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5:31~46
성경에서 우리에게 확실하게 증거하시는 종말론적 심판에 대해서 지상교회와 천상교회를 구분해서 가르칩니다. 천상교회는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얻은 모든 성도들의 신령한 영들이 그곳에 가서 순진하게 영적 소망의 분위기로만 교제하는 곳이고 지상에 있는 교회는 그 교회 안에 신자와 불신자가 공존하게 되어 있습니다. 전도를 받아 온 새신자들은 믿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하다 할지라도 아직 깨닫기 전이라면 구원을 얻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교회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서둘러 하루 한 시간이라도 빨리 구원을 얻어서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고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하나님 말씀대로 믿음 생활하기를 힘써야 그 사람이 언제 죽더라도 그 영혼이 하늘나라에 올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회개를 통한 하나님의 아들됨
영국의 어느 광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미국의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초대받아 광부 8,000명 가량을 모아놓고 설교를 했습니다.
이 설교를 듣는 동안은 갱도에 들어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그 설교가 듣고 싶지 않아도 잠깐이나마 휴식을 취하기 위해 모두 앉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몰랐던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어져서 잘못 살았던 지난날들을 용서해 달라고 울부짖으며 회개를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영적 충만한 모습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지독하게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기도가 부족해서 말씀을 통한 권세와 능력이 미흡한 것이 아닌가 자책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집회 날 비지땀을 흘리며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집회가 다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던 길에 누군가 뒤에서 “저는 목사님이 땀을 흘리고 목이 쉬도록 외치시지만 그것이 도무지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하는 말이 무엇인가 알고 싶지만 깨달아지지 않는 맘인듯 싶어 길에 앉아 그 사람에게 복음의 기본교리를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하는 것을 들어보면 제대로 듣지 않은 사람과 같이 질문을 했답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시간낭비인 것 같아 돌아가라고 권했으나 이 사람은 말씀 중에 믿지 않는 자는 유황불이 있는 지옥으로 간다는 말이 너무나 두렵고 무서워 이렇게 떠날 수가 없으니 제발 깨닫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답니다. 이에 목사님은 그 사람의 머리에 손을 얹고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게 하시고 회개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한 후 다시 한번 말씀을 전함으로 이 사람이 성령을 받아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날 밤 그 영혼은 성령을 받고 영적 소망의 기쁨으로 밤새도록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다음날 갱도에 들어갔던 그는 갱도의 버팀목이 무너지면서 그곳에 묻혀 버렸습니다. 구출 과정에서 구출된 많은 사람들은 죽었으나 이 사람만은 주머니 속에 있었던 요한복음으로 된 쪽복음을 가슴에 안고 죽음을 준비하며 기도했지만 이 사람만은 살아 남았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이렇게 하나님이 데려가실 줄 알고 어젯밤에 제 영혼을 구원시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제가 살아온 삶은 후회스러운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그 귀한 은혜를 조금이라도 보답해 드리고 가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하는 이 기도 때문에 하나님이 살리신 줄 믿습니다. 후에 신학을 하고 이 사람은 목회자의 길을 갔습니다. 하나님의 쓰실 기대 때문에 허물어진 갱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 생명을 붙들어 주신 줄 믿습니다. 그가 회개하지 않고 그 고집대로 그 밤을 보냈다면 죽었을 것입니다.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2. 양과 염소의 기준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영적인 소망의 구원을 확실히 가지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하나님 품에 안기기를 원하는 간절함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시고 살리실 것이고 하나님 섬길 수 있는 기회와 조건을 반드시 허락해 주셨을 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상태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리고 심판 날에 예수님이 심판장으로서 공명정대하게 판단하시어 양과 염소를 갈라내실 것입니다. 구원 얻은 후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고 영적인 성과를 위하여 애쓴 사람들은 크게 칭찬하시고 영생의 주인공으로 들여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교회 다니면서 교인으로서의 행세는 했으나 예수님 보시기에 영적인 소망이 실패하여 쭉정이와 염소로 확인되면 그 왼편에 두실 것이라 합니다.
성경에서 양과 염소로 표현한 것은 양은 온순하여 그 목자의 말을 잘 듣고 다르지만 염소는 고집쟁이고 음탕하고 욕심꾸러기 성격을 가진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고집쟁이고 욕심쟁이라 함은 지나친 자기중심적 성격을 말하고 음탕한 것은 혈기와 정욕뿐인 것을 말합니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25:32~33) 오른편은 항상 보호와 힘이 되는 것을 상징하고 왼편은 버려지는 의식의 위치가 됩니다.
오른편에 둔 양떼들에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5~36)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의인들, 신앙인격이 올바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임금에게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마25:27~29)하고 묻습니다. 이들의 솔직한 질문에 예수님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25:34)라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마25:41~43)하고 꾸짖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당당하게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마25:44)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21~23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하십니다.
오래 전 성은교회를 처음 시작할 때는 어렵고 힘겨운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가진 것이 넉넉했다면 걱정없이 나누어 살았겠지만 그러지 못해 그 안타까운 마음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적은 것이라도 나누어 먹이려고 애를 쓰곤 했습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예배당을 짓기 위해 땅을 파내고 벽돌을 만들어 가며 예배당을 지을 적에 모두가 먹을 것이 없어 삐쩍 마른 모습으로 노동을 하는 것을 보면서 무엇도 해 줄 것이 없는 자신을 바라보며 참으로 마음 아픈 적도 있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영양실조로 쓰러진 교인을 부둥켜 안고 울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게 주어진 사명이기에 감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김포에 있는 도랑에 메기, 붕어, 미꾸라지 같은 것들이 바가지로 퍼 올릴 정도로 많다는 말이 귀가 번쩍 뜨여 보리쌀 섞인 밥을 싸 가지고 교인들 여럿과 함께 기차를 타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도착하여 아무리 찾아도 물고기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싸가지고 간 보리밥을 먹으면서도 이중에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 의심스런 마음을 가진 자가 생겨날까 봐 걱정도 되어 얼른 밥을 먹고 한적한 곳에 가서 이대로 돌아가면 성은교회 부흥에 막대한 지장이 올 거라며 고기를 많이 잡아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 후 일어나서 도랑 둑쪽으로 가다보니 그곳에 고기가 많이 있기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고기를 많이 잡아 가지고 돌아오면서 참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교회에 가지고 와서 그 고기로 국을 끓여 굶주린 교인들에게 배가 부르도록 먹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우리의 기도를 다 들어 주셨습니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왜 믿고 살지 못하는 겁니까? 믿음으로만 살았더라면 지금 여러분의 형편이 목자로 하여금 가슴이 뿌듯하도록 하나님 앞에 연거푸 감사만 터져 나와야 할 것인데 지금도 병든 양떼, 헐벗고 굶주린 양떼가 있으니 이것이 누구의 책임인지 확실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3. 피할 수 없는 심판
예전에 서울법원 판사를 하고 있던 장로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한강 상류 쪽으로 가족들과 함께 휴가를 즐기던 중 한 청년이 한강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그 청년의 발목을 잡고 끌어 올려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후 그 가족들은 고마움에 때때로 찾아와 죽을 목숨 살려준 것에 고마움을 표시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재판 중에 피고석에 선 자가 자신이 구해 준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아는 사람이라 내심 기대를 하고 자신을 장로님께 밝혔습니다. 그러나 장로님은 “나는 판사로, 너는 죄인으로 이 자리에 선 것이다. 예전에 너를 살리신 이는 하나님이셨고 나는 하나님의 도구로 너를 살리는 일에 쓰임받은 것 뿐이다. 너는 하나님 앞에도 심판을 받을 것이다”하며 죄지음을 책망하며 판결을 내렸습니다.
여러분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무리 죄를 지어도 다 용서하신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심판은 칼날같이 예리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어떻게 했느냐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이 청년은 이렇게 선처해 주지 않을려면 왜 그때 나를 살렸느냐며 원망 섞인 소리를 했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잘해 주어서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지옥 보내는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는 항상 진리에 입각해서 성령이 인도하심을 따라 공명정대하게 양떼를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야 합니다. 사람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날선 검이 우리의 죄악된 것을 완전히 도려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혼을 살리는 수술 칼로 주신 것입니다. 이 칼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무디어지게 만들어 자신의 양떼의 등이나 긁어주는 어리석은 목사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겸손하고 진실된 양의 성품으로 거듭나도록 합시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예수님의 심장을 가진 신앙인의 모습이랍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확실하게 증거하시는 종말론적 심판에 대해서 지상교회와 천상교회를 구분해서 가르칩니다. 천상교회는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얻은 모든 성도들의 신령한 영들이 그곳에 가서 순진하게 영적 소망의 분위기로만 교제하는 곳이고 지상에 있는 교회는 그 교회 안에 신자와 불신자가 공존하게 되어 있습니다. 전도를 받아 온 새신자들은 믿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하다 할지라도 아직 깨닫기 전이라면 구원을 얻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교회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서둘러 하루 한 시간이라도 빨리 구원을 얻어서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고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하나님 말씀대로 믿음 생활하기를 힘써야 그 사람이 언제 죽더라도 그 영혼이 하늘나라에 올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회개를 통한 하나님의 아들됨
영국의 어느 광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미국의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초대받아 광부 8,000명 가량을 모아놓고 설교를 했습니다.
이 설교를 듣는 동안은 갱도에 들어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그 설교가 듣고 싶지 않아도 잠깐이나마 휴식을 취하기 위해 모두 앉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몰랐던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어져서 잘못 살았던 지난날들을 용서해 달라고 울부짖으며 회개를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영적 충만한 모습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지독하게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기도가 부족해서 말씀을 통한 권세와 능력이 미흡한 것이 아닌가 자책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집회 날 비지땀을 흘리며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집회가 다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던 길에 누군가 뒤에서 “저는 목사님이 땀을 흘리고 목이 쉬도록 외치시지만 그것이 도무지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하는 말이 무엇인가 알고 싶지만 깨달아지지 않는 맘인듯 싶어 길에 앉아 그 사람에게 복음의 기본교리를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하는 것을 들어보면 제대로 듣지 않은 사람과 같이 질문을 했답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시간낭비인 것 같아 돌아가라고 권했으나 이 사람은 말씀 중에 믿지 않는 자는 유황불이 있는 지옥으로 간다는 말이 너무나 두렵고 무서워 이렇게 떠날 수가 없으니 제발 깨닫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답니다. 이에 목사님은 그 사람의 머리에 손을 얹고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게 하시고 회개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한 후 다시 한번 말씀을 전함으로 이 사람이 성령을 받아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날 밤 그 영혼은 성령을 받고 영적 소망의 기쁨으로 밤새도록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다음날 갱도에 들어갔던 그는 갱도의 버팀목이 무너지면서 그곳에 묻혀 버렸습니다. 구출 과정에서 구출된 많은 사람들은 죽었으나 이 사람만은 주머니 속에 있었던 요한복음으로 된 쪽복음을 가슴에 안고 죽음을 준비하며 기도했지만 이 사람만은 살아 남았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이렇게 하나님이 데려가실 줄 알고 어젯밤에 제 영혼을 구원시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제가 살아온 삶은 후회스러운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그 귀한 은혜를 조금이라도 보답해 드리고 가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하는 이 기도 때문에 하나님이 살리신 줄 믿습니다. 후에 신학을 하고 이 사람은 목회자의 길을 갔습니다. 하나님의 쓰실 기대 때문에 허물어진 갱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 생명을 붙들어 주신 줄 믿습니다. 그가 회개하지 않고 그 고집대로 그 밤을 보냈다면 죽었을 것입니다.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2. 양과 염소의 기준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영적인 소망의 구원을 확실히 가지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하나님 품에 안기기를 원하는 간절함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시고 살리실 것이고 하나님 섬길 수 있는 기회와 조건을 반드시 허락해 주셨을 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상태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리고 심판 날에 예수님이 심판장으로서 공명정대하게 판단하시어 양과 염소를 갈라내실 것입니다. 구원 얻은 후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고 영적인 성과를 위하여 애쓴 사람들은 크게 칭찬하시고 영생의 주인공으로 들여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교회 다니면서 교인으로서의 행세는 했으나 예수님 보시기에 영적인 소망이 실패하여 쭉정이와 염소로 확인되면 그 왼편에 두실 것이라 합니다.
성경에서 양과 염소로 표현한 것은 양은 온순하여 그 목자의 말을 잘 듣고 다르지만 염소는 고집쟁이고 음탕하고 욕심꾸러기 성격을 가진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고집쟁이고 욕심쟁이라 함은 지나친 자기중심적 성격을 말하고 음탕한 것은 혈기와 정욕뿐인 것을 말합니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25:32~33) 오른편은 항상 보호와 힘이 되는 것을 상징하고 왼편은 버려지는 의식의 위치가 됩니다.
오른편에 둔 양떼들에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5~36)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의인들, 신앙인격이 올바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임금에게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마25:27~29)하고 묻습니다. 이들의 솔직한 질문에 예수님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25:34)라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마25:41~43)하고 꾸짖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당당하게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마25:44)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21~23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하십니다.
오래 전 성은교회를 처음 시작할 때는 어렵고 힘겨운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가진 것이 넉넉했다면 걱정없이 나누어 살았겠지만 그러지 못해 그 안타까운 마음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적은 것이라도 나누어 먹이려고 애를 쓰곤 했습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예배당을 짓기 위해 땅을 파내고 벽돌을 만들어 가며 예배당을 지을 적에 모두가 먹을 것이 없어 삐쩍 마른 모습으로 노동을 하는 것을 보면서 무엇도 해 줄 것이 없는 자신을 바라보며 참으로 마음 아픈 적도 있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영양실조로 쓰러진 교인을 부둥켜 안고 울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게 주어진 사명이기에 감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김포에 있는 도랑에 메기, 붕어, 미꾸라지 같은 것들이 바가지로 퍼 올릴 정도로 많다는 말이 귀가 번쩍 뜨여 보리쌀 섞인 밥을 싸 가지고 교인들 여럿과 함께 기차를 타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도착하여 아무리 찾아도 물고기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싸가지고 간 보리밥을 먹으면서도 이중에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 의심스런 마음을 가진 자가 생겨날까 봐 걱정도 되어 얼른 밥을 먹고 한적한 곳에 가서 이대로 돌아가면 성은교회 부흥에 막대한 지장이 올 거라며 고기를 많이 잡아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 후 일어나서 도랑 둑쪽으로 가다보니 그곳에 고기가 많이 있기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고기를 많이 잡아 가지고 돌아오면서 참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교회에 가지고 와서 그 고기로 국을 끓여 굶주린 교인들에게 배가 부르도록 먹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우리의 기도를 다 들어 주셨습니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왜 믿고 살지 못하는 겁니까? 믿음으로만 살았더라면 지금 여러분의 형편이 목자로 하여금 가슴이 뿌듯하도록 하나님 앞에 연거푸 감사만 터져 나와야 할 것인데 지금도 병든 양떼, 헐벗고 굶주린 양떼가 있으니 이것이 누구의 책임인지 확실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3. 피할 수 없는 심판
예전에 서울법원 판사를 하고 있던 장로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한강 상류 쪽으로 가족들과 함께 휴가를 즐기던 중 한 청년이 한강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그 청년의 발목을 잡고 끌어 올려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후 그 가족들은 고마움에 때때로 찾아와 죽을 목숨 살려준 것에 고마움을 표시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재판 중에 피고석에 선 자가 자신이 구해 준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아는 사람이라 내심 기대를 하고 자신을 장로님께 밝혔습니다. 그러나 장로님은 “나는 판사로, 너는 죄인으로 이 자리에 선 것이다. 예전에 너를 살리신 이는 하나님이셨고 나는 하나님의 도구로 너를 살리는 일에 쓰임받은 것 뿐이다. 너는 하나님 앞에도 심판을 받을 것이다”하며 죄지음을 책망하며 판결을 내렸습니다.
여러분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무리 죄를 지어도 다 용서하신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심판은 칼날같이 예리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어떻게 했느냐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이 청년은 이렇게 선처해 주지 않을려면 왜 그때 나를 살렸느냐며 원망 섞인 소리를 했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잘해 주어서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지옥 보내는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는 항상 진리에 입각해서 성령이 인도하심을 따라 공명정대하게 양떼를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야 합니다. 사람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날선 검이 우리의 죄악된 것을 완전히 도려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혼을 살리는 수술 칼로 주신 것입니다. 이 칼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무디어지게 만들어 자신의 양떼의 등이나 긁어주는 어리석은 목사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겸손하고 진실된 양의 성품으로 거듭나도록 합시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예수님의 심장을 가진 신앙인의 모습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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