감람산과 실완 마을, 벳바게 모습
(Photo : 기독일보) 다윗성에서 바라본 동쪽 감람산과 실완 마을, 벳바게 모습

예루살렘 인근, 곧 안식일에 걷기 알맞은 거리에 많은 마을들이 세워졌다. 이런 마을의 주민들은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온 순례자들에게 숙박과 필요한 희생양 그리고 의식에 필요한 도구들을 제공하였다.

요한복음 12:2-8절에 따르면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쌔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고 기록되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거기>란 마가복음 14:3에 기록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으로써 마가 (막14:3-9)와 마태 (마26:6-13)는 향유를 부은 사건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이틀 전의 사건으로 기록하였다.2 예수님은 유월절 엿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셨으니 그 때는 금요일 오후였다.

2. 유대인의 왕 (메시아)으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심 (막 11:1-11, 마 21:1-11, 14-17, 눅 19:29-44, 요 12:12-19)

아마도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시간적으로 약 이틀을 보내셨을 것이다. 베다니에서 이틀 동안의 행적은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는다. 베다니에서 이틀을 보내신 예수님은 일요일 오전에 예루살렘 성으로 가셨다. 벳바게에 이르러 예수님은 두 제자를 벳바게의 맞은편 마을로 보내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어오라>고 말씀하셨다. 벳바게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그 마을은 여리고에서 베다니를 경유하여 예루살렘 성으로 연결되는 고대 도로에 위치했음은 분명하다. 아마도 지금의 아부 디스 (Abu dis) 아랍 마을이 가장 유력하다. 만약 벳바게의 위치가 아부 디스 (Abu dis)가 확실하다면 나귀가 매여있던 맞은편 마을은 지금의 감람산 경사진 곳에 위치한 실완
(Silwan)이 옳다.3

벳바게 맞은편 마을에서 끌어온 나귀를 타시고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의 모습으로 예루살렘 성으로 가셨다. 이 사건은 모든 복음서에 기록되었다. 이 사건을 두고 마태는 선지자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기록하였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4>. 많은 사람들이 자기 겉옷을 나귀 안장에 얹고 또 길에 펴고 밭에서 베어온 나뭇가지5를 길에 펴기도 하며 소리지르기를 마가의 기록에는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태의 기록에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누가의 기록에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그리고 요한복음에는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을 환영하며 맞는 무리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불평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고 말씀하셨다. 이후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으로 좀 더 가까이 가셔서 성을 가까이 보시고, 눈물을 지으며 말씀하시기를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예루살렘 성의 멸망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이후 예수님은 무리들의 환호 속에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는데 그 내용은 마태복음에 기록되었다.6 나귀를 끌며 앞서기도 하고 뒤를 따르는 많은 무리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을 바라본 성 안에 많은 무리들은 크게 소동하였다: <이는 누구냐>라 묻는 무리들에게 따르는 사람들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온 선지자 예수라> 대답하였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는 아이들과 나아오는 소경과 저는 자들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성전에 있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냐>며 분노하였다. 이에 예수님은 <그렇다 어린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본 일이 없느냐>고 말씀하셨다.
이 모든 일이 있은 후에 예수님은 성전을 떠나 베다니 마을로 다시 돌아가셔서 그곳에서 머무르셨다.

3.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을 청결케 하심 (막 11:12-18, 마 21:18-19, 12-13, 눅 19:45-48)

2004년 발굴된 실로암 연못과 물이 많은 이곳에 무성하게 자라는 무화과 나무.
(Photo : 기독일보) 2004년 발굴된 실로암 연못과 물이 많은 이곳에 무성하게 자라는 무화과 나무.

다음날 곧 월요일 이른 아침에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나와 예루살렘 성으로 향하셨다. 이 길은 전날 벳바게 맞은편 마을에 매여있던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던 같은 길이다. 예수님은 시장하셨기에 잎이 무성한 무화과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가까이 다가가셨으나 아무것도 얻지를 못하셨다.7 이에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기를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고 하셨으니 이는 제자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함이었다. 만약 교훈의 목적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은 시대를 구분하지 못하는 잘못을 무화과 나무에 애매한 분풀이를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마가는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는 기록을 남김으로 교훈에 대하여 암시하였다.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말씀하시기를 마가의 기록에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마태의 기록에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누가의 기록에는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이에 대한 선지자들의 기록은 이사야 56:7과 예레미야 7:11에서 읽을 수 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4.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헬라인 몇 사람이 예수님을 방문하다 (요 12:20-50)
유월절 절기는 유대인들만 올라왔던 것은 아니다. 본문에 따르면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인들도 절기에 참여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찾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기 위하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요청하였고, 빌립은 안드레를 찾아가 말하고 그 두 사람이 예수님께 이 사실을 고하였다. 헬라인이 예수님을 찾은 것과 예수님께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말씀을 하심으로 자신의 죽음을 드러내셨다. 이에 무리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고 말하고 있다. 이 일은 월요일 성전을 방문하신 때에 있었던 일이다.

5.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가 시든 것을 발견하다 (막 11:19-25, 마 21:19-22, 눅 21:37-38)
예수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지내시고, 저녁에는 성전을 떠나 감람산 베다니에 머무셨다가 다시 아침에 성전을 방문하신 일은 일반적이다. 다음날 (화요일) 아침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다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셨다. 전날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것을 기억한 제자들은 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씀하였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다>.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무화과 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과 믿음으로 기도하면 이루리라는 이 말씀과는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마태의 기록에는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 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예수님의 가르침은 명백히 믿고 기도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제자들도 왜 무화과 나무가 말랐는지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어떻게 무화과 나무가 말랐는지에 대한 질문에 예수님의 답변이셨다. ‘말씀하셨으니 말랐나이다’에 대한 믿음이 실린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저주하신 그대로 된 일에 대하여 여전히 제자들은 나무가 마른 사실에 대해 의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두 가지 관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하나는 열매 없는 사람은 무화과 나무처럼 될 것이라는 교훈과 아울러 의심치 않고 믿음으로 기도하면 다 이루리라는 교훈이다.

6. 산헤드린 공의원들이 예수님의 권세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다 (막 11:27-12:12, 마 21:23-22:14, 눅 20:1-19)
같은 날 성전 뜰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걸어 다니실 때에 대제사장들, 서기관, 장로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냐>는 것이 그들이 대적한 질문이었다. 이미 그들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을 방문하셨을 때에 무리들이 외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부분에 대해서도 몹시 못마땅했었다. 그때에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을 매우 부끄럽게 하셨다. 다시금 그들은 예수님의 권세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에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권위와 같은 연장선에 두시되 세례 요한의 권위에 대하여 그들에게 질문하셨다. 이 적절한 질문은 종교 지도자들을 매우 당황하게 만들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 당황한 지도자들은 서로 의논하기를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그러면 사람에게로서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된 선지자로 여기므로 저희가 백성을 무서워하는지라> 이에 그들은 예수님께 대답하기를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을 회피하였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세 가지 비유를 통하여 악한 관원들로 고소하였다. 세 가지 비유란 포도원 주인 비유 (막12:1-12, 마21:33-41, 눅20:9-16), 두 아들 비유 (마21:28-32), 자기 아들의 혼인을 위한 잔치를 베푼 임금 비유 (마22:1-14)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 가지 비유는 곧 자기들을 빗대어 하신 말씀으로 알고 <즉시 체포하려고 했지만> 따르는 무리들로 인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7.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 문제로 인하여 함정에 빠뜨리려 하다 (막 12:13-17, 마 22:15-22, 눅 20:20-26)
두 번에 걸쳐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음모가 실패하자 종교 지도자들은 이 문제를 로마의 정치적인 문제로 끌어가고자 했다. 누가는 그 사실을 좀 더 직설적으로 기록하였다: <이에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 하여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였다>. 그들이 정치적으로 들고 나온 문제는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냐. 우리가 세금을 바칠까 말까>라는 것이 그들이 갖고 온 문제였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마가는 <그 외식함을 아시고> 마태는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라 기록하였다. 악한 관리들의 심중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은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그들을 꾸짖으셨다.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 . .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지도자들은 더 이상 말로써 예수님을 책 잡을 수가 없어 잠잠하였다.

8.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대한 어려운 질문을 하다 (막 12:18-27, 마 22:23-33, 눅 20:27-40)
아마도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했던 이 질문은, 종종 바리새인들을 곤경에 빠뜨렸던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부활도 천사도 없다 하는 사람들이다. 사두개인들의 율법에 대한 이해는 사도행전 23:6-8절에도 기록되었다.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는 말씀으로 그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사두개인들은 더 이상 말로써 예수님을 책 잡을 수 없게 되었다.

9. 사두개인들이 말 문이 막힌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기뻐하다 (막 12:28-34, 마 22:34-40)
예수님께서 변론을 잘 하시고 사두개인들로 대답을 할 수 없게 하였음을 안 바리새인 가운데 한 서기관이 율법에 관하여 문제를 제기하였다: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크니이까>.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바른 율법에 대해 말씀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이에 서기관은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다: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그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를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라고 답하였다. 예수님은 그의 지혜롭게 대답함을 보시고 그를 칭찬하셨다.

10.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이며 다윗의 주가 되신다 (막 12:35-37, 마 22:41-46, 눅 20:41-44)
역시 같은 날인 화요일에 있었던 사건이다. 성전에 모인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질문하셨다.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고 묻는 예수님께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자손이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예수님은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마태는 예수님의 말 잘 하심으로 인하여 <바리새인들이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예수님께 묻는 자도 없다>고 진술하였다.

11. 공적으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엄히 책망하심 (막 12:38-40, 마 23:1-39, 눅 20:45-47)
예수님은 1세기 당시 유대교를 주도했던 바리새인들의 종교적인 위선을 폭로하셨으며 그들을 엄하게 책망하셨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죄악에 대하여 심각하게 다루어야 한다. 이 같은 일은 오늘날에도 교회 내에서 공공연히 일어나고 때문이다. 메시아를 기다린 의의 선생들은 정작 오신 메시아를 십자가에 죽이는 엄청난 비극을 저질렀다.

바리새인들의 종교적인 위선에 대하여 마태는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서론/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자들로서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자들이다. 현대 유대 종교인들은 이보다 훨씬 더 급진적으로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예루살렘 메아 쉐아림을 방문하면 검은 복장에 중절 모자를 쓰고 거리를 활보하는 유대 종교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예루살렘 성 안의 통곡의 벽에서도 물론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1세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문제와 현대 유대인들의 심각한 폐단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말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지도자들의 받는 책임은 더욱 크다.
<1.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못 들어가게 하는도다>
<2.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3.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또 너희가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제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야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4.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우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 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게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6.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결론/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12.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심 (막 12:41-44, 눅 21:1-4)
예수님은 성전 연보 궤를 마주하여 앉으셔서 연보 궤에 헌금하는 자들을 유심히 지켜보셨다. 많은 사람들이 연보 궤에 적지 않은 금액들을 헌금하였다. 부자들로부터 시작해서 가난한 과부에 이르기까지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보신 예수님은 가난한 한 과부가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체를 넣었느니라>

헌금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은 양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자신의 삶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에 주목하셨다. 여인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자신의 전체 삶에 적용하였다. 하지만 부자들은 삶의 일부로 취급하였다. 부자나 가난한 과부의 입장에서도 이런 헌금이 사두개인들의 주머니를 풍족하게 해 준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을까.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며 부자들은 헌금을 자신들의 삶의 일부분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삶의 전부를 드렸던 것이다. 이 점을 주목하신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저희는 과부의 자산을 삼키는 자>라고 막12:40절, 눅20:47절에 기록되었다.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이 적절하게 사용되지 못했음은 요세푸스의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본디오 빌라도는 성전 금고에서 일부의 돈을 취하여 수로를 만드는 경비로 사용하여 큰 소동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은 화요일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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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여기에서 말하는 여리고는 구약 성경에 기록된 여리고가 아니라 헤롯에 의해 건설된 신약 시대의 여리고를 가리킨다.
각주 2 누가복음 7:36-50에 기록된 <바리새인인 시몬의 집에서 어떤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기름 부은 사건>은 베다니에서의 사건과 분명히 다르다. 누가복음에는 그 여인을 가리켜 <죄인인 한 여자>라고 기록되었을 뿐 후기 전승에 의한 막달라 마리아란 표현은 나타나지 않는다. 막달라 마리아란 역사적으로 전혀 근거 없는 내용이다. 아울러 누가복음에 기록된 여인을 마가와 마태의 기록에 나오는 베다니 마리아로 생각하는 것도 옳지 않다.
각주 3 감람산 정상에 위치한 벳바게로 이야기하는 자리에는 십자군 시대에 채택된, 현재 프란체스칸 수도원에 속한 벳바게 기념 교회가 서 있다.
각주 4 스가랴 9:9에 기록되기를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이사야 62:11을 참고한다.
각주 5 종려나무에 대한 기록은 요한복음에만 나타나고 그 외 복음서는 밭에서 베어온 나뭇가지라 표현하였다.
각주 6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신 후에 마태는 성전을 청결케 하신 사건을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신 일련의 사건 속에 포함시켰지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성전 청결 사건을 그 다음날 곧 월요일 오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하였다.
각주 7 마가복음은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없는 이유를 <아직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고 기록하였다. 무화과 철이 아닌데도 왜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로부터 열매를 기대하셨는가.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필자가 기록한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참고한다.

이주섭 목사.
(Photo : ) 이주섭 목사.

이주섭 목사는 성경의 사실적 배경 연구를 위해 히브리어를 학습하였고, 예루살렘 대학과 히브리 대학에서 10여년에 걸쳐 이스라엘의 역사, 지리, 고고학, 히브리인의 문화, 고대 성읍과 도로를 연구한 학자이다. 그는 4X4 지프를 이용하여 성경의 생생한 현장을 연구하기도 했다. 문의 jooseobl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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