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을 읽다 보면 저자인 누가는 메시아의 탄생에 특히 집착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예를 들면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 연도를 로마의 역사적인 사건인 인구 계수를 언급하고 있다. 누가복음 2:1-2절에, 가이사 아구스도 (Augustus Caesar/ 30BC-14AD)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 (Quirinius)가 수리아의 총독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그렇다면 예수님의 탄생 연대와 깊은 관련이 있는 로마의 인구 계수는 역사적으로 사실인가? 또한 첫 번째 인구 계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 학자들 간에 논의된다. 그래서 2012년 성탄절을 앞두고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요세푸스는 자신의 저서인 유대 역사서에서 헤롯 아켈라오스 (4 BC-6 AD)의 추방 내용을 기록하는 중에 수리아의 총독인 구레뇨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헤롯 아켈라오스는 헤롯 1세 (37-4 BC)의 아들로서 통치 10년 만에 권좌에서 폐위당하였다 (마 2:22). 그래서 헤롯 아켈라오스 이후 유대 지역은 로마 총독이 다스리는 총독 시대가 시작되었다. 1차 총독 시대는 6 AD-41 AD이며, 2차 총독 시대는 44-66 AD 곧 1차 유대인 항쟁까지이다. 헤롯 아켈라오스가 폐위된 후 그가 다스리던 지역은 로마 총독이 다스렸지만, 그 외의 갈릴리와 베뢰아는 헤롯 안티파스가, 골란 고원과 이두래는 헤롯 빌립이 다스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같은 시대에 로마 총독과 함께 분봉왕으로 통치했던 두 헤롯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헤롯 아켈라오스에 대해서는 에센파에 속했던 시몬 (Simon)의 기록을 통해서도 읽을 수 있다: 아켈라오스의 지경은 수리아의 영토 속에 편입되었으며, 가이사는 수리아 백성들의 진정과 아켈라오스의 집을 매각하기 위해 수리아 선임 총독인 구레뇨 (Quirinius)를 파견하였다.

요세푸스는 유대 역사서 18권의 첫 번째 장에서, 구레뇨가 실시한 세금 정책에 대해 기록하였다. 구레뇨의 세금 정책은 많은 유대인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주었고, 잦은 소요의 원인이 되었다. 사도행전 5:37절의 기록에 보면: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 . . 요세푸스 역시 사도행전에 기록된 갈릴리 사람 유다를 언급하면서, 그는 세금 바치기를 거부한 인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사도행전이나 요세푸스의 기록에 언급된 세금 징수는 아켈라오스가 폐위된 후에 일어난 사건으로 누가복음 2장에 기록된 인구 계수와는 다른 사건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누가복음의 호적 사건과 세금을 거둔 로마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잘 이해해야 한다.

구레뇨가 실시한 호적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고 맨 처음 주장한 사람은 1835년 예수의 생애 (Leben Jesu/ the Life of Jesus)를 기록한 데이빗 스트라우스 (David Strauss)이다. 그러나 이후 학문의 발전과 고고학적인 노력으로 많은 파피루스와 역사적인 문헌들이 발견됨으로 고대 세금 징수에 관한 역사적 사건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를 연구하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은 어랑겐 (Erlangen) 대학 교수인 에떼버트 스타퍼 (Ethelbert Stauffer)이다. 로마의 통치자들은 세금 문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거의 14년에 한번씩 인구 계수를 실시하였다. 가이사 아구스도 (Augustus)는 주전 30년, 이집트를 점령하였으며, 주전 27년 처음으로 세금을 징수하였다. 동시에 그는 골 (Gaul)지방에서도 비슷한 세금 정책을 실시하였다.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록하면서 역사적인 부분을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기록된 내용이 매우 설득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마리아와 요셉은 유다 지파의 다윗 가문 출신이다. 이는 출신 신분을 다른 지파에게 양도할 수 없는 가문의 내력을 의미한다. 다윗 가문은 주로 유다 산지의 베들레헴을 중심으로 생활하였다. 그런데 마리아와 요셉이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생활하였음은 아마도 바벨론 포로 이후 그들의 조상 일부가 나사렛에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정확한 것은 마리아와 요셉은 베들레헴이 아닌 갈릴리 나사렛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이제 다윗 가문인 마리아와 요셉은 로마 황제의 명령에 따라 호적을 위하여 나사렛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여행해야만 했다.

스타퍼 교수는 구레뇨와 관련된 로마의 세금 징수에 관한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1674년 아구스도 (Augustus)의 한 관료의 무덤 비문이 베니스 (Venice)에서 파편으로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이 비문에 따르면 구레뇨는 아파메아 (Apamea)와 수리아의 모든 지경으로부터 세금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 비문 내용은 1719년에 그대로 복사되었고 출판되었지만 원래의 기록인 비문이 사라지고 없어 오랫동안 위조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1880년 비문의 또 다른 부분이 발견되므로 아구스도의 관료 비문에 기록된 전체 내용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레뇨의 명령에 따라 나는 117,000명이 거주하는 도시 아파메아 (Apamea)에서 인구를 계수하였다. 또한 구레뇨의 명령에 따라 나는 이두래 (Ituraeans)를 대항하여 진격하였으며 레바논 산지에 위치한 많은 요새들을 함락하였다.

이 비문에 기록된 인구 계수 시기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징후들을 살펴볼 수는 있다. 헤롯은 자신의 통치 말기인 주전 8년 무렵, 로마 황제인 가이사 아구스도의 관심에서 밀려났다. 이것은 로마의 팔레스틴 세금 우대 정책에 변화가 생긴 것을 의미한다. 구레뇨는 로마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은 사람으로서, 그는 지중해 동해안 지역의 총독으로 주전 12년에 있었던 세금 정책에서도 최고 책임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헤롯이 황제의 신임을 잃은 주전 8년 이후, 수리아 지역에 대한 첫 번째 세금 정책은 팔레스틴을 중심으로 주전 7년에 이루어졌다. 이 세금 정책은 주후 7년에 마무리되었다. 요세푸스의 기록을 참고하면: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안 (후에는 가이사 아구스도로 불림)이 승리한 후 37년에 구레뇨의 인구 계수 (apotimesis work)는 마무리되었다.

14년간 지속된 구레뇨의 세금 명부는 전대미문의 기록에 속한다. 이것은 구레뇨의 가장 괄목할 만한 역사적인 업적에 속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구레뇨는 동로마 지역을 다스리는 로마 황제의 군인 섭정관으로, 주전 12년에서 주후 16년까지 수리아 지역을 통치하였다.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록하면서 당시 가장 잘 알려진 역사적 사건인 인구 계수와 함께 로마 황제를 대신하여 동방에서 가장 영향력을 행사하던 구레뇨를 언급한 것은 정말 놀랍다. ‘이 호적은 . . . 첫 번 한 것’이라는 이 표현은 로마 제국 내의 수리아에서 실시된 세금 정책 연대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구 계수가 시작된 주전 7년 이후, 그리고 헤롯 1세가 사망한 주전 4년 이전에 태어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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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섭 목사는 성경의 사실적 배경 연구를 위해 히브리어를 학습하였고, 예루살렘 대학과 히브리 대학에서 10여년에 걸쳐 이스라엘의 역사, 지리, 고고학, 히브리인의 문화, 고대 성읍과 도로를 연구한 학자이다. 그는 4X4 지프를 이용하여 성경의 생생한 현장을 연구하기도 했다. 문의 jooseobl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