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도 잘 알려진 오순절 계통의 교회인 순복음교회. 그러나 이 교회를 묘사하기에 오순절 계통이란 말은 다소 부족함까지 느껴진다. 순복음교회라고 하면 통성기도, 신유, 체험과 같은 신비한 요소를 먼저 떠올리기 쉽고 미국신학자들이 Korean Style Prayer라 부르는 통성기도도, Ju-Yo라는 주여삼창도 순복음교회를 빼놓곤 말할 수 없다. 한국에서 시작돼 한국을 넘어 전세계에 특별한 오순절 교회 문화를 만들어낸 교회가 바로 순복음이다.
이 중에도 나성순복음교회는 무려 37년간 LA 한인사회를 지켜 온 터줏대감이다. 미주 최대, 최고의 순복음교회이며 북미 지역 순복음교회의 모교회와 같은 곳이다. 그러나 자칫 이 거대한 타이틀 속에 녹슬고 구태의연해지기 쉬운 위험성이 내포된 것도 사실이다.
20여년 이상을 남미에서 선교사로 섬기던 진유철 목사가 이 교회에 부임한지 5년여가 됐다. 복음의 불모지 남미에서 기적과 같은 교회 성장을 일으켰던 그가 미주를 대표하는 이 교회에 부임한다 했을 때 놀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6년간 파라과이, 5년간 브라질에서 선교하며 순복음중남미총회장까지 지낸 베테랑 선교사 출신 목사가 무슨 일을 할지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진 목사는 “제가 한 것이 별로 없다”고 대답했다. 다음 질문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매일 열리는 새벽기도회에만 3백명씩 모인다, 젊은 층이 크게 부흥했다, 지난해 나성순복음교회 웹사이트에 25만명이 와서 설교를 듣고 가지 않았느냐”며 따지자 그제서야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진 목사로부터 ‘목회의 본질’에 관해 듣기 시작했다.
-목사님께서 나성순복음교회에 부임하신지 5년여가 된 것 같습니다. 그동안 이 교회 목회에 있어서 주력하신 부분 혹은 변화된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미주 순복음교회를 대표하는 교회인만큼 어려움도 적지 않으셨을텐데요.
저는 선교사 출신으로 소위 ‘맨땅에 헤딩하는 개척’을 하며 문제가 아닌 주님께 집중하는 훈련을 받은 것을 참 감사합니다. 문제는 언제 어디에나 늘 있지만 주님도 언제 어디서나 늘 동행하시기에 저는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힘든 상황을 만나면, 저도 사람인지라 당장은 반응할 수 밖에 없지만 제가 목회자라는 본질로 돌아올 때, 이 힘든 상황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제가 고민하는 중요한 문제는 오로지 “내 사역 가운데 주님이 함께 하시는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내 사역이 이뤄지고 있는가?”입니다.
저는 실은 이 교회에 부임해서 뭘 새롭게 한 것이 없습니다. 전임자이신 이영훈 목사님(현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은 목회자로서 참 존경할만한 분이시고 그분이 나성순복음교회에 닦아 놓으신 것을 저는 따라가기에도 벅찹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이뤄지는 새벽기도회와 주일예배, 각종 모임들, 교회 행사들을 잘 지키며 그 기초 위에서 주어진 일들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요 몇 년 사이 나성순복음교회를 묘사하는 몇가지 표현 중에, 나성‘순’순복음교회라는 말도 있던데 “새롭게 하신 일”은 없더라도 “변화”는 확실히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한 일이 없는데 우리 성도들도 교회가 다 변화되었다고 말합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 믿음의 확신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의 능력이란 것은 환경을 뛰어 넘을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환경을 극복할 수는 있습니다. 믿음의 확신이 없으면 환경에 잠식되지만 믿음의 확신이 넘치면 더 이상 문제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가 있는데 그것이 문제가 된다면 자신이 말씀 앞에, 하나님 앞에 덜 깨어진 것이죠.
영적 생명력이 내 안에 들어오면 꿈틀거립니다. 역동성이 생깁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생명력이 넘치니 확신이 생기고 어떤 사역을 해도 감당할 수 있는 동기가 주어집니다. 참 감사한 일은 우리 교회가 많은 사역을 감당하는데 대부분이 자원봉사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억지가 아니라, 어떤 보수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자원해서, 마음의 소원을 따라서 헌신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변화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고, 이로 인해 생명력이 생기고, 믿음의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들은 헌신적으로 사역하고 역동적으로 사역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과정에서 목회자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겠지요?
외람된 표현일 수도 있지만 저는 제가 일을 찾아서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저는 주어진 일을 합니다. 남들이 밖에서 저를 볼 때 제가 참 일을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베데스다대학교의 총장도 맡고 있고 남가주 교협의 수석부회장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일들에 은사가 별로 없습니다. 주님이 맡겨 주시니 두려움으로 감당할 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사용하시도록 순종하는 것이 목회자의 도리이자 역할, 의무일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접근은 미국적 토양의 교회성장학이 말하는 교회 운영과는 반대되는 것 같습니다. 순복음교회라면 교회 성장과 상당히 밀접한 교회가 아닙니까?
반대까지는 아니고 거리감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은 기독교와 함께 그 역사가 시작됐고 기본적으로 기독교 문화가 사회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기독교적 문화 속에서 태어나 자라고 또 그런 사람을 만나서 교제합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교회성장학자들이 말하는 소위 마케팅 기법은 어떤 면에서는 자연스럽고 어울리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한국처럼 기독교의 역사가 짧은 경우는 어떻습니까? 본질을 붙잡지 않고는 아무 것도 안됩니다. 저는 선교사 출신인데 선교지는 기독교를 알지도 못하고, 그런 문화도 없고 오히려 적대적이기까지 합니다. 무슨 교회성장학을 이야기 하기 전에 비기독교 문화와의 싸움이 먼저입니다. 본질로 승부 내지 않고는 금방 무너져 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크게 부흥은 했지만 어떤 면에서 이런 본질을 더욱 붙잡는 힘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자, 보십시오. 미국은 본질의 뿌리가 있는 상태에서 성장학을 이야기 했습니다. 현재 많은 미국교회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파산한다는 소식이 들리고 성도 수가 줄어든다고 합니다. 무너질 것 같지만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본질의 뿌리가 약한데 성장학만 이야기 하고 미국식 성장을 따라 하다가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면, 한국교회가 어려움을 겪는 가장 큰 원인은 리더입니다. 리더가 무너질 때 교회가 함께 무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독교의 기초가 약한 상태에서 교회가 성장하다 보니 목회자와 리더에게 성도들이 의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리더가 무너지면 성도들은 따라 무너질 수 밖에요. 그러나 미국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의 리더가, 특히 한인교회는, 본질을 붙잡아야 합니다. 본질을 강하게 붙들 때 거기서 부흥과 성숙, 성장이 이뤄질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지금 한인교회의 목회적 흐름이 본질을 붙잡는 목회와는 거리가 있다 자성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더욱 성숙하기 위해 지날 수 밖에 없는 과정입니다. 한인사회 안에 많은 교회가 있다 보니 경쟁도, 갈등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가식적이라 비판만 말고 그 안에서 교회의 순수성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리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따라 나라가 변화되는 것처럼 우리 교회들이 한인사회를 섬길, 보다 검증되고 순수한, 희생적인 사람들이 리더가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줄 필요도 있습니다.
-순복음교회는 본질에 있어서는 ‘최선을 다한다’ 칭찬받을 수도 있지만 그 외에 있어서는 약점이 많다는 외부의 비난을 자주 직면하지요?
아픈 사람에게 가서 물질 축복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까? 아픈 이에겐 그에게 맞는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순복음교회는 한국이 경제적으로 어렵고 사람들의 삶에 희망도, 빛도 없을 때 성령의 감동으로 태동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희망을 주고 일어설 힘을 준 교회입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순복음교회 성도들이 성령에 민감하다 보니 일반인들이 만들어 놓은 틀에서 볼 때는 이상한 면이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보통 잘 하지 않는 통성기도나 박수, 신유, 축사와 같은 일들이 순복음교회에서 자주 일어나는 것은 이제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밖에서 볼 때 우리가 격식이 없고 틀이 없는 것이지 우리 내부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정확한 길을 따라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은혜를 받다 보니 그 표현이 약간 남에게 불편함을 주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태권도를 배울 때 파란 띠를 매고 나면 눈에 보이는 게 없습니다. 자기가 최고인 줄 압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사람들이 구원의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어서 확신이 생기고 기적을 체험하니 그것을 증거하고 싶어 어쩔 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순수한 열정이 표현될 때 좀 정제되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고, 자신의 단편적 경험에 근거해 판단하다 보니 또 다른 상황이 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우왕좌왕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들의 영혼이 구원받고 영적 만족을 얻었다는 점에서 저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월의식을 가져선 안될 것이며 겸손한 태도로 부족함을 보완하고 균형을 맞추어 가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성령 운동에 집중하다 보니 대사회적인 운동이나 협력에는 오히려 둔감하다는 비난은 어떻게 보십니까?
교회는 마땅히 성경적으로 해석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교회는 지역사회에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고 성도가 발딛고 사는 지역사회가 잘 되도록 하는 일에 쓰임받아야 합니다. 믿음이란 것은 결국 믿지 않는 이들을 구원하는 것이므로 성도들이 모든 면에서 믿지 않는 이들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최근 LA의 일들을 예로 들면, 선거구 조정 문제는 교포사회와 직결된 문제이기에 저도, 우리 교회도 100% 이 일에 헌신될 수는 없지만 최대한 노력하고 협력했습니다. 동성애 문제는 어떻습니까? 이것은 교포사회를 넘어 전 미국의 내일을 결정짓는 중요한 문제이며 영적으로도 그 심각성이 크기에 교회가 더욱 적극적으로 앞장서야 할 문제라 생각합니다.
-‘선교사 출신’이라는 경력이 목사님의 목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 같습니다.
저는 제 목회의 대부분을 선교사로서 보냈습니다. 사실 부르심을 일찍 받았는데 목사가 안되려고 제 인생 제 멋대로 살다가 결국 하나님께 항복했습니다. 선교지에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목회하면서 저는 죽음을 뛰어넘는 목회에 관해 오랜 기간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명예욕이나 물질욕에서 자유함을 누리게 됐습니다. 죽을 목회라고 생각하니 자유해질 뿐 아니라 정말 날마다 죽는 목회를 경험하게 됐습니다. 여러 면에서 제가 부족했지만 하나님이 저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행복한 선교사 생활을 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사랑을 체험하며 감격하고 눈물 흘리는 목회를 했습니다.
-중남미 선교사로서 원주민목회, 한인 이민목회를 오랫동안 하셨는데, LA 이민목회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원주민목회나 이민목회나 예배함에 있어서는 다를 바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환경은 많이 달랐습니다. 일단 남미에서 목회할 때는 병원, 보험, 공권력과 같은 사회 안전 장치가 없었습니다. 사람의 노력과 힘으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니 이런 광풍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17년간 사역했던 파라과이는 교회를 신축하고 나면 경비원이 산탄총을 들고 경비를 서는 상태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예배 드리러 오는 길에 강도를 만나는 일은 예사이고, 상파울로에서 어떤 권사님은 새벽 예배를 나오며 5번이나 강도를 만났는데 나중에는 그 강도가 권사님의 얼굴까지 알아 볼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예배 나오시는 분들은 그냥 와서 눈도장이나 찍고 가는 정도로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미국은 환경이 아무래도 그곳들보단 낫다 보니 하나님께 매달리기 보다 세상에 의지하는 기대감이 더 큽니다. 그러나 어디에 있건 하나님의 주권과 역사를 알아야 나에게 주어진 이 삶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풍파 속에서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에만 끌려 다니게 됩니다. 신앙인이라면 한번쯤은 자신과 혹은 환경과 싸워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보겠다는 결단을 갖고 문제를 다스리고 기도로 매달려 봐야 합니다. 미국이 만들어 놓은 타락한 환경 속에서 끌려 가듯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파워를 잃어 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들에게 이런 도전을 줄 체험이 중요할 듯 합니다. 체험적 신앙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닌데요.
우리가 어려운 환경을 대할 때, 역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 세례를 경험하게 하신다든지,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은사를 주신다든지, 특별한 역사를 체험한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체험적 신앙은 반드시 먼저 그 길을 가며 이끌어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리더가 중요합니다.
체험적 신앙, 말처럼 쉽진 않습니다. 특히 미국은 학문, 이성, 지성 등 혼이 발달한 사회입니다. 발전한 사회일수록 영적인 일에 승복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그런데 영과 혼의 공통 분모는 체험입니다. 박사 학위 수십개를 갖고 있는 사람이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으면 어떨까요? 그동안 “교회는 시시하다” 하면서 안 다니던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교회를 다니게 되고 그 절망 속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치유함을 받았다면요? 그럼 그 사람은 반드시 영적 세계를 알게 됩니다. 이렇게 영과 혼은 체험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습니다.
체험적 신앙이 중요하긴 한데, 반드시 말씀과 성령의 체험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체험적 신앙을 한다고 할 때, 이것이 말씀에 근거가 없는 체험이 되면 속된 말로 ‘산신령’ 신앙이 되고 맙니다. 사람이 영적 공허함을 채우려 하지만 교회에서 말씀이 공급되지 않으면 성령과 아무런 관계없는, 근거없는 이상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따라서, 영과 혼의 공통 분모인 체험을 진리의 말씀으로 이해하고 깨닫게 되면 아주 강력한 영성을 지닌 신앙으로 자라날 수 있습니다.
-체험적 신앙에 말씀을 강조하는 것은 맞는 말이긴 하지만, “말씀을 듣고 성령 체험을 했다”는 경우가 성립 가능한가요? 왠지 성령 체험이라면 신비한 경험이어야 할 것 같은데요.
우리가 성령 성령 아무리 소리 질러도 이것은 성령 역사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생떼를 쓰는 것입니다. 기차가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갖고 있어도 철길이 있는 곳까지만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비한 체험을 하고 놀라운 기적을 맛보아도 말씀이 없다면 그 역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막연한 성령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만나게 된 성령의 역사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강조합니다. 순복음교회가 기도를 많이 하고 체험을 많이 강조한다는 것은 말씀이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그것은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역사 자체가 반드시 말씀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저는 다시 강조하고 싶습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이 성령의 체험을 할 때, 교회라는 영적 울타리 안에서 잘 가르쳐 주고 인도해 주어 삶의 열매로 맺게 하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비싼 기계일수록 매뉴얼을 따라서 사용해야 합니다. 비싼 기계를 매뉴얼도 보지 않고 아무 데나 꽂고 누르다가 펑 터지게 놓아 두는 이는 없습니다. 성령 역사의 매뉴얼이 바로 말씀입니다. 혹, 교회에서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서 마음대로 행하다가 고장난 기계처럼 ‘펑’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은 다 말씀의 매뉴얼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목회와 신앙의 본질에 관해서 많이 말씀해 주셨는데, 최근 교협이 사회 참여에 두드러지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활동도 교협이 교회연합체로서의 본질에 충실한 것이라 평가하십니까?
저는 현재 교협의 수석부회장을 맡고 있는데 변영익 회장님을 비롯해 교협을 이끄시는 분들이 모두 훌륭한 분들입니다. 요즘 교협이 추진하고 있는 일들은 교회가 사회 속에서 해야 할 사명의 일부라 생각합니다. 저는 어떤 단체건 지나친 파워를 갖는 것은 비성경적이며 위험하다고 봅니다. 부연한다면, 교협이 지역 교회들이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울타리가 되는 것이면 족하다고 봅니다. 지금 동성애 문제, 선거구 조정 문제, 4.29 폭동 기념식 등 다양한 행사를 교협이 관여해 활동하고 있는데 이것은 교협이 앞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이 지역의 모든 한인교회들이 공감대와 관심을 갖고 참여할 수 있도록 이해시키고 돕는 역할이라 평가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나눈 본질에 관한 인터뷰 중 ‘본질’을 단 한 마디로 정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예수를 확실히 알고 닮아 가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의 영입니다. 모든 진리의 말씀은 예수께서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갈수록 말세가 되어 악해지는 세상 가운데, 경제적, 사회적 위기 가운데, 교회에 희망이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힘든 이민 생활을 하시는 여러분들이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예수를 붙잡고, 그 본질을 붙잡고 그 생명의 능력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시길 기도드립니다.
-네. 목사님. 감사합니다.
이 중에도 나성순복음교회는 무려 37년간 LA 한인사회를 지켜 온 터줏대감이다. 미주 최대, 최고의 순복음교회이며 북미 지역 순복음교회의 모교회와 같은 곳이다. 그러나 자칫 이 거대한 타이틀 속에 녹슬고 구태의연해지기 쉬운 위험성이 내포된 것도 사실이다.
20여년 이상을 남미에서 선교사로 섬기던 진유철 목사가 이 교회에 부임한지 5년여가 됐다. 복음의 불모지 남미에서 기적과 같은 교회 성장을 일으켰던 그가 미주를 대표하는 이 교회에 부임한다 했을 때 놀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6년간 파라과이, 5년간 브라질에서 선교하며 순복음중남미총회장까지 지낸 베테랑 선교사 출신 목사가 무슨 일을 할지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진 목사는 “제가 한 것이 별로 없다”고 대답했다. 다음 질문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매일 열리는 새벽기도회에만 3백명씩 모인다, 젊은 층이 크게 부흥했다, 지난해 나성순복음교회 웹사이트에 25만명이 와서 설교를 듣고 가지 않았느냐”며 따지자 그제서야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진 목사로부터 ‘목회의 본질’에 관해 듣기 시작했다.
저는 선교사 출신으로 소위 ‘맨땅에 헤딩하는 개척’을 하며 문제가 아닌 주님께 집중하는 훈련을 받은 것을 참 감사합니다. 문제는 언제 어디에나 늘 있지만 주님도 언제 어디서나 늘 동행하시기에 저는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힘든 상황을 만나면, 저도 사람인지라 당장은 반응할 수 밖에 없지만 제가 목회자라는 본질로 돌아올 때, 이 힘든 상황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제가 고민하는 중요한 문제는 오로지 “내 사역 가운데 주님이 함께 하시는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내 사역이 이뤄지고 있는가?”입니다.
저는 실은 이 교회에 부임해서 뭘 새롭게 한 것이 없습니다. 전임자이신 이영훈 목사님(현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은 목회자로서 참 존경할만한 분이시고 그분이 나성순복음교회에 닦아 놓으신 것을 저는 따라가기에도 벅찹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이뤄지는 새벽기도회와 주일예배, 각종 모임들, 교회 행사들을 잘 지키며 그 기초 위에서 주어진 일들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요 몇 년 사이 나성순복음교회를 묘사하는 몇가지 표현 중에, 나성‘순’순복음교회라는 말도 있던데 “새롭게 하신 일”은 없더라도 “변화”는 확실히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한 일이 없는데 우리 성도들도 교회가 다 변화되었다고 말합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 믿음의 확신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의 능력이란 것은 환경을 뛰어 넘을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환경을 극복할 수는 있습니다. 믿음의 확신이 없으면 환경에 잠식되지만 믿음의 확신이 넘치면 더 이상 문제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가 있는데 그것이 문제가 된다면 자신이 말씀 앞에, 하나님 앞에 덜 깨어진 것이죠.
영적 생명력이 내 안에 들어오면 꿈틀거립니다. 역동성이 생깁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생명력이 넘치니 확신이 생기고 어떤 사역을 해도 감당할 수 있는 동기가 주어집니다. 참 감사한 일은 우리 교회가 많은 사역을 감당하는데 대부분이 자원봉사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억지가 아니라, 어떤 보수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자원해서, 마음의 소원을 따라서 헌신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변화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고, 이로 인해 생명력이 생기고, 믿음의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들은 헌신적으로 사역하고 역동적으로 사역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과정에서 목회자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겠지요?
외람된 표현일 수도 있지만 저는 제가 일을 찾아서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저는 주어진 일을 합니다. 남들이 밖에서 저를 볼 때 제가 참 일을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베데스다대학교의 총장도 맡고 있고 남가주 교협의 수석부회장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일들에 은사가 별로 없습니다. 주님이 맡겨 주시니 두려움으로 감당할 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사용하시도록 순종하는 것이 목회자의 도리이자 역할, 의무일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접근은 미국적 토양의 교회성장학이 말하는 교회 운영과는 반대되는 것 같습니다. 순복음교회라면 교회 성장과 상당히 밀접한 교회가 아닙니까?
반대까지는 아니고 거리감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은 기독교와 함께 그 역사가 시작됐고 기본적으로 기독교 문화가 사회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기독교적 문화 속에서 태어나 자라고 또 그런 사람을 만나서 교제합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교회성장학자들이 말하는 소위 마케팅 기법은 어떤 면에서는 자연스럽고 어울리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한국처럼 기독교의 역사가 짧은 경우는 어떻습니까? 본질을 붙잡지 않고는 아무 것도 안됩니다. 저는 선교사 출신인데 선교지는 기독교를 알지도 못하고, 그런 문화도 없고 오히려 적대적이기까지 합니다. 무슨 교회성장학을 이야기 하기 전에 비기독교 문화와의 싸움이 먼저입니다. 본질로 승부 내지 않고는 금방 무너져 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크게 부흥은 했지만 어떤 면에서 이런 본질을 더욱 붙잡는 힘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자, 보십시오. 미국은 본질의 뿌리가 있는 상태에서 성장학을 이야기 했습니다. 현재 많은 미국교회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파산한다는 소식이 들리고 성도 수가 줄어든다고 합니다. 무너질 것 같지만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본질의 뿌리가 약한데 성장학만 이야기 하고 미국식 성장을 따라 하다가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면, 한국교회가 어려움을 겪는 가장 큰 원인은 리더입니다. 리더가 무너질 때 교회가 함께 무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독교의 기초가 약한 상태에서 교회가 성장하다 보니 목회자와 리더에게 성도들이 의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리더가 무너지면 성도들은 따라 무너질 수 밖에요. 그러나 미국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의 리더가, 특히 한인교회는, 본질을 붙잡아야 합니다. 본질을 강하게 붙들 때 거기서 부흥과 성숙, 성장이 이뤄질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지금 한인교회의 목회적 흐름이 본질을 붙잡는 목회와는 거리가 있다 자성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더욱 성숙하기 위해 지날 수 밖에 없는 과정입니다. 한인사회 안에 많은 교회가 있다 보니 경쟁도, 갈등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가식적이라 비판만 말고 그 안에서 교회의 순수성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리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따라 나라가 변화되는 것처럼 우리 교회들이 한인사회를 섬길, 보다 검증되고 순수한, 희생적인 사람들이 리더가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줄 필요도 있습니다.
-순복음교회는 본질에 있어서는 ‘최선을 다한다’ 칭찬받을 수도 있지만 그 외에 있어서는 약점이 많다는 외부의 비난을 자주 직면하지요?
아픈 사람에게 가서 물질 축복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까? 아픈 이에겐 그에게 맞는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순복음교회는 한국이 경제적으로 어렵고 사람들의 삶에 희망도, 빛도 없을 때 성령의 감동으로 태동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희망을 주고 일어설 힘을 준 교회입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순복음교회 성도들이 성령에 민감하다 보니 일반인들이 만들어 놓은 틀에서 볼 때는 이상한 면이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보통 잘 하지 않는 통성기도나 박수, 신유, 축사와 같은 일들이 순복음교회에서 자주 일어나는 것은 이제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밖에서 볼 때 우리가 격식이 없고 틀이 없는 것이지 우리 내부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정확한 길을 따라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은혜를 받다 보니 그 표현이 약간 남에게 불편함을 주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태권도를 배울 때 파란 띠를 매고 나면 눈에 보이는 게 없습니다. 자기가 최고인 줄 압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사람들이 구원의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어서 확신이 생기고 기적을 체험하니 그것을 증거하고 싶어 어쩔 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순수한 열정이 표현될 때 좀 정제되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고, 자신의 단편적 경험에 근거해 판단하다 보니 또 다른 상황이 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우왕좌왕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들의 영혼이 구원받고 영적 만족을 얻었다는 점에서 저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월의식을 가져선 안될 것이며 겸손한 태도로 부족함을 보완하고 균형을 맞추어 가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성령 운동에 집중하다 보니 대사회적인 운동이나 협력에는 오히려 둔감하다는 비난은 어떻게 보십니까?
교회는 마땅히 성경적으로 해석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교회는 지역사회에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고 성도가 발딛고 사는 지역사회가 잘 되도록 하는 일에 쓰임받아야 합니다. 믿음이란 것은 결국 믿지 않는 이들을 구원하는 것이므로 성도들이 모든 면에서 믿지 않는 이들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최근 LA의 일들을 예로 들면, 선거구 조정 문제는 교포사회와 직결된 문제이기에 저도, 우리 교회도 100% 이 일에 헌신될 수는 없지만 최대한 노력하고 협력했습니다. 동성애 문제는 어떻습니까? 이것은 교포사회를 넘어 전 미국의 내일을 결정짓는 중요한 문제이며 영적으로도 그 심각성이 크기에 교회가 더욱 적극적으로 앞장서야 할 문제라 생각합니다.
-‘선교사 출신’이라는 경력이 목사님의 목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 같습니다.
저는 제 목회의 대부분을 선교사로서 보냈습니다. 사실 부르심을 일찍 받았는데 목사가 안되려고 제 인생 제 멋대로 살다가 결국 하나님께 항복했습니다. 선교지에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목회하면서 저는 죽음을 뛰어넘는 목회에 관해 오랜 기간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명예욕이나 물질욕에서 자유함을 누리게 됐습니다. 죽을 목회라고 생각하니 자유해질 뿐 아니라 정말 날마다 죽는 목회를 경험하게 됐습니다. 여러 면에서 제가 부족했지만 하나님이 저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행복한 선교사 생활을 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사랑을 체험하며 감격하고 눈물 흘리는 목회를 했습니다.
원주민목회나 이민목회나 예배함에 있어서는 다를 바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환경은 많이 달랐습니다. 일단 남미에서 목회할 때는 병원, 보험, 공권력과 같은 사회 안전 장치가 없었습니다. 사람의 노력과 힘으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니 이런 광풍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17년간 사역했던 파라과이는 교회를 신축하고 나면 경비원이 산탄총을 들고 경비를 서는 상태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예배 드리러 오는 길에 강도를 만나는 일은 예사이고, 상파울로에서 어떤 권사님은 새벽 예배를 나오며 5번이나 강도를 만났는데 나중에는 그 강도가 권사님의 얼굴까지 알아 볼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예배 나오시는 분들은 그냥 와서 눈도장이나 찍고 가는 정도로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미국은 환경이 아무래도 그곳들보단 낫다 보니 하나님께 매달리기 보다 세상에 의지하는 기대감이 더 큽니다. 그러나 어디에 있건 하나님의 주권과 역사를 알아야 나에게 주어진 이 삶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풍파 속에서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에만 끌려 다니게 됩니다. 신앙인이라면 한번쯤은 자신과 혹은 환경과 싸워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보겠다는 결단을 갖고 문제를 다스리고 기도로 매달려 봐야 합니다. 미국이 만들어 놓은 타락한 환경 속에서 끌려 가듯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파워를 잃어 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들에게 이런 도전을 줄 체험이 중요할 듯 합니다. 체험적 신앙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닌데요.
우리가 어려운 환경을 대할 때, 역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 세례를 경험하게 하신다든지,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은사를 주신다든지, 특별한 역사를 체험한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체험적 신앙은 반드시 먼저 그 길을 가며 이끌어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리더가 중요합니다.
체험적 신앙, 말처럼 쉽진 않습니다. 특히 미국은 학문, 이성, 지성 등 혼이 발달한 사회입니다. 발전한 사회일수록 영적인 일에 승복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그런데 영과 혼의 공통 분모는 체험입니다. 박사 학위 수십개를 갖고 있는 사람이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으면 어떨까요? 그동안 “교회는 시시하다” 하면서 안 다니던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교회를 다니게 되고 그 절망 속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치유함을 받았다면요? 그럼 그 사람은 반드시 영적 세계를 알게 됩니다. 이렇게 영과 혼은 체험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습니다.
체험적 신앙이 중요하긴 한데, 반드시 말씀과 성령의 체험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체험적 신앙을 한다고 할 때, 이것이 말씀에 근거가 없는 체험이 되면 속된 말로 ‘산신령’ 신앙이 되고 맙니다. 사람이 영적 공허함을 채우려 하지만 교회에서 말씀이 공급되지 않으면 성령과 아무런 관계없는, 근거없는 이상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따라서, 영과 혼의 공통 분모인 체험을 진리의 말씀으로 이해하고 깨닫게 되면 아주 강력한 영성을 지닌 신앙으로 자라날 수 있습니다.
-체험적 신앙에 말씀을 강조하는 것은 맞는 말이긴 하지만, “말씀을 듣고 성령 체험을 했다”는 경우가 성립 가능한가요? 왠지 성령 체험이라면 신비한 경험이어야 할 것 같은데요.
우리가 성령 성령 아무리 소리 질러도 이것은 성령 역사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생떼를 쓰는 것입니다. 기차가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갖고 있어도 철길이 있는 곳까지만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비한 체험을 하고 놀라운 기적을 맛보아도 말씀이 없다면 그 역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막연한 성령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만나게 된 성령의 역사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강조합니다. 순복음교회가 기도를 많이 하고 체험을 많이 강조한다는 것은 말씀이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그것은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역사 자체가 반드시 말씀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저는 다시 강조하고 싶습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이 성령의 체험을 할 때, 교회라는 영적 울타리 안에서 잘 가르쳐 주고 인도해 주어 삶의 열매로 맺게 하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비싼 기계일수록 매뉴얼을 따라서 사용해야 합니다. 비싼 기계를 매뉴얼도 보지 않고 아무 데나 꽂고 누르다가 펑 터지게 놓아 두는 이는 없습니다. 성령 역사의 매뉴얼이 바로 말씀입니다. 혹, 교회에서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서 마음대로 행하다가 고장난 기계처럼 ‘펑’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은 다 말씀의 매뉴얼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목회와 신앙의 본질에 관해서 많이 말씀해 주셨는데, 최근 교협이 사회 참여에 두드러지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활동도 교협이 교회연합체로서의 본질에 충실한 것이라 평가하십니까?
저는 현재 교협의 수석부회장을 맡고 있는데 변영익 회장님을 비롯해 교협을 이끄시는 분들이 모두 훌륭한 분들입니다. 요즘 교협이 추진하고 있는 일들은 교회가 사회 속에서 해야 할 사명의 일부라 생각합니다. 저는 어떤 단체건 지나친 파워를 갖는 것은 비성경적이며 위험하다고 봅니다. 부연한다면, 교협이 지역 교회들이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울타리가 되는 것이면 족하다고 봅니다. 지금 동성애 문제, 선거구 조정 문제, 4.29 폭동 기념식 등 다양한 행사를 교협이 관여해 활동하고 있는데 이것은 교협이 앞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이 지역의 모든 한인교회들이 공감대와 관심을 갖고 참여할 수 있도록 이해시키고 돕는 역할이라 평가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나눈 본질에 관한 인터뷰 중 ‘본질’을 단 한 마디로 정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예수를 확실히 알고 닮아 가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의 영입니다. 모든 진리의 말씀은 예수께서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갈수록 말세가 되어 악해지는 세상 가운데, 경제적, 사회적 위기 가운데, 교회에 희망이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힘든 이민 생활을 하시는 여러분들이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예수를 붙잡고, 그 본질을 붙잡고 그 생명의 능력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시길 기도드립니다.
-네. 목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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