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4장은 천국에 대한 비전을 일깨워 주시려고 여러 모양으로 천국소망에 대한 가능성을 시사하신 복음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4:1-3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신 말씀이 신약성경 중에서는 내세의 궁극적 소망이 되는 천국에 대한 비전을 가장 쉽고 정확하게 증거하신 말씀입니다.
아담의 혈통으로 태어난 우리는 아담의 죄에 직접 전가된 후손의 자격으로 동참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고통에 시달리며 영혼은 물론 정신과 육체, 생활전폭에 있어서 날마다 지옥의 그림자 속에 시달리며 살아왔습니다. 기대가 어긋나는 실패로 인한 절망, 질병에 대한 고통, 모든 삶의 꿈이 허물어져 가는 고통, 경제적으로 하나님 앞에 자기 분복을 얻어 누리지 못하고 가난에 시달리며 쫓기며 살아야 하는 괴로운 입장들이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마음을 충동질하고 있습니다.
정신과 육체가 당하는 세상조건에서의 입장이 아닌 그보다 더 힘겨운 영원한 형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아직 생각지 못하는 가운데 있으면서도 영적인 고통보다는 인생고에 시달리는 오늘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으로 신령한 다른 세계를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요한복음 14:2-3에서 말씀하시는 내세소망은 이 땅 위에 육체로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계십니다. 이는 곧 하늘에 영원한 처소가 마련된다는 말씀이고 그 처소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자신을 반드시 거쳐야만 한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4:4에서 예수님이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하신 말씀에 도마는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했습니다. 예수님은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과 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듯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는 어조로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7절의 말씀은 예수님과 하나님이 같은 분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라고 하신 말씀에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빌립의 질문은 상당히 어긋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알았고 보았느니라”고 과거완료형으로 말씀하셨는데 빌립은 아직 보질 못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하십니다. 이는 곧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는 말씀 속에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14 이하에서 소개되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요단강에 찾아 가셔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기를 원하셨을 때 요한이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말씀하시니 하나님의 뜻이라는 입장 때문에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즘 교회에서 세례를 주는 것은 약식세례입니다. 원래는 물 속에 몸을 담갔다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보니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속해 주신 분임을 깨닫고, 죄인으로 살았던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못박혀서 죽어 물 속에 장례 치루고 이제부터는 내 입장에서가 아닌 예수님 입장의 신앙인생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세례받는 참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인데 왜 세례를 받으셔야 했을까요? 그것은 본을 보이기 위함이며 하나님의 더 큰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후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같은 형체의 성령이 예수님 머리에 임하심이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신학적으로 하나님은 삼위일체라고 배웠습니다. 위(位)는 세 분이 달라도 몸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이 세 분의 몸이 하나입니다.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하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에게 인식을 바로 시키시기 위해 삼위일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아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시니 성령이 그에게 임하셨습니다.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말씀으로 증거해 주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한날한시에 나타나신 장면은 마태복음 3장 밖에는 없습니다.
빌립보서 2:6-8에도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했습니다. 이 말씀도 예수님은 하나님과 한 몸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10 이하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하신 말씀은 구약시대 선지자들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신약시대 사도들의 입을 통해 증거된 말씀, 구약시대 선지자들을 통해 증거된 말씀, 예수님의 입을 통해 증거된 말씀, 이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는 것으로 깨닫는다면 예수님도 성령을 받으신 이후부터 성령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으로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하신 말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똑같은 입장은 우리가 성령을 받고 그 성령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입술을 통하여 말하게 하심을 따라 전하는 말씀은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늘나라를 소개하고 증거하시면서 자기를 통하여 하늘나라에 갈 수 있도록 권면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14:12에서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하시던 일을 믿고 구원얻게 되면 그 사람도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전도해서 하늘나라로 그들을 안내하고 인도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하신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얻어 성령받은 사람들에 의해 땅 위에 천국으로 가는 정거장 역할을 하는 교회를 세울 것을 밝히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6:18-19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천국과 교회와의 직선관계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교회에서 잘못해서 책벌을 받으면 천국에도 그대로 기록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늘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목적은 곧 선교를 위한 것입니다. 이 선교를 위해 우리가 복음의 제물이 되고 땅 끝까지 이 사명을 성공적으로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희생과 헌신을 통한 봉사로 진실된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13절에서“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하셨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땅 끝까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전달되고 깨닫게 되어지길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이것을 위해 생애를 바쳐 헌신 봉사해야 하는 것은 그 이름을 인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무한한 영광을 돌려드리는 목적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을 예수님 이름으로 하나님께 청구하면 무엇을 구하든지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보장받았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6-9에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교를 위한 많은 것들을 이미 주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현세의 삶을 위해, 육신의 즐거움과 안락함만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면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일에 헌신하며 필요한 부분을 청구할 때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을 해 나가고 있던 우리 교회로 하여금 선교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충성하며 헌신하는 세월 속에서 수많은 나라에 교회를 세우게 하시고 선교사들을 파송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해 주신 하나님을 생각해 볼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 더욱 힘쓸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일로 인해 우리가 살게 되고 하나님이 맡기신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시는 예수님의 풍성한 손길이 항상 우리 뒤에서 뒷바라지해 주셨기에 지금껏 선교하면서 우리 교회는 모자람이 없어 왔고 앞으로도 모든 일에 풍족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교회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이루어져 가야 하겠는데, 어리석게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보다 자기수단과 방법으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자들이 많음이 안타깝습니다. 지혜있는 사람은 그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가까운 장래에 이 선교라는 사명의 기회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놀라운 선교의 제물로 열납되고 선교에 대한 그릇으로 쓰임받을 때 그리스도의 그 풍성한 몫에 서둘러 참여하게 될 것을 축원합니다.
아담의 혈통으로 태어난 우리는 아담의 죄에 직접 전가된 후손의 자격으로 동참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고통에 시달리며 영혼은 물론 정신과 육체, 생활전폭에 있어서 날마다 지옥의 그림자 속에 시달리며 살아왔습니다. 기대가 어긋나는 실패로 인한 절망, 질병에 대한 고통, 모든 삶의 꿈이 허물어져 가는 고통, 경제적으로 하나님 앞에 자기 분복을 얻어 누리지 못하고 가난에 시달리며 쫓기며 살아야 하는 괴로운 입장들이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마음을 충동질하고 있습니다.
정신과 육체가 당하는 세상조건에서의 입장이 아닌 그보다 더 힘겨운 영원한 형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아직 생각지 못하는 가운데 있으면서도 영적인 고통보다는 인생고에 시달리는 오늘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으로 신령한 다른 세계를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요한복음 14:2-3에서 말씀하시는 내세소망은 이 땅 위에 육체로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계십니다. 이는 곧 하늘에 영원한 처소가 마련된다는 말씀이고 그 처소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자신을 반드시 거쳐야만 한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4:4에서 예수님이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하신 말씀에 도마는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했습니다. 예수님은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과 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듯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는 어조로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7절의 말씀은 예수님과 하나님이 같은 분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라고 하신 말씀에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빌립의 질문은 상당히 어긋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알았고 보았느니라”고 과거완료형으로 말씀하셨는데 빌립은 아직 보질 못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하십니다. 이는 곧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는 말씀 속에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14 이하에서 소개되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요단강에 찾아 가셔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기를 원하셨을 때 요한이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말씀하시니 하나님의 뜻이라는 입장 때문에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즘 교회에서 세례를 주는 것은 약식세례입니다. 원래는 물 속에 몸을 담갔다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보니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속해 주신 분임을 깨닫고, 죄인으로 살았던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못박혀서 죽어 물 속에 장례 치루고 이제부터는 내 입장에서가 아닌 예수님 입장의 신앙인생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세례받는 참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인데 왜 세례를 받으셔야 했을까요? 그것은 본을 보이기 위함이며 하나님의 더 큰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후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같은 형체의 성령이 예수님 머리에 임하심이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신학적으로 하나님은 삼위일체라고 배웠습니다. 위(位)는 세 분이 달라도 몸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이 세 분의 몸이 하나입니다.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하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에게 인식을 바로 시키시기 위해 삼위일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아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시니 성령이 그에게 임하셨습니다.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말씀으로 증거해 주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한날한시에 나타나신 장면은 마태복음 3장 밖에는 없습니다.
빌립보서 2:6-8에도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했습니다. 이 말씀도 예수님은 하나님과 한 몸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10 이하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하신 말씀은 구약시대 선지자들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신약시대 사도들의 입을 통해 증거된 말씀, 구약시대 선지자들을 통해 증거된 말씀, 예수님의 입을 통해 증거된 말씀, 이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는 것으로 깨닫는다면 예수님도 성령을 받으신 이후부터 성령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으로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하신 말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똑같은 입장은 우리가 성령을 받고 그 성령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입술을 통하여 말하게 하심을 따라 전하는 말씀은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늘나라를 소개하고 증거하시면서 자기를 통하여 하늘나라에 갈 수 있도록 권면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14:12에서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하시던 일을 믿고 구원얻게 되면 그 사람도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전도해서 하늘나라로 그들을 안내하고 인도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하신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얻어 성령받은 사람들에 의해 땅 위에 천국으로 가는 정거장 역할을 하는 교회를 세울 것을 밝히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6:18-19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천국과 교회와의 직선관계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교회에서 잘못해서 책벌을 받으면 천국에도 그대로 기록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늘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목적은 곧 선교를 위한 것입니다. 이 선교를 위해 우리가 복음의 제물이 되고 땅 끝까지 이 사명을 성공적으로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희생과 헌신을 통한 봉사로 진실된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13절에서“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하셨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땅 끝까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전달되고 깨닫게 되어지길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이것을 위해 생애를 바쳐 헌신 봉사해야 하는 것은 그 이름을 인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무한한 영광을 돌려드리는 목적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을 예수님 이름으로 하나님께 청구하면 무엇을 구하든지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보장받았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6-9에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교를 위한 많은 것들을 이미 주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현세의 삶을 위해, 육신의 즐거움과 안락함만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면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일에 헌신하며 필요한 부분을 청구할 때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을 해 나가고 있던 우리 교회로 하여금 선교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충성하며 헌신하는 세월 속에서 수많은 나라에 교회를 세우게 하시고 선교사들을 파송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해 주신 하나님을 생각해 볼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 더욱 힘쓸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일로 인해 우리가 살게 되고 하나님이 맡기신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시는 예수님의 풍성한 손길이 항상 우리 뒤에서 뒷바라지해 주셨기에 지금껏 선교하면서 우리 교회는 모자람이 없어 왔고 앞으로도 모든 일에 풍족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교회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이루어져 가야 하겠는데, 어리석게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보다 자기수단과 방법으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자들이 많음이 안타깝습니다. 지혜있는 사람은 그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가까운 장래에 이 선교라는 사명의 기회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놀라운 선교의 제물로 열납되고 선교에 대한 그릇으로 쓰임받을 때 그리스도의 그 풍성한 몫에 서둘러 참여하게 될 것을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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